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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이건 협박이에요 (24/129)


24화. 이건 협박이에요
2022.08.22.



“사실 저는 지금, 저주에 걸렸어요.”

이비의 말에 백작의 미간이 또 좁아졌다.

그래서 이비는 저도 몰래 웃었다. 인상 쓰는 게 이 사람 버릇이구나 싶어서.

이비는 그렇게 생긋 웃는 얼굴로 반신반의하는 백작에게 말했다.


“묻는 말에 반드시 솔직하게 대답하는 저주예요. 좀 이상하죠?”

이비가 장난스레 물었지만 백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게 진담인지 농담인지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비는 백작의 혼란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백작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저주에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대뜸 버릇없다고 말한 거예요. 인사조차 안 받아 주시는 백작님이, 솔직히 버릇없어 보이기는 했거든요.”

이비는 작은 실수를 고백하듯 귀엽게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저 말의 진위를 더 고민해야 했다.

저주라니, 이런 건 모른다. 점성술사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짓말이라 치부하기엔 짚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지금까지 시온에게 가장 익숙한 이비의 모습은, 묻는 말에 이상한 대답을 해 놓고 황급히 자기 입을 막는 것이었다.


“다음 날 저희 집에 오셨을 때도, 탑에서 다시 뵈었을 때도 제가 이상한 말을 너무 많이 했죠? 그것도 전부 저주 때문이었어요.”

이비 아리아테의 이상한 말.

이건 일일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대신 두 개의 장면이 시온의 뇌리에 뚜렷이 떠올랐다.

이비 아리아테가 대화 중 계속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든 것.

그리고 이비 아리아테가 대뜸 손을 뻗어 자신의 입을 막은 것도.

그걸 떠올린 시온은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이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비는 더 달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주만 탓할 수는 없어요. 전부 제 본심이니까요. 그래서 저주 때문에 말이 헛나올 때마다 정말 곤란했어요. 어쨌든 본심이라 해명하기도 곤란하고, 또 이런 저주에 걸린 걸 다른 사람이 알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았거든요.”

이어진 고백에 시온은 이 저주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 밖에 낼 수 없는 본심이 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본심을 무자비하게 폭로하는 저주라니.

아무리 저주로 인한 것이라 한들 그 말이 본심인 이상 해명도 변호도 불가능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시온은 이비가 저주로 인한 말실수를 무마하려고 부단히 애썼던 것도 깨달았다.

연회장에서의 일은 술에 취했다는 말로 어떻게든 덮으려 했고, 숨겨야 할 본심을 꺼내고 나서는 온갖 방법으로 설명하고 변명했었다.

시온은 머릿속에 마구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차츰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간 시온이 보고 겪은 이비 아리아테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중간중간 멀쩡한 모습도 보여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이런 저주에 걸렸다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됐다.

결국 시온은 이비의 말을 납득했다. 동시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이걸 왜 나한테 밝히는 거지?’

이 저주의 존재는 이비 아리아테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용하기에 따라 가벼운 본심부터 은밀한 감정, 수치스러운 과거까지 모두 캐낼 수 있다.

이비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시온은 이비가 저주에 대해 밝히는 이유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내게 오해받지 않으려고 해명하는 건가. 아니면 상황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려는 건가.

시온 라우렐은 정말 시온 라우렐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이비의 다음 말에, 그의 뿌리 깊은 오만은 더 공고해졌다.


“탑에서 징계받게 되면 이 저주에 대한 것도 들킬 거예요.”

후자였나.

시온이 이비의 말에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정말 가당치도 않은 착각이었다.

이비는 시온 라우렐 따위가 무슨 오해를 하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자식에게 도움을 청할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그럼 증명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증명?

예상 밖의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시온이 영문을 묻듯 쳐다보자, 이비가 아이를 가르치듯 말했다.


“백작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제가 뭘 폭로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거고, 저는 그걸 증명하지도 못할 거라고요.”

이건 어제 아침에 시온이 한 말이다.


―혹시 날 협박할 생각이 남았다면 재고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억울하겠지만 당신이 본 걸 폭로해 봤자 비스든 티엔다든 믿지 않을 거고, 당신은 그걸 증명하지도 못할 겁니다.

이비가 그 말을 일깨워 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젠 다들 제 말을 믿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건 그런 저주니까.”

이비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래서 시온은 그 말의 의미를 다소 느리게 이해했다.

항상 날이 서 있던 백작의 오만한 얼굴이 조금 순진해졌다.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비는 아주 유쾌해졌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시온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모든 게 낯설었다.

여유롭게 웃는 이비 아리아테의 모습도,

갑자기 불쑥 찾아온 위기감도,

이런 처지에 놓인 자기 자신도.

그래서 시온이 바보처럼 굳어 있자, 이비가 혼란스러워하는 백작님을 위해 상냥하게 덧붙였다.


“맞아요, 이건 협박이에요.”

 

 

***

감시자들의 거점인 타르데스 전당은 비스 동쪽, 경계와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티엔다의 소식은 단 하루의 시차를 두고 매일 전해졌다.

타르데스의 따님께 협조를 받는 전령이 티엔다의 소식과 경계의 감시 보고를 양쪽으로 부지런히 전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계의 부사령관인 모렌 아르코 소백작은 탑에서 이비 아리아테의 징계가 열린다는 소식도 금방 전해 들었다.

‘비스 남동부 브릭 자작령에 체류하던 중 탑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로 노래하고 마냐냐의 가호를 빌려 탑의 규율을 어김.’

모렌은 이비 아리아테가 징계받는 이유를 읽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믐이었다. 저주로 마을에 독이 퍼져 정화했다지?

갸륵하긴 하다만 규율 위반은 규율 위반.

