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실 저주에 걸렸어요.
(23/129)
23화. 사실 저주에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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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사실 저주에 걸렸어요.
2022.08.18.
인간을 미워한 용은 온 세상에 저주를 퍼트렸다.
흩어진 저주는 그믐밤마다 재앙이 되어 인간을 찾아왔고, 저주에 사로잡힌 자의 말로는 세 가지였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미쳐서 닥치는 대로 산 것을 죽이거나, 아니면 그 저주와 뒤섞인 무언가가 되거나.
가장 최악은 마지막 것이었다.
저주와 뒤섞인 그 무언가가 탄생하는 것.
그리고 하필 지금이, 그 최악의 상황인 듯했다.
꺄아아아!
마치 어린아이 수십 명의 비명을 겹쳐 둔 것 같은 소리였다.
피를 식히는 울음소리에 선잠을 자던 사람들이 혼비백산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하얗고 역겨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죽이 군데군데 뜯겨 뼈와 혈관이 드러나 있었다. 거대한 머리뼈엔 빙주석 같은 이빨과 뿔이 가득했고, 바닥을 긁는 날개는 너덜너덜 찢겨 거미줄처럼 흉측했다.
마치 썩다 만 시체 같은 몰골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당혹스러울 만큼 컸다.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가 끝도 없이 높아지더니, 이내 우뚝 선 그것은 고성의 그림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했다.
“뭐야, 저게…….”
그 기괴한 모습에 이비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비스 출신인 이비도 저런 건 처음이었다.
일어난 용의 주검이 비틀대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일제히 흐느꼈다. 그것은 하필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극한의 공포 속에서 도망쳐야 할지 계속 숨어야 할지 치열하게 갈등했다.
소금으로는 이미 형체를 얻은 저주를 막을 수 없다. 저걸 상대하려면 바옌 공작의 군대가 와야 했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사람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렇게 한 사람이 달아나자 곧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도망치기 위해 문을 박찼다.
그로써 고요하던 거리는 어느새 밀려드는 사람과 비명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집사…….”
이비 역시 도망쳐야 할 것 같아 디에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원래라면 이비보다 먼저 움직였을 디에스가 미동도 하지 않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그때, 어기적대며 기어 오던 저주의 몸체가 돌연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더니 고목이 쓰러지듯 굉음을 내며 옆으로 넘어갔다.
꺄아아아악!
그것이 수백 개의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도망치던 사람들도 덩달아 절규했다.
“뭐, 뭐야?”
“백작일 겁니다.”
기겁하는 이비에게 디에스가 넌지시 말했다.
이비는 저주에 정신이 팔려 미처 못 들었지만, 디에스는 똑똑히 들었다.
아까 위층에서 울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그리고 바람인 척 이 위를 지나간 날갯짓 소리까지.
백작이라는 말에 이비는 놀라서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주가 신경질을 내듯 거대한 머리뼈를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또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저주가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자지러졌다.
“……어제, 어떤 부인이 그랬죠. 선생님이 와서 그믐밤 피해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그 선생님이 저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죠.”
디에스의 말에 이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정체를 아는데도 저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에게 이곳이 상당히 소중하다는 걸.
그렇게 메쳐지길 몇 번, 결국 저주의 썩은 몸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용이 다시 스러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무언가 깨닫고 도피를 멈췄다.
“저 백작님은 정말 쓸데없이 잘났네요. 성격을 포기한 대가일까요?”
긴장이 풀린 이비가 실없이 말했다.
용을 추락시키는 자에겐 죽은 용의 저주도 통하지 않았다.
왜 하필 저런 녀석과 엮인 걸까, 이비는 속으로 가볍게 푸념했다.
용의 형상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끝났구나,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꺄아아아아!
그것이 마지막으로 울부짖었다.
원한으로 가득한 단말마와 함께 그것이 마을을 향해 무언가를 토해 냈다.
하얗게 빛나는 안개가 마치 고대 문헌에 적힌 해일처럼 몰려왔다.
사람들은 위험을 직감했다. 하지만 감히 피하려는 시도조차 못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새하얀 안개가 마을을 덮치려는 찰나, 검은 하늘을 찢으며 낙뢰가 내리쳤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마을을 향해 뻗어 나가던 안개가 갈라졌다.
그것은 마치 종잇장처럼 찢기며 마을의 양옆으로 빗겨 나갔고,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수명이 몇 년쯤 깎여 나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마을을 둘러싼 안개에서 쓴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게 독이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
.
.
그믐밤에 일어나는 일은 그저 운이 나빠서 생기는 일이다.
그 외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대비해도, 정화의 소금을 가득 쥐고 있어도, 정체 모를 도움이 용의 망령을 막아 주더라도.
그럼에도 그믐에 서린 원한은 생명을 지독하게 꺼트린다.
그 악의는 거대하고 영원하며, 미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삭월이 지고 새벽이 밝았다.
다들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기뻐하는 대신 저주가 휩쓴 흔적을 그저 황망히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용이 토해 낸 안개가 마을의 동쪽과 서쪽 끝에 퍼졌다. 그것은 마치 솜처럼 뚜렷한 질량을 가진 채 거기 머물렀다.
안개에 깔린 호밀밭은 까맣게 썩고 있었다. 그러니 저 안개가 덮친 몇몇 집의 상황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저 호밀밭 너머엔 다른 마을이 있다.
용의 숨결이 밀려들던 속도를 생각하면, 그 마을에도 분명 안개가 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 이루어진 멸망에 더더욱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을로 돌아온 시온 역시 눈앞의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마을 일부를 집어삼킨 안개는 쓰고 독했다. 아마네세르의 독기에 익숙한 시온도 목이 아릿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안개에 파묻힌 어느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곤 여자 하나와 아이 둘을 끌고 나왔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듯 몸을 가누지 못했고, 피부 곳곳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 아이는 시온의 손길을 느낀 듯 힘겹게 눈을 떴다.
