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시온 라우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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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시온 라우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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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시온 라우렐의 권리
2022.09.08.
이비 아리아테는 시온에게 다양한 첫 경험을 선사했다.
협박, 패배, 굴욕. 뭐 이런 것들.
또 하나 추가하자면 ‘지켜 드릴게요.’ 같은 말을 들은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참신한 경험이 그의 무료한 삶을 조금이라도 유쾌하게 만들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켜 드리겠다니 감히 누구한테.
오늘, 이비 아리아테는 별안간 찾아와 세상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이 집은 제가 샀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백작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걸요.
―첫째, 다시는 제 앞길을 막지 말아 주세요. 둘째, 제가 저주를 풀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저도 백작님을 지켜 드릴게요.
이게 시온의 속을 뒤집으려고 한 말이라면 이비는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다.
비단 말뿐일까, 이비의 의기양양한 태도도 그의 기분을 잔뜩 비틀어 놓았다.
아무래도 이비 아리아테는 탑의 징계 중단이 자신의 온전한 승리라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온은 상당한 패배감에도 불구하고, 이걸 이비의 승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시온이 이비의 징계를 막은 이유 절반은 본인의 사정 때문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이비를 지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시온의 선언도 이비를 궁지에 몰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금방 희석될 일이었다.
하지만 저주는 달랐다. 폭로된 순간 이비의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져 이비 아리아테가 그토록 바라는 티엔다에서의 안락한 삶에 영구적인 해를 끼칠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탑주에게 아마네세르의 조각까지 바쳐가며 이비의 징계를 무마시켰다.
이 역시 그에겐 상당한 굴욕이었는데, 이걸 까맣게 모르는 이비 아리아테가 겁도 없이 찾아와 알랑대니 그로서는 어이없고 괘씸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계산했을 수도.’
문득 떠오른 의심에 시온은 더 언짢아졌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더럽게 보수적이고 그냥 더럽기도 한 티엔다 사교계에 완벽히 적응한 이비 아리아테라면 말이다.
시온은 이가 갈리는 걸 참으며 이비의 제안을 곱씹었다.
그 제안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너무 굽히지도, 그렇다고 너무 누르지도 않으며 적당히 화해를 구하는 모양새는 퍽 영리하기도 하다.
하지만 시온이든 이비든 상대에게 유효한 제안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이비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우선 시온은 거래에 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티엔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림하는 귀족들과 달리, 그는 지난 7년간 미친 용으로부터 티엔다비스를 수십 차례 구해 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딱 그 숫자만큼 시온 라우렐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고, 그래서 시온은 모든 것에 당당했다.
그는 만인이 자신에게 기생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우선할 권리, 어떤 일에도 감사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타인과 동등하지 않을 권리를 얻었다.
그게 아마네세르와 일평생 싸워야 하는 빌어먹을 숙명을 통해 그가 얻은 유일하게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권리에는 한가지 오점이 있었다.
그 남자가 남긴 빚. 이비 아리아테에게 갚아야 하는 그 빚이 시온의 발목을 붙잡는 유일한 오점이자, 동시에 시온이 이비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였다.
‘아마네세르의 조각으로 다시 거래해 볼까?’
전당에는 아마네세르의 비늘이 아직 몇 조각 남아 있다.
이걸 탑주에게 넘기고 이비 아리아테의 성녀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면 어떨까.
티엔다 귀족들이 또 헛소리를 지껄이겠지만 아무렴 어떠리, 이미 그는 집착이 가득한 괴물로 회자 중이다.
그러니 귀족들의 시선은 문제가 아니지만, 탐욕스러운 로히카 세드로가 괜한 눈치를 채면 그것도 성가시다.
그래서 시온은 차라리 이비 아리아테를 감금하면 어떨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보석상자 같은 집을 하나 사서 성녀 발탁식이 끝날 때까지 고이 가둬 두면…….
“선생님!”
시온이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뒤를 보니, 자그마한 단발머리 꼬마가 커다란 바구니를 안고 언덕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지난 그믐, 독안개에 휩쓸렸던 시온의 제자였다.
제자의 등장에 시온은 한숨을 뱉으며 울타리에 걸치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걸 대단히 싫어하지만, 학생에겐 가끔 예외였다.
“선생님네 가고 있었어요. 엄마가 이거 선생님 주래요.”
꼬마가 품에 안은 바구니를 시온에게 내보였다. 그 안에는 싸구려 치즈와 과일 따위가 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지난 그믐, 시온이 안개를 헤치고 그들을 꺼내온 일에 대한 답례 같았다.
시온은 바구니를 받아 팔에 걸쳤다. 그러곤 거기 있던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갠 후 한쪽은 자기 입에 물고 나머지 한쪽은 제자의 입에 물렸다.
지난 겨울에 수확한 사과는 이미 때를 넘긴 탓에 반쯤 시들어 푸석푸석했다.
타르데스 전당에서는 말에게나 먹일 법한 싸구려지만, 시온은 익숙한 듯 그 떫은 과육을 씹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는 당연한 듯 선생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함께 사과를 오물댔다.
이 거리가 경계의 부사령관은 물론, 라우렐 대공조차 들어올 수 없는 간격인 걸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근데 선생님 여기서 뭐 해요?”
“아무것도 안 해.”
“나 그거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하는 어른은 건달이에요.”
선생을 건달 취급하는 학생이라니, 심히 잘못 가르쳤다.
