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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25/129)


25화.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2022.08.25.


라우렐 성에서 열린 라우렐 백작의 환영회 이후, 유력했던 성녀 후보 이비 아리아테는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귀족이자 경계의 감시자인 라우렐 백작을 모독.

격분한 백작이 이비 아리아테의 성녀 발탁을 공식적으로 반대.

이에 아리아테는 백작에게 사죄하고자 비스의 경계로.

모두 몰락의 전초 같은 상황이었고, 이비를 향한 귀족계의 시선도 최악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티엔다가 또 한 번 떠들썩해지며 이비 아리아테에 대한 평가가 뒤집혔다.

서재에서 쪽지를 살펴보던 이비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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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배를 들고 싶은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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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안 됩니다. 케이크로 참으세요.”

모처럼 흥이 돋은 이비가 음주를 희망했으나, 그의 깐깐한 집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샴페인 대신 체리 케이크가 앞에 놓였지만 이비는 그럼에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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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단맛이네요.”

이비가 체리를 물고 행복하게 중얼댔다.

지난 그믐, 이비는 비스에서 규율을 어기고 노래했다. 이에 대해 귀족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마을에 퍼진 독을 정화해서 수백 명을 구하다니, 이건 역사에 남을 일이에요! 라며 소리치는 아르코 영식의 패션은 오늘도 난해.

―감동했어요, 징계받을 걸 분명 알았을 텐데, 아리아테 양은 정말 선한 사람이에요, 라며 동조하는 의견 다수.

낭만을 사랑하는 젊은 귀족들은 이비의 행동을 희생적이고 고결하고 아무튼 성녀 같은 거라며 칭송했다.

―마을을 구한 건 잘한 일이지만 규율을 깬 건 문제, 용의 가호를 사적으로 써선 안 된다는 의견을 중립인 척 내놓는 귀족 일부.

―규율이 생명보다 우선이냐, 비스의 가련한 사람들을 구했다, 사적으로 썼다기엔 휘말린 마을이 둘이었다, 라는 반박 빗발침.

대다수의 귀족도 어쨌든 이비의 구제가 옳았다고 평했다.

―이 일은 바옌 공작의 군대를 무시한 행위, 훗날 비스를 통치하는 데 악영향을 줄 거라며 개소리하는 귀족 몇 명.

일부 귀족들이 이비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큰소리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탑의 징계가 중단된 탓이었다.

이비가 백작을 욕했을 때 다들 대공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낀 것처럼, 이번에도 귀족들은 탑의 눈치를 보며 강한 비판을 삼갔다.

이로써 이비의 평판은 쾌적하게 높아졌다.

하지만 정작 이비가 기뻐하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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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탑의 징계를 무산시키는 바람에 귀족이 충격을 받았나 봐요.”

이비가 케이크 시트의 폭신함을 만끽하며 말했다.

사실 지금 티엔다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은 이비가 아니라 백작이었다.

―아마네세르의 조각이 정화자의 징계와 맞바꿀 정도로 저렴한 물건이었냐, 라며 기막혀하는 목소리 다수.

―백작이 이비 아리아테를 감싼 이유를 모르겠다, 모욕당했다고 분개하지 않았었나, 라며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다수.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몰래 불평하는 목소리 소수지만 꾸준.

귀족들은 라우렐의 눈치를 보면서도 백작의 기행을 두고 쉼 없이 떠들었다.

물론 이 정도로 흔들릴 라우렐이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 또 다른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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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아주 흥미로워하는 무리도 있고 말이죠.”

디에스가 아끼는 찻잔에 홍차를 따르며 말했다.

말마따나 일부 귀족들은 이 일을 흥미로워하다 못해 열광하는 중이었다.

―궁지로 몰 땐 언제고 위기에서 구해 주다니, 부숴도 내 손으로 부수겠다는 걸까요? 이 무슨 뒤틀린 집착……. 이라며 넌지시 장작을 넣는 어느 귀부인.

―생각해 보면 백작은 연회장에서도 아리아테만 쳐다봤어요. 한눈에 반한 것처럼……. 이라며 냉큼 부채질하는 어느 영애.

―이전부터 지독하게 얽혀 있던 사이 같아요. 아니면 이비 아리아테가 연회장에서 그렇게 진저리를 내며 백작을 거절하진 않았겠죠, 라며 추리를 시작하는 어느 영식.

―그러니까 아리아테를 성녀로 만들면 가만 안 있겠다는 선언도 사실 거절당한 남자의 보복이었던 것……! 이라며 위험하게 단정 짓는 어느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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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풉!”

쪽지를 다시 읽던 이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귀족들의 상상 속에서 라우렐 백작은 점점 이상한 인물로 왜곡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의 앞길을 꽉 막아 버렸던 그의 선언도 덩달아 진의를 의심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운데, 이비에겐 뜻밖의 우군도 있었다.

―설마 라우렐 백작이 좋아하는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고 아마네세르까지 들먹이며 겁박했겠냐, 설마 라우렐 백작이 그렇게 저급한 방식으로 처녀를 희롱하는 불한당이겠냐, 라우렐 백작이 그 정도로 공사 구분 못 하는 호색한에 망나니라고 나는 절대 믿고 싶지 않다, 라며 바옌 공작이 세간의 소문을 평정. 바옌 공작, 당신을 최고의 명예 살해자로 임명합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바옌 공작은 아주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덕분에 백작이 이비에게 별짓을 다 하며 추근댄다는 이야기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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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후후…….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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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하게 웃지 마시죠…….”

이비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케이크를 문 채 실실대자 보다 못한 디에스가 핀잔했다.