“선생님…….”
“다른 마을로 갈 거야. 그때까지 버텨.”
시온은 그들을 데리고 안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절규했다.
“움직이지 마!”
“독이 퍼지면 어쩌려고!”
그들의 외침이 시온의 심장을 얼게 했다.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일갈할 수 없었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연약한 것이 살아남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저들의 연약함이 비정함으로 이어지더라도 용납해야 한다. 그것은 저들의 불가피한 생존방식일 테니까.
시온이 걸음을 멈춘 사이 아이가 기침을 토했다.
아이는 빠르게 죽어 가고 있었다. 망령의 숨결조차 견디지 못하고, 너무나 연약하게.
시온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필요하다면 타르데스의 딸이라도 부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야에 뜻밖의 인물이 비쳤다.
이비 아리아테.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할 그 소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비는 어느새 안개 앞까지 걸어왔고, 시온은 이비가 더 다가오기 전에 경고했다.
“독입니다.”
“알아요.”
되돌아온 목소리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태평했다.
그래서 시온이 미간을 좁히자, 이비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들 내려 주세요.”
시온은 이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이비는 가볍게 채근했다.
“어서요.”
망설이던 시온은 안고 있던 이들을 마지못해 내려놓았다. 담담히 요구하는 이비의 얼굴이 너무 평온해서, 어쩐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비는 바닥에 누운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고 쓰게 웃었다.
너구나, 선생님이랑 결혼하겠다던.
결혼하려면 어른부터 되어야 하는데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이비는 속으로 핀잔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곤 담담히 노래를 시작했다.
마치 흥얼거리듯 소박한 콧노래였다.
이런 상황에 노래라니, 사람들은 얼이 빠져 이비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이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태로운 침묵 속에서 노래했다.
청아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고개를 떨어트렸다. 저 노래가 죽은 자를 위한 애도 같아 마음이 미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비는 애도 같은 걸 할 생각이 없었다.
이비가 노래하는데, 돌연 하늘이 밝아왔다.
사람들은 갑자기 해가 든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서 헛숨을 삼켰다.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티엔다가 창공으로 푸른 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이비의 긴 머리카락도 물빛으로 물들었다.
그 신비한 모습에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댔다. 물러나야 할지 무릎을 꿇어야 할지 알 수 없던 탓이었다.
주변이 어수선했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
그러자 이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마냐냐가 자신의 가호를 세상에 퍼부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안개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검게 타 버렸던 호밀밭도 차츰 푸른 빛을 되찾았다.
아이의 두 뺨 역시 다시 밝아지며, 위태로운 호흡이 잦아들었다.
예고도 없이 펼쳐진 기적에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낮췄다. 일부는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이고, 또 일부는 스스로 무릎을 꿇은 거였다.
아이가 눈을 떴다. 그러더니 이비를 향해 미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성녀님이야……?”
“아직 아니야.”
이비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빙긋 웃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고귀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시온 라우렐도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머리카락이 다시 검게 돌아온, 그럼에도 여전히 신비를 간직한 이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 오랫동안,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
마을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이었다.
그때 이비 아리아테는 예의 이층집에 있었다.
한때 사람들이 성녀님을 보겠다며 몰려오기도 했지만, 디에스가 접근을 막아 지금은 조용했다.
그래서 시온은 큰 방해 없이 이비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 애는요?”
“건강합니다. ……당신 덕분에.”
이비가 시온을 보자마자 물었다. 그래서 시온은 짧게 대답한 후, 고민 끝에 덧붙였다.
이비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자, 시온이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이 일은 곧 탑으로 알려질 겁니다.”
“아마 징계가 내리겠죠?”
탑의 허락도 없이 마냐냐의 가호를 빌린 이비 아리아테에게.
이비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아는 양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탑은 자신의 소유물을 철저히 관리한다. 마냐냐부터 정화된 물, 소금 결정, 그리고 정화자들의 노래까지.
그래서 정화자들에겐 엄격한 규율이 있고, 그 첫 번째가 이거였다.
탑의 허락 없이는 노래하지 말 것.
그런데 이비는 허락 없이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마냐냐의 가호까지 빌려 썼다.
둘 다 정화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도 남을 심각한 규율 위반이었다.
물론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이비 아리아테는 탑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로써 성녀가 될 길은 완전히 끊겼다고 봐야 한다.
라우렐의 분노를 산 와중에 탑의 규율마저 깨트렸으니 말이다.
이제 이비는 성녀가 되지 못한다.
분명 바라던 바인데, 시온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알면서 왜 나선 겁니까?”
“그래야 공평할 것 같아서요.”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시온이 미간을 좁히자, 이비가 난감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딱 한 번, 아무 대가 없이 구원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있어야 공평하겠다 싶었어요.”
이비의 설명은 담담하고도 이상했다.
그래서 시온은 기분이 더 복잡해졌다.
그토록 집착하던 성녀 자리를 내던지고 하는 말이 이런 거라니.
그는 이비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성술사를 통해 이미 모든 걸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본 이비는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바보 같은 남자가 모든 걸 바친 이비 아리아테는 대책 없이 경거망동했다.
실수가 잦고 자기 입으로 계산적이라고 떠들면서 정작 셈은 느렸다.
위태롭고 연약한데 고집은 세서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데 또 어느 때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계속 그를 헷갈리게 한다.
“탑으로 돌아가기 전에 백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온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이비가 말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저는 지금, 저주에 걸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