하지만 시온은 뭐라고 하는 대신 벌써 사과 반쪽을 해치운 제자에게 바구니에 있던 치즈도 꺼내 주었다.
“선생님, 고민이 있어요.”
“안 궁금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요.”
성격 나쁜 스승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자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각한 얼굴로 백년해로를 논하려 하는 제자의 나이는 올해 아홉.
아직 한 자릿수 나이를 가진 이 꼬마가 자신의 선생님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시온은 이 녀석이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구나 싶어, 이 헛된 망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부숴 줄까 고민했다.
그리고 꼬마는 선생님의 생각을 까맣게 모른 채 진지하게 말했다.
“성녀 언니랑 결혼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이 배신자.
시온이 입에 사과를 문 채 배은망덕한 제자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꼬마는 옛사랑엔 일말의 미련도 없는 듯 티엔다로 가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여자끼리도 결혼할 수 있죠, 같은 말을 종알댔다.
그러더니 자신이 결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차게 떠들었다.
성녀 언니는 예쁘고 착해요. 우리 가족을 구해 줬어요.
“게다가 솔직해요!”
시온은 제자의 이비 아리아테 찬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그 마지막 말에는 차갑게 조소했다.
솔직하긴 대체 어디가.
시온은 이비 아리아테가 가식으로 점철된 인물인 걸 제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러다 이 녀석과 이비 아리아테의 대화를 떠올리고 웃음을 뚝 그쳤다.
―언니도 우리 선생님 좋아해요?
―아니, 나는 너희 선생님이 정말 싫어.
그땐 그냥 어이없게 넘겼는데, 돌이켜 보니 이것도 이비의 확고한 진심이었다.
그래서 시온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물론 지난 일을 생각하면 이비가 그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몇 년간 이비 아리아테의 존재를 의식해 온 그와 달리, 이비에게 시온 라우렐은 돌연 나타나 자신의 평이한 앞길에 훼방을 놓은 불청객에 불과하다.
그러니 저 단호한 불호 표현이 이비의 진심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시온은 내심 언짢았다.
그래서 제자가 나타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는 호밀밭으로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호밀밭을 끼고 있는 마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호밀밭 너머엔 과수원이 있고, 그 뒤로 보이는 너른 들판엔 양들이 한가롭게 무리 지어 있다.
비스 외곽의 촌구석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좋은 마을이었다. 그 남자가 이비 아리아테를 위해 고른 마을답게도 말이다.
시온이 그들의 흔적을 쫓아 여기 온 지도 벌써 2년이 다 됐다.
처음 왔을 땐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이곳 생활을 그만 청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난입으로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는 약점이 잡힌 채 고분고분하게 구는 성격도 아니었다.
스승님의 이런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난간에 매달려 장난을 치던 제자가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앗, 고래 깃발이다!”
아이가 가리킨 마을 어귀엔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을에 주둔 중인 바옌 군대의 깃발이었다.
저것도 시온이 짐을 빼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바옌의 군대는 지난 그믐, 이 마을에서 생긴 이례적인 저주를 살펴본다며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변두리 촌구석이라고 여태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비 아리아테 때문에 티엔다의 이목이 쏠리자 뒤늦게 일하는 척 허둥지둥 달려온 것이다.
“아저씨들이 그러는데요, 어쩌면 우리 마을을 옮길 수도 있대요.”
아이가 울타리에 턱을 댄 채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큰 저주가 나온 게 우리 마을에서 산에 가축을 숨긴 것 때문이래요. 그래서 또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마을을 비우게 할 거래요.”
아이의 염려 섞인 말에 시온은 재차 한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저 무능한 것들은 쉬운 길을 택했다.
사태의 원인을 알아볼 능력도 다음 그믐에 대비할 의지도 없으니 그냥 마을을 비워서 문제를 지울 셈인 거다.
역시 이 마을을 뜰 때가 된 모양이다.
시온은 한심스러운 기분을 삼키며 결심을 굳혔다.
우려한 대로 이비 아리아테는 존재만으로 시온의 일상을 화려하게 파괴했다.
하지만 원망할 생각은 없다.
시온 라우렐에겐 자신의 뜻을 우선할 권리, 어떤 일에도 감사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타인과 동등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달리 말해 그것은 모든 것과 분리될 권리,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지 않을 권리이다.
시온은 그런 상태를 바라는 사람이고, 이런 마을에 미련을 느끼는 건 그 바람과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떠날 계기가 생긴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지켜 드리겠다는 이비 아리아테의 발언은 비웃어 줘야겠지만.
“만약 이주하면 우리 어디로 가요? 마을 사람들 다 헤어져요?”
“헤어질 일은 없을걸.”
제자의 염려에 시온은 무심히 대답했다. 괜한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돈 있는 몇몇은 다른 마을로 넘어가겠지만, 형편이 고만고만한 이 마을의 정든 이웃들은 다 함께 더 척박한 땅으로 밀려날 거다.
그리고 거기서 온갖 고생을 하며 마을을 개간해야 할 테니, 적어도 헤어지진 않겠지.
시온이 남 얘기하듯 말하자 아이가 보채듯 되물었다.
“그럼 선생님은요? 선생님도 같이 갈 거죠?”
그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아이는 당연히 선생님도 함께할 거라 믿는 얼굴이었다.
그 순전한 눈빛에 시온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평소처럼 가감 없이 대답하려고 했는데 왠지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은 아직 손에 남은 사과를 입에 물며, 처음으로 제자의 물음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