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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악마에게 농락당한 기분 (33/129)


33화. 악마에게 농락당한 기분
2022.09.22.


백작님의 저주가 궁금해요.

그 한마디가 적당히 굴러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시온의 표정은 대번에 굳었고, 이비는 아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으로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이비의 집사는 독자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비가 놀라서 헛숨을 삼키자마자 디에스가 막사 안으로 달려와 이비를 낚아챘다. 그러더니 이비를 안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움직임은 시온조차 대응하지 못할 만큼 신속했고, 그래서 이비는 막사를 벗어난 후에야 자신이 디에스에게 안겨 있는 걸 깨달았다.


“디에스, 잠깐만……!”

이비가 집사를 멈춰 세우기 위해 소리쳤다.

그런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오싹한 기운이 전신을 핥았다.

그들이 본능의 경고를 느낀 직후, 굉음과 함께 주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꺄악!”

이비는 파열음과 섬광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디에스는 한 팔로 이비를 붙든 채 바닥을 긁으며 멈춰 섰다.

벼락은 연신 이어지며 이비와 디에스 주변을 휘감았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의 어깨를 더 꽉 쥐며 혀를 찼다.

이 막사에 있던 조사단들은 싸우거나 저항한 흔적 없이 각자의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말 이상한 흔적이다 싶었는데 이거였다.

시온 라우렐이 용을 추락시킬 때나 쓸 벼락으로 병사들을 일시에 제압한 거였다.

디에스는 섬뜩하게 번뜩이는 뇌전 사이로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빠져나갈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사이 낙뢰의 주인이 두 사람을 느긋하게 따라잡았다.


“도망칠 필요 없습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와 함께 이비와 디에스를 둘러싼 섬광이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안심할 수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겠지만.”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백작의 차가운 서슬 때문이었다.

백작의 접근에 디에스가 이비를 뒤로 숨겼다.

그리고 그 모습은 시온을 꽤 기막히게 만들었다.


 
시온은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비 아리아테가 멋대로 겁먹자 그의 집사가 멋대로 끼어들어 도주했을 뿐.

이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이제는 무슨 새끼를 지키는 개처럼 비장하게 이비 아리아테를 숨기고 경계하니, 시온에겐 그저 우습고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하죠. 안 어울리게 겁먹은 척하지 말고.”

시온은 일부러 이비의 집사를 무시하고 그 어깨너머의 이비에게 말했다.

다행히 이비는 집사보다 현명했다.

이윽고 집사의 등 뒤에서 나온 이비는 긴장한 얼굴로 시온을 마주했다.

디에스의 빠른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조사단의 병영 안이었다.

횃불이 붉게 일렁이고 여기저기 병사들이 널브러진, 게다가 직전에 벼락이 한바탕 내렸던 그 어수선한 곳에서 시온이 물었다.


“나에 대해 뭘 아는 겁니까?”

“백작님께도 저주가 내린 걸 알아요.”

“왜 그런 의심을 하지?”

“의심이 아니에요. 이미 확인했어요.”

“무슨 수로?”

“집사가, 아마네세르의 눈으로.”

이비의 실토에 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아마네세르의 눈이라니, 왜 집사라는 자가 그런 걸 달고 있는 거지?

아마네세르의 눈이란 용의 통찰을 흉내 내기 위해 인간의 눈에 아마네세르의 조각을 박아 넣은 것이다.

용의 육체는 인간이나 동물의 그것보다는 오히려 광물에 가깝다.

그래서 노화하지도 썩지도 않으며, 설령 조각나더라도 그 신체 일부 하나하나에 고유한 능력이 남는다.

탑주가 아마네세르의 조각을 보고 정신없이 욕심을 부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마네세르는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용이고, 그의 조각에도 그런 통찰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아마네세르의 조각은 주로 점을 칠 때 사용하는데, 드물게는 노예의 눈에 박아 고위 귀족들의 사냥개를 만들기도 했다.

아마네세르의 눈을 단 사냥개들은 진짜 개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다양한 심부름을 도맡는다.

첩보라든가, 추적이라든가, 아니면 암살이라든가.

