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뻐요, 잘 먹을게요
(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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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기뻐요, 잘 먹을게요
2022.09.05.
이비는 여러 가지를 각오하며 유비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비아가 갑자기 천장을 보며 딴소리를 꺼낸 탓이었다.
“그런데 위층에 있는 건 누구야?”
“백작님.”
이비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까 한껏 놀리고 오긴 했지만, 백작은 이비에게 여전히 버거운 상대였다.
더욱이 그가 정체를 숨긴 것을 빌미로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중인데, 이렇게 마구 발설하면 곤란한 사람은 이비였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사람이야.”
실수한 이비를 위해 디에스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유비아는 고개를 갸웃대다가 이비에게 다시 물었다.
“친해?”
“그 ‘친해’가 ‘친절하게 해치고 싶다’의 줄임말이면 응, 친해.”
이비의 본심이 또 한 번 튀어나왔다. 덕분에 이비는 자신이 참 꼬여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편 안 그래도 세모꼴인 유비아의 입은 더 세모나게 닫혔다. 무언가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서둘러 그의 주의를 끌었다.
“위층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어.”
유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위층에 기울었던 호기심을 지우고 이비의 손을 맞잡았다.
“내가 보는 걸 보여 줄게. 조금 놀랄지도 몰라. 하지만 위험하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유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이비도 유비아를 따라 눈을 살며시 감았다.
눈을 감자 유비아의 보송한 손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남자아이도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 다소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였다.
―내 목소리 들려?
분명 마주 앉아 손을 잡고 있는데, 이비의 귓가에서 유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비는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눈앞의 광경에 또 한 번 헛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늑한 의자에 앉아 있던 이비는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허공에 놓여 있었다.
주위엔 끝도 없는 어둠이 있었다. 하지만 칠흑은 아니었다. 어둠 너머 간간이 크고 작은 빛이 있었고, 그래서 이비는 꼭 밤하늘 가운데 놓인 기분이었다.
―잘 따라 들어왔어.
이비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에서 유비아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그래서 이비는 유비아를 찾아 두리번대다가,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자신의 옆에 떠 있는 걸 발견했다.
―유비아?
이비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토끼처럼 생긴 하얀 생명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앗, 이 정도로 귀여운 건 반칙이잖아.
유비아는 사람이 아니라 소동물의 형상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이비는 유비아를 보다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비는 멀쩡하게 원래 모습이었다.
―여긴 노체의 세계야. 그냥 꿈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유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팔랑팔랑 이비의 손목 쪽으로 날아갔다.
―이거 보여?
이비는 유비아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의 손목에 묶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주의 매개야. 이게 너랑 너에게 저주를 건 사람, 그리고 뱀을 연결하고 있어.
그 말에 이비는 자신의 손목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건 긴 끈의 형태로 이비의 팔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양 갈래 끝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끈이 정확히 어떤 재질인지, 어떤 색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안개나 신기루처럼 일렁이며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비는 머뭇대다가 그것을 손으로 쥐어 보았다. 가볍고 매끈한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이비는 기분이 꽤 복잡해졌다.
저주에 대한 건 이미 징그럽게 실감하고 있지만, 이걸 눈으로 확인하니 새삼 처참했다.
―이 끈을 잡고 따라가 봐.
―어느 쪽부터?
―오른쪽. 너에게 저주를 건 사람과 연결된 거야.
유비아의 말에 이비는 억지로 웃었다.
나한테 저주를 건 원수들과 이토록 꼼꼼히 연결되어 있다니, 부디 사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비는 거부감을 삼키며 유비아가 골라 준 끈을 붙잡았다. 그러곤 그것을 당기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 끈은 어디까지 늘어졌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가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팔을 당기자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비의 눈앞에 이 끈처럼 일렁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역시 모든 게 흐릿하고 불명확했지만, 이비는 자신과 크기가 비슷한 그 형태를 보고 직감적으로 중얼댔다.
―사람?
―응, 너한테 저주를 건 사람이야. 만져 봐, 어떤 사람인지 느껴질 거야.
이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유비아의 말처럼 여러 가지가 느껴졌다.
그는 여자였다. 꽤 젊은 여자. 동시에 얼음장같이 싸늘하고 안개처럼 희미한, 꺼림칙한 여자였다.
너 누구야, 왜 날 저주한 거야?
이비는 그 여자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댔다. 그러자 물음에 화답하듯, 이비를 향한 그 여자의 감정이 전해졌다.
대수롭지 않은 것. 관심 없는 것. 거슬리는 것.
그 여자가 이비에게 가진 감정은 상당한 무관심과 일말의 거추장스러움뿐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꽤 기가 막혔다.
저주까지 걸었으면서 이렇게 사람을 소 닭 보듯 하다니.
아무래도 이 저주는 원한 같은 게 아니라 이해득실에 따라 이루어진 모양이다.
이비는 이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다못해 머리 색이나 체형만이라도.
하지만 그 여자의 형체는 마치 불꽃처럼 쉼 없이 일렁이며 이비의 눈을 어지럽혔다.
게다가 가만히 서 있던 여자가 돌연 몸을 돌렸다. 이비가 놀라서 쳐다보자, 그 앞에 또 다른 형체가 나타났다.
―뱀이야.
유비아가 이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뱀이라고? 갑자기?
이비가 짐짓 당황하는데, 두 형체가 이비의 눈앞에서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유비아가 뱀이라고 한 형상이 여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사 서임을 받는 것처럼. 정중히 낮춘 그 몸은 분명 남성의 것이었다.
여자가 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언뜻 작고 가볍고 얇아 보였다. 손수건?
