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도망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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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도망치지 마세요!
2022.09.19.
발소리를 들은 시온이 사자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이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시온은 막사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그 의자의 원래 주인을 발걸이로 쓰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에게 발을 걸쳐 두다니, 대단한 폭거지만 어째선지 시온 라우렐은 저 모습이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원래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런 흉포한 모습으로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니, 그와 눈이 마주친 이비는 놀라서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비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긴 어쩐 일이신지.”
한편 반사적으로 날을 세웠던 시온은 이비를 보고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그 의아한 목소리에 저도 몰래 얼었던 이비는 그제야 조용히 숨을 뱉었다.
백작과 이래저래 얽히는 바람에 이비는 오히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실감한 적조차 없었다. 홀로 재앙을 막아낸다는 그의 실체에 대해.
그런데 이렇게 군대를 제압한 시온 라우렐을 보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새삼 와 닿았다.
덕분에 꽤 놀랐지만, 이비는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마르소 부인이 큰일 났다고 해서 와 봤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발걸이를 힐끗댔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의 발걸이, 기절한 조사단장을 발로 밀어 치우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별일 없습니다.”
“제 눈엔 별일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벌려 놓고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시게요.”
이비가 염려하듯 말하자 시온이 정말 안 어울리게 맑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퍽 홀가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 밤 이사할 예정이라.”
“이사요?”
“새 집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시온은 짓궂을 정도로 태연했다.
아무래도 그는 이미 정리를 끝낸 것 같았다. 이 마을에서의 생활도, 이비의 제안에 대해서도.
단호히 거절당했지만 이비는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다.
애당초 저 오만하고 버릇없는 백작님이 이비의 손을 곱게 잡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바옌의 군대까지 끼어들어 귀찮게 하니, 이참에 떠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이비는 놀랍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무척이나 놀란 듯 말했다.
“그래서 이 밤중에 훌쩍 떠나겠다는 말씀이세요?”
이비의 반응에 시온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는 미간을 모으며 더 난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믿을 수가 없어요. 백작님께서 이렇게 무책임한 분이셨다니.”
이비의 노골적인 질책이 그의 만족을 깨트렸다.
뜻밖의 말에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이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극적으로 말했다.
“이대로 가면 다들 백작님께 큰일이 난 줄 알 텐데, 정말 이렇게 떠나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쩜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생각도 안 하고……. 이 밤중에 뛰어다닌 마르소 부인은 또 어떻고요. 다들 마음이 까맣게 타서 선생님을 빼앗아 간 세상을 원망할 텐데, 어쩜 좋아…….”
이비는 이후로도 어쩜 그렇게 냉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냐며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을 마주한 사람처럼 한탄했다.
그래서 시온이 듣다못해 읊조렸다.
“그게 협박하는 당사자가 할 말인지.”
“협박이라뇨?”
하지만 이비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러더니 바보를 외면하는 얼굴로 중얼댔다.
“협박이 어떤 건지 이제 좀 아실 줄 알았는데…….”
그 자그마한 목소리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비에게 당했던 진짜 협박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비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아침에 한 건 협박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백작님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 드리겠다는 약속이요.”
이비는 마치 아이를 가르치듯 차근차근 말했고, 시온은 그 말과 태도 전반이 거북한 듯 인상을 썼다.
그래서 이비는 속으로 웃었다.
이심전심으로 이비 역시 디에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온 라우렐의 성미가 서쪽 산맥의 고약한 야생마를 꼭 빼닮았다고.
그 우월하고 고고한 짐승들은 모든 구속을 거부한 채 거침없이 초원을 누빈다.
티엔다를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시온 라우렐도 언뜻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건 서쪽 산맥의 야생마도 저들끼리는 무리 지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저는 이게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작님은 버거우셨군요. 저 때문에 소중한 일상까지 포기할 정도로…….”
이비는 상냥하게 말하는 척 시온의 심기를 재차 긁었고, 시온은 이번에도 착실히 반응했다.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이비 아리아테에게, 이미 차고 넘치게 어려운 시온 라우렐은 정말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이비의 눈에 그는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정작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이 후미진 마을에 자리를 틀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소박한 세계에 잘 어울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어슬렁대는 그의 꼴은 사실 닭장에 앉은 사자처럼 어색했다.
그렇게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너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이비는 마을에서 그를 발견한 순간부터 이게 정말 궁금했다.
“백작님의 지난 시간과 추억이 이토록 저렴하고 가벼운 줄 몰랐어요.”
이비가 선을 넘을 듯 말 듯 계속해서 그의 성미를 건드렸다. 물론 시온에겐 더없이 낯선 일이었다.
“……편한 쪽으로 생각하십시오.”
시온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대로 훌쩍 떠날 생각 같았고, 그래서 이비는 자신을 지나치는 시온의 옷자락을 확 붙잡았다.
덕분에 시온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이비 아리아테가 그의 간격을 멋대로 파고든 건.
마냐냐 탑에선 손으로 입을 막지 않나, 마르소 부인을 피해 등 뒤로 숨질 않나, 아까는 갑자기 안경에 관심을 보이며 기웃대기도 했다.