물론 디에스도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백작의 선언 이후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회를 잡아 판을 뒤집다니. 정말 대단한 잔머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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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 예측대로 움직여 줬으니 다행인데, 만약 백작이 나서지 않았으면 어쩔 셈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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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과 파멸을 받아들일 셈이었죠.”

디에스의 물음에 이비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 순전한 진심에 디에스가 오싹한 얼굴로 쳐다보자, 이비는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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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은 있었어요. 그 사람, 절박해 보였거든요.”

제왕에게 절박이라니.

영 안 어울리는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확신했다.

티엔다에서 백작은 여유롭고 거만하게 자신의 용무를 통보했다.

그런데 비스에서 만났을 때, 그리고 이비가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을 때 그는 웃었다. 날 협박하는 거냐며.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엔 성녀 소리만 듣고 벌떡 일어나 살벌하게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이 모습이 이비의 눈에는 상처를 숨기는 맹수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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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은 진짜 선생님 같았고요.”

못된 성미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비는 확신했고, 또 환호했다.

아, 시온 라우렐아, 이 거만한 백작님아.

약점이 있으면 잘 숨겨야지, 아닌 것처럼 굴어야지.

하지만 여태 약점이 있어 본 적도 없는 탓인지, 그는 오히려 이게 내 약점이니 건들면 큰일 날 거라고 친히 경고해 주었다.

이비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단서를 주시면 이쪽에선 잘 써먹을 수밖에.

그래서 이비는 일부러 징계받으려고 마냐냐의 소금을 뿌렸다. 그 후 백작에게 저주에 대한 걸 밝히고 그를 움직여 귀족계의 시선을 틀 생각이었다.

마을에 독이 퍼져 노래한 건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이마저도 보기 좋게 이비의 계획에 포함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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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축배를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기쁨을 참지 못한 이비가 다시 외쳤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이비에겐 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라우렐 백작의 체면이 점점 나락으로 향하는 걸 느꼈는지, 라우렐 대공이 나섰다.

그는 백작의 지난 선언을 철회한다고 밝히며, 아마네세르의 경계 임무 역시 지금처럼 완벽하게 지속될 것이라 약속했다.

대공이 이비에 대해 따로 언급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다들 이렇게 이해했다.

아, 저 잘못된 사랑이 가문 차원에서 정리되었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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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가 케이크로 축배를 대신하던 그 시각, 시온은 굴욕감과 패배감이라는 낯선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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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이번 일은……. 아니다.”

이복형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배려하는 얼굴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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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정말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여성에게 꽃과 편지를 보내는 절차에 대해 제가 간략히 보고를 드려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부사령관은 정말 안타까운 눈으로 뭘 알려 주려다가 시온이 노려보자 후다닥 물러났다.

그래서 시온은 반쯤 미칠 지경이었다.

이비 아리아테는 말 한마디로 그를 조종했다.

시온은 그게 이비의 의도인 걸 알면서도 그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모든 일이 공들인 장난처럼 절묘하게 이어졌다.

이비는 시온을 이용해 징계를 면했다.

그 결과 이비에 대한 시온의 선언은 힘을 잃었다.

게다가 시온 라우렐은 여자에게 집착해 변덕과 기행을 일삼는 아주 이상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지금까지 시온은 티엔다의 인간들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로 난생처음 티엔다 놈들에게 해명이라는 걸 하고 싶어졌다.

모두 이비 아리아테의 만행이었다.

서재에 홀로 앉아 있던 시온은 결국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평소의 총사령관 각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온 세상으로부터 기만당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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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애였어?’

시온은 비로소 깨닫게 된 이비의 실체에 신음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비의 눈망울이 마냥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떠올려 보니 그 눈에 가득한 건 가련함이 아니라 결의였다.

하늘이 무너지든 발밑이 꺼지든,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을 찾고 길을 만들겠다는 결의.

그런데 순한 얼굴만 보고 그 안에 담긴 것도 당연히 말랑할 거라고 넘겨짚었다.

더하여 저주에 걸린 이비를 단지 바보라고 단정 지었다.

이 두 가지가 시온의 패착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깨달아 본들 너무 늦었다.

라우렐 대공이 대신 철회한 시온의 선언은, 시온이 이비의 성녀 발탁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게 그렇게 날아간 이상 그에게 더 좋은 다른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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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시온은 책상에 머리를 댄 채 신음했다.

그는 티엔다로 오며, 빚 청산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귀족인 자신과 평민인 이비 아리아테의 권력 차를 고려하면, 그에게서 성녀 자리를 빼앗는 건 어린아이의 사탕을 빼앗는 것만큼 손쉬운 일일 거라고 믿었다.

물론 꼭 그만큼 비열하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이비는 쥐고 있던 사탕을 빼앗기기는커녕 사탕의 막대로 그의 눈을 찌르고 사람들을 불러 저 파렴치한 놈 좀 보라며 그를 매장했다.

시온은 자신이 당한 일이 황당해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얼마 못 가 뚝 그쳐 버렸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로써 이비를 보호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날아갔다.

이대로라면 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비 아리아테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녀가 될 것이 뻔했다.

시온은 머리가 도로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 남자, 이비의 점성술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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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는 강해. 강한 데다가 영리하고 대범하고 눈치도 빠르고 요령도 좋고 말도 잘하고 게다가 노력도 대단히 많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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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야. 정말.

얼마 전까진 대체 어디가 멋진 거냐고, 전부 기억의 왜곡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당해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가 왜 그토록 이비 아리아테를 사랑하고 존경했는지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하는 시온을 질책하듯, 점성술사의 마지막 당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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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시온은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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