뱀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입을 맞췄다.
이비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 때였다.
이비와 유비아를 배제한 채 무언가 재연하던 뱀이 갑자기 이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이비의 몸이 밑으로 쑥 꺼졌다.
―꺄악!
이비는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채 끌고 가는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다급히 유비아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둠과 빛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끌려가나 싶더니, 이비의 귓가로 들척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날 만나러 온 거예요?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이비는 헛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꼴인지 깨닫고는 더욱 경악했다.
희고 거대한 뱀이 이비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이비는 그 뱀의 똬리 속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신세였다.
기둥처럼 두꺼운 뱀이 이비의 몸을 조여 왔다. 숨이 막히고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비가 참다못해 신음을 흘리자, 뱀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기뻐요, 잘 먹을게요.
뱀이 입을 크게 벌리며 이비에게 달려들었다.
이비는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깨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래서 뱀이 이비를 집어삼키기 직전,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
.
.
이비는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 눈을 뜬 이비는 이층집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유비아의 물음에 이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소매를 걷어 보니 팔에 소름이 잔뜩 돋아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뭔가 큰일 날 뻔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유비아를 향해 신음했다.
“안 위험하다며…….”
“우리가 훔쳐보는 걸 뱀이 느꼈나 봐. 그래서 쫓아왔어.”
유비아가 의기소침한 얼굴로 말했다. 이비는 더 뭐라고 할 수 없어 한숨만 길게 토했다.
부디 바보이길 바랐는데, 이비가 잡아야 하는 그 뱀은 교활할 뿐 아니라 몹시 섬뜩하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이비는 이마를 짚었다.
이비가 숨을 돌리는 사이, 디에스가 유비아에게 물었다.
“너는 확인했어?”
“응, 나도 뱀을 봤어. 그러니까 이제 구분할 수 있어.”
“그럼 바로 쫓을 수 있는 건가?”
“쫓는 건 쉬워. 그런데 뱀이 숨은 곳에 들어가는 건 어려워.”
유비아의 말에 디에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뱀이 숨은 곳이 밤의 일족의 거점이라도 되나?”
“아니야. 우리는 모여 있는 거 정말 안 좋아해.”
“아깐 셋이 모여 있다고 했잖아.”
“모여 있는 게 아니라 갇혀 있는 거야. 투기장에.”
유비아의 담담한 대답에 디에스는 물론, 이비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투기장?”
“응, 비스의 어떤 대부호가 만든 거야. 평소엔 용병이나 맹수들을 싸우게 하는데, 남몰래 밤의 일족을 이용한 경기도 열고 있어.”
그 악명 높은 밤의 일족이 투기장에 갇혀 투견 취급을 받다니,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런데 놀랄 이야기가 더 있었다.
“저번 삭월 때 이 마을에 난리 난 거, 그것도 투기장 때문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원래 밤의 일족은 저주를 끌어당겨. 그런데 거기에 셋이나 뭉쳐 있으니까 이 지역으로 밀도 높은 저주가 몰린 거야.”
밤의 일족은 저주가 된 인간이자 인간의 탈을 쓴 저주. 그래서 그믐이 되면 어김없이 저주를 끌어들인다.
그런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으니, 이곳에 이변이 일어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이비는 유비아가 알려 준 사실에 경악하다가, 또 한 번 움찔하고 놀랐다.
‘……셋이 아니라 넷 아닌가?’
지난 그믐, 유비아도 이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유비아 역시 그 이례적인 저주가 발생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게 아닐까?
“걱정하지 마, 나는 저주를 부르지 않아.”
이비의 의심을 느꼈는지, 유비아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옷 안을 뒤적여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성인 남자의 손에도 가득 찰 만큼 큰 주머니였는데, 그 안에는 자잘한 결정이 가득했다.
“마냐냐의 소금?”
“응, 이걸 가지고 있으면 그믐이어도 저주가 모이지 않아. 대신 매달 새로운 소금을 구해야 해.”
유비아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고, 이비는 유비아가 왜 그렇게 큰돈을 요구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투기장이라니, 새로운 난관에 이비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집사, 투기장 잠입도 가능해요?”
“사람을 너무 막 굴리는 게 아닌지…….”
“어쩌겠어요, 내가 구를 순 없잖아요.”
“없긴요, 하면 누구보다 잘할 겁니다.”
이비가 디에스를 지옥문 앞에 세우려고 은근히 밑밥을 깔 때였다.
옆에서 유비아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자, 유비아가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투기장은 정말 나쁜 곳이야.”
물론 투기장이 좋을 리 만무하다.
“모르는 척하면 안 돼. 성녀님이 될 거라며.”
이 녀석, 또 급소를 치다니.
아무래도 유비아는 이비가 이 상황에 분개해 주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이비의 분개가 얼마나 무력한 건지 모르고.
부담을 느낀 이비가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는데, 때마침 천장에서 삐거덕대는 소리가 울렸다.
2층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였다.
‘백작인가?’
그 발소리는 마치 화가 난 듯 계단을 쿵쿵 찍으며 내려왔다. 그래서 이비는 저 발소리가 백작의 것임을 확신했다.
빠른 발소리가 1층 복도에도 울리더니, 이내 현관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백작님의 갑작스러운 출타에 대화가 끊겼고, 이비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유비아는 이미 하던 이야기에 관심을 잃고 창문으로 백작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어쩐지 유비아가 백작에게 관심이 많다 싶어 이비가 물었다.
그러자 유비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혹시 알고 있어?”
“뭘?”
“저 사람도 저주에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