그런데 이비의 집사가 그 사냥개의 눈을 달고 있다고 하니, 시온은 저 집사가 본격적으로 거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온의 뇌리에 아까 저녁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이비와 저 집사가 안경에 관심을 보이며 얼굴을 가까이 내밀던 일을.

그 일을 떠올린 시온의 입에 차가운 조소가 걸렸다.

그때였나보다. 미미한 통찰력으로 시온의 저주를 간파한 건.

어쩐지 쓸데없이 살갑게 군다 싶었는데,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또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

시온의 눈빛이 한결 싸늘해졌다. 그리고 이비는 그의 분위기 변화를 여실히 느꼈다.


“그래서 또 뭘 압니까?”

“백작님에 대해 아는 건 이것뿐이에요. 나머진 추측이에요.”

“그래서 무슨 추측을 했죠?”

“라우렐 대공 가에서 저주를 이용하고 있다는 추측이요. 백작님, 잠깐 기다려 주세요……!”

속내를 술술 털어놓고 궁지에 몰린 이비가 다급히 외쳤다.

그에 디에스가 다시 나서려 하자 그의 발치에 섬광이 스쳤다.

뇌전이 소리 없이 땅을 긁으며 연기를 피워 냈고, 시온은 경고의 의미를 담아 디에스를 차갑게 노려봤다.

아까처럼 끼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디에스를 향한 시온의 시선은 이비를 볼 때와 달리 냉혹했다.

그렇게 사냥개를 제압한 후, 시온이 다시 말했다.


“마저 얘기하시죠.”

기다려 달라는 이비의 호소 때문인지 그의 말하기 방식은 질문에서 권유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다.

바보같이, 이런 상황도 대비해야 했는데.

하지만 백작의 저주를 막 알아낸 와중에 마르소 부인이 찾아와서 미처 대비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이조차도 이비의 실책이지만.

이비는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다가 곧 마음을 다잡았다.

자책해 봐야 이미 늦었다. 물은 엎질러졌고 시온 라우렐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대응할 수밖에.


“……저주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백작님께 저주를 걸 만큼 간 큰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러다 역대 라우렐 백작님들의 성향에 생각이 미쳤고, 혹시 대공 가에서 저주를 이용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네세르의 감시 임무를 맨정신으로 감당하긴 힘들 것 같아서요.”

이비가 차분히 고하자 시온은 결국 한숨을 토했다.

쓸데없이 영리한 이비 아리아테. 어쩌자고 이런 걸 알아내서.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다.

게다가 입단속이 불가능한 저 이비 아리아테는 그냥 두면 확실히 단명하게 생겼다.

시온이 한숨을 쉬자 이비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 죽이실 건가요?”

“안 죽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시온이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비는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되물었다.


“그럼 저희 집사는요?”

“그건 고민해 보겠습니다.”

물론 손댈 생각 없지만, 시온은 일부러 뾰족하게 말했다.

아마네세르의 눈까지 동원해 제 비밀을 파헤친 주제에 뻔뻔하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이비 아리아테가 괘씸해서.

그래서 몇 마디 더 해 줄까도 싶었는데, 이비가 안 어울리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시온은 결국 서슬을 누그러트렸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런 추측을 했다고 입막음하거나 매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벼락은 왜 던지셨어요?”

“도망치니까 반사적으로.”

시온의 대답에 이비는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 어이없는 눈으로 시온을 쳐다봤다.

용한테 던질 벼락을 사람한테 던져 놓고 반사적으로 그랬다니, 거의 까무러칠뻔한 이비는 심히 억울해졌다.

그러나 시온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기웃대며 수작을 부려 놓고 그럼 이 정도도 안 당할 줄 알았나?

시온은 이렇게 생각하며 이비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오히려 만족스럽게 감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용히 혀를 찼다.

이비 아리아테가 정말 쓸데없이 영리하다 싶어서.

이비의 추측은 다 맞았다.

정의로운 라우렐 대공 가는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차남들을 경계에 내몰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저주를 이용했다.

이건 라우렐의 큰 비밀이지만, 시온은 이걸 감추기 위해 딱히 노력할 마음은 없었다.

애당초 그는 가문의 안위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고, 역대 백작의 상태에 대해선 이미 온갖 구설이 나돌고 있다.