이비가 그럴 때마다 시온이 느끼는 건 별로 안 친한 고양이가 갑자기 머리를 기대올 때 느끼는 난감함과 비슷했다.
너무 가벼워서 쳐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쓸데없이 거슬리는.
결국 시온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이비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훈계했다.
“가도 된다고 안 했어요.”
“허락이 필요한 일입니까?”
“그럼요. 여태 저한테 허락 없이 이것저것 하셨으니까 이제부터 부지런히 허락받으셔야죠.”
허락 없이 이것저것이라니,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로 오해하기 좋은 말이다.
그 와중에 이비의 표정은 너무나 당당했고, 덕분에 시온은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
이비는 그런 백작님을 향해 더 방긋 웃어 드렸다.
이비 아리아테가 관심 두고 지켜본바, 이 어린 양이 홀로 방황하는 이유.
그건 양치기가 없는 탓이었다.
시온이 알면 싸늘히 냉소하겠지만, 이비는 그의 모습이 어릴 적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한때 이비는 아무도 붙잡지 않는 아이였고, 지금의 백작은 아무도 붙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위치는 천지 차이지만 우습게도 결과는 같다.
외따로 고독하다는 점에서.
그래서 이비는 이 백작님을 하찮게 대해 주기로 했다.
그래야 남들이 잔뜩 띄워 놓은 콧대가 꺾여 자기가 구름이 아니라 사람인 걸 알 테니까.
야생마든 사람이든, 무리가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니까.
“도망치지 마세요. 지금처럼 지낼 수 있게 제가 지켜 드릴게요.”
이비가 그를 붙잡고 재차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슬슬 이게 나랑 장난하나 싶어졌다.
이비는 마치 노린 것처럼 그에게 거슬릴 표현만 골라서 사용했다.
무책임하다, 버겁냐, 포기하는 거냐, 저렴하다, 가볍다, 허락받아라, 도망치지 말아라 등등.
게다가 계속 반복되는 ‘지켜 드리겠다’까지.
전부 시온이 들어본 적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연이은 매도에 기가 막혀 시온이 차갑게 물었다.
“그럴 능력이나 있으신지.”
“그죠, 저는 무능해서 백작님을 협박하는 것밖에 못 해요.”
하지만 이비 아리아테는 오히려 훌륭하게 반격해 왔다.
그러면서도 백작이 정말 화를 낼 것처럼 정색하자 냉큼 눈빛을 바꿔 덧붙였다.
“하지만 백작님, 저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의지라고 생각해요.”
이게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시온이 어이가 없어 쳐다봤지만, 이비는 이번에도 모르는 척 무시했다.
대신 여전히 붙잡고 있는 시온의 셔츠 뒷자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요 며칠, 백작님이 왜 하필 여기에 머물고 계실까 생각해 봤어요. 아저씨에게 빚이 있다고 하셨지만, 단지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이 살던 집까지 찾아올 것 같진 않거든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답을 구하듯 시온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이비는 더 작게 속삭였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층집이 제게 특별한 것처럼 백작님께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떠나게 두고 싶지 않아요. 그럼 너무 외로울 것 같아요. 백작님도, 이 마을 사람들도요.”
이비의 속삭임은 더없이 갸륵했고, 시온은 덩달아 속내가 복잡해졌다.
그는 이렇게 끈질긴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털면 날아가고 지나치면 멀어졌다.
멋모르는 꼬마들이 치대며 다가오는 것도 그가 얄팍한 선생 가면을 쓰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비는 그가 누군지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요령 좋게 파고든다.
그로써 그의 완고함을 흔들어 다시 갈등하게 만들고 기어이 인정하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생에 손꼽을 정도로 특별히 솔직해진다면, 시온은 이 생활을 지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타협하는 건 원치 않았다. 단 한 번도 꺾여 본 적 없는 자존심이 그걸 철저히 거부했다.
그런데 이비가 그것을 도망이라고 명명하며 제왕의 자존심은 새로운 기로에 섰다.
이비의 말장난에 미련 없이 떠나는 건 도망이 되고, 그가 타협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히려 불굴의 의지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느 쪽을 택하든 상관이 없어졌다. 본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
그래 놓고 감정에 호소하며 가련히 붙잡으니, 시온은 이대로 넘어갈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반쯤 넘어갔다.
그럼에도 그가 버티는 건, 최선을 다해 선량한 표정을 짓는 이비 아리아테가 영 찝찝했기 때문이다.
시온은 이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남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녀석인 걸 경험으로 아는바, 이비의 의도를 강하게 의심했다.
그러다가 물어보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문을 시작했다.
“지금 하는 말은 진심입니까?”
“상당 부분 진심이에요.”
“다른 속셈은?”
“물론 없지는 않죠.”
그럼 그렇지.
시온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아주 무시무시한 냉소였다.
이비는 거의 넘어올 것 같던 백작이 다시 고집을 부리자 난감함에 고개를 저었다.
“저기, 백작님. 지금 꼭 이렇게 나오실 필요는…….”
“그래서 어떤 속셈입니까?”
시온이 가볍게 물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가식을 확인하고 허울 좋은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다며 비난할 의도였다.
그런데 정작 이비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백작님의 저주가 궁금해요.”
그 한마디에 시온의 표정이 대번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