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믐밤
(22/129)
22화. 그믐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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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믐밤
2022.08.15.
“애한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문가에 선 시온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댔다.
그러자 이비 아리아테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눈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 불쌍한 표정에 시온은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은 방음이 잘 안 된다.
게다가 시온은 아까 저 꼬맹이가 문을 두드릴 때 이미 반쯤 깬 상태였다.
다만 잠에 취해서 외면하고 있었는데, 옆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이 확 깨 버렸다.
―언니 근데 정말 성녀님이에요?
―아직 아니에요. ……아까 그거 농담인 거 알지?
성녀 운운하는 소리에 시온은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곧장 옷을 챙겨입고 나왔는데, 그 후에 들린 소리 역시 점입가경이었다.
―아니, 나는 너희 선생님이 정말 싫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만약 받아 준다면 도망쳐야 해. 그건 짐승 이하의 변태야.
결국 시온은 기가 막혀서 한 소리 했고, 이비 아리아테는 또 비굴하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선생님!”
시온이 이비를 쏘아보는데, 아이가 카펫에서 일어나 달려왔다. 그래서 시온은 하는 수 없이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이거 줄게요.”
아이가 주머니를 뒤져 대뜸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 작은 손에 들린 건 조약돌만 한 결정이었다.
시온은 그게 뭔지 곧장 알아보고 재차 한숨을 뱉었다. 그러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야지. 엄마가 힘들게 구해 준 거잖아.”
“선생님은 이런 거 줄 엄마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 거 줄게요.”
“안 돼, 가져가.”
아이가 패륜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버티자, 시온은 그 고집스러운 아이의 양 뺨을 한 손으로 잡아 눌렀다.
그러곤 선생님답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서 문 잠그고 창문 가리고 내일 아침까지 꼼짝 말고 있어.”
“쳇.”
“쳇?”
“알았어요, 그럼 이번 그믐도 무사히 보내고 만나요.”
아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선생님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러곤 이비에게 눈인사하고 종종 가 버렸다.
우당탕 찾아온 아이는 그렇게 우당탕 돌아갔고, 아이가 떠난 자리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시온이 먼저 이비를 쳐다봤다. 아이와 이야기하느라 쪼그려 앉아 있던 이비는 그제야 무릎을 일으키며 말했다.
“백작님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저 애가 내민 거, 마냐냐의 소금이죠?”
이비의 말대로 아이가 가져온 건 마냐냐의 소금, 일전에 이비가 숨어 있던 소금 창고에 가득 있던 결정의 조각이었다.
“알면서 뭘 묻는지.”
친근히 다가온 이비와 달리 시온의 음성은 까칠했다.
그건 아직 남아 있는 잠기운 때문이기도 하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아이가 착해서요. 비스에서는 저 소금이 귀할 텐데.”
“귀합니다. 티엔다에선 적당히 쌓아 두니 잘 모르겠지만.”
마냐냐의 소금이라 불리는 저것은 정화자들이 바닷물을 정화해서 만든 것이다.
비스에서 저 소금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된다. 왜냐하면 노체의 저주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은 밤의 천적. 그래서 노체의 저주는 마냐냐의 가호가 담긴 소금에