게다가 라우렐 대공 가에서 저주를 이용한 사실이 알려진들 크게 바뀔 것도 없다.

라우렐이 제 자식을 저주하든 매장하든 번제로 태우든, 귀족들은 그 득을 보는 한 얌전히 구경이나 할 것이다. 대신 고결한 척하던 라우렐 대공 가의 면만 좀 상하겠지.

그러니까 이어진 시온의 경고는 라우렐이 아니라 이비를 위한 것이었다.


“추측은 자유지만 그 얘긴 입 밖에 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저도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비에게 시온의 충고는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

시온도 뒤늦게 그걸 깨닫고 다시 혀를 찼다.

눈치는 빠른데 입단속이 안 되는 이비 아리아테. 이러다 정말 사고 한번 크게 치겠다.


‘역시 가둬 둘까?’

시온의 마음이 감금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리고 그런 낌새를 챘는지, 이비가 어물쩍 몸을 뺐다.


“……이야기가 갑자기 이쪽으로 샜는데, 밤이 늦었으니까 내일마저 이야기할까요? 그리고 오늘은 꼭 귀가해 주세요. 아마 마을 사람들 모두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여기 상황은 제가 정리할게요.”

이비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시온도 김이 새서 그만 돌아가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온은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이비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수년간 강적과 싸워 온 시온에겐 예리한 감이었다. 적에게 마지막 수가 남았는지 아닌지 알아채는 본능적인 감이.

시온은 아마네세르와 싸울 때처럼 묘한 직감을 느꼈다. 그래서 혹시나 하며 이비에게 물었다.


“나에 대한 추측은 아까 말한 게 답니까?”

“아니요, 더 있어요.”

이건 진짜…….

시온의 눈이 도로 날카로워지자 이비는 오히려 발끈해서 대들었다.


“백작님, 사고의 자유를 존중해 주세요!”

“존중합니다. 그래서 추측은 얼마나 더?”

“세 개 더요.”

한두 개도 아니고 세 개라니, 똑똑한 건 인정해줘야겠다.

시온은 이 편리하고 솔직한 저주에 미소를 지었고 이비는 밑천을 다 드러내는 저주에 울상을 지었다.


“얘기해 보시죠. 순서대로.”

질문이 아니라 권유인 건 그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그렇다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비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찬찬히 입을 열었다.


“우선 역대 라우렐 백작님들의 저주와 지금 백작님의 저주는 다를 거라고 추측했어요.”

“이유는?”

“백작님 성격이 너무 개성적이어서요.”

이비의 퉁명한 본심에 시온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것도 맞췄다. 하지만 그리 놀랍진 않다. 몇 가지만 살펴봐도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래서 시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해 보라는 듯이.

그 거만한 태도에 이비는 울컥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백작님의 원래 저주를 풀어 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백작님도 경계에 들어가기 전에 역대 백작님들처럼 저주를 받긴 받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정도 일이 아니면 백작님이 빚을 졌다고 할 것 같지도 않고요.”

이어진 말에 시온의 미소가 결을 바꿨다.

가벼움이 사라지고 조금 심각해졌다. 이번에도 이비가 정확히 추론했기 때문이다.

이건 좀 놀라워서 시온은 감탄하지 않으려고 팔짱을 꼈다.

그런 시온의 분위기를 살피며 이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작님껜 여전히 저주가 있으니까, 그건 아마 아저씨가 저주를 풀어 준 후에 새로 생긴 저주일 거예요.”

다행히 마지막 추론은 빈약했고, 시온은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이비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백작님이 맨정신으로 저주를 내버려 둘 리 없으니, 백작님이 그걸 묵인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그렇다면 이것도 라우렐 대공 가에서 다시 건 저주겠죠. 이전의 저주를 대신할 목적으로.”

결국 시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남들보다 특별히 많은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비 아리아테는 시온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이비가 말한 건 시온 외엔 아무도 모르는, 그의 이복형인 라우렐 대공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모조리 간파당한 시온은 마치 악마에게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은 척 나직이 말했다.


“……끝입니까?”

“아니요.”

이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백작님이 가진 저주는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저주겠구나, 라고 추측하는 중이에요.”

결국 시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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