게다가 이렇게 한 곳만 구원해 주면 아주 곤란하다.

만약 되돌아오는 그믐에 다른 곳에서 비슷한 피해가 일어나면, 비스의 평민들은 당연히 이 일을 떠올리고 원망할 것이다. 왜 우리는 구해 주지 않느냐고 말이다.


‘평민 출신이라 그런지 시야가 좁네.’

어차피 성녀는 예쁘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모렌은 평민 출신 성녀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역시 안 되겠다 싶어졌고, 그래서 차라리 잘됐다고도 생각했다.

이 일로 이비 아리아테에게 성녀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하는 귀족이 늘어날 것이다.

그럼 우리 총사령관의 개 같은 선언도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라 여겨질 터.

모렌은 얻어걸린 상황에 흡족히 끄덕였다. 동시에 갈등했다.


‘이거 보고해야 하나?’

아직 경계에 계신 총사령관 각하께.

근데 그거 찾기도 쉽지 않은데.

하지만 보고 없이 넘어가면 왜 똑바로 안 하냐고 할 것 같고.

힘들게 찾아내서 보고해도 왜 이딴 걸 보고하냐는 듯 쳐다볼 것 같다.

모렌이 까다로운 상관 때문에 골머리를 썩일 때였다.


“각하께서 귀환하십니다!”

부하가 다급히 소식을 전했다. 놀라서 창밖을 보니, 정말 저 멀리서 따님과 복귀하는 총사령관이 보였다.

모렌은 헐레벌떡 전당의 입구로 달려 나갔다. 그러곤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총사령관에게 경례했다.


“티엔다로 간다.”

총사령관이 따님의 등에 올라탄 채 말했다.

혹시 그가 부상을 입었나 살피던 모렌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총사령관의 얼토당토않은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조각을 가져와.”

“조각 말입니까……?”

모렌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 얼빠진 소리에 총사령관의 눈빛이 사나워졌고, 모렌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꺼내 오겠습니다.”

 

.
.
.

마냐냐 탑과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발소리가 탑의 메인 홀을 가로질렀다.

그래서 탑의 시종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서른 명 가까운 감시자들이 돌연 탑으로 몰아닥쳤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맨 앞에 선 자는 시온 라우렐 백작이었다.

그들은 등장만으로 마냐냐 탑의 평화를 유린했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던 시종들은 이내 숨을 죽인 채 탄식했다.

라우렐 백작을 필두로 감시자들이 향한 곳은 이비 아리아테의 징계가 예정된 회장이었다.

회장의 문이 열리자 심판석에 앉은 귀족들이 놀라서 일어났다.

회장은 중앙이 텅 비어 있고 그 주변으로 단이 쌓여 있었다. 단 위에는 심판석이 놓여 거기 앉은 귀족들이 가운데 선 자를 내려보는 구조였다.

시온은 눈을 돌려 이비를 찾았다. 다행히 이비는 아직 심문대에 오르지 않고 저 끝에서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온이 이비를 보고 조용히 이를 악무는데, 높은 곳에서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백작?”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로히카 세드로였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타나시니 명백한 위협으로 느껴지는데요.”

근엄한 의장의 옷을 입고 가장 상석에 앉았지만, 탑주 로히카는 여전히 아찔하게 화려했다.

그 화사한 대귀족께 부사령관인 모렌이 말했다.


“이비 아리아테의 징계 중단을 요청합니다.”

“어머,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로히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 경쾌한 서슬에 모렌은 흠칫 물러났고, 그래서 시온이 다시 말했다.


“징계를 중단하십시오.”

“왜요?”

 

 
로히카가 턱을 괸 채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더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바꿨다.


“아니다, 어떻게라고 물어야지. 이건 탑 내부의 일이고 내 권한인데, 어떻게 백작이 중단을 말하는 걸까요? 이거 월권 아닌가요? 형한테 허락은 받았나요? 아니면 힘으로 억압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로히카는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어 댔다.

그래서 탑에 속한 귀족들은 이 정신 나간 탑주님이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귀족들이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두 대귀족의 대치를 바라보는데, 시온이 나직이 말했다.


“아마네세르의 조각을 양도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잔혹한 조롱으로 가득하던 로히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감시자 한 명이 벨벳으로 덮인 함을 들고 나왔다.

로히카는 열어 보라는 듯 검지를 까딱였고, 감시자는 곧장 함을 열어 그 안에 든 황금빛 조각을 내보였다.

마치 갑주의 일부처럼 생긴 그것은 백작이 경계에서 아마네세르를 격퇴할 때 떨어진 아마네세르의 비늘 조각이었다.


“어머,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죠…….”

그 귀중한 조각을 본 로히카의 눈이 곱게 휘었다.

다행히 로히카는 괜한 체면치레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탐욕스러운 로히카는 다시 손짓했다.

그에 탑의 귀족이 함을 받아 로히카에게 올리자, 로히카가 백작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백작, 뒷일은 충분히 생각했나요?”

로히카의 교교한 눈빛에 시온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를 악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어련히 잘하겠지만. 잘됐다, 이비. 이제 집에 가도 돼요. 백작님께 에스코트해 주실 거야.”

로히카가 일부러 짓궂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시종들이 이비를 시온에게 인도했다.

이비가 다가오자 시온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 하지만 이비는 못 본 척 고개를 숙인 채 딴청을 피웠다.

시온은 마지못해 이비를 데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모렌을 비롯한 감시자들은 총사령관의 살기를 피해 최대한 거리를 두며 그 뒤를 따랐다.

그로써 시온과 나란히 걷게 된 이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 잘 맞춰 오셨네요.”

시온의 눈빛이 더욱 살벌해졌지만, 이비는 이제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협박에 성공한 사람답게, 그저 앙증맞게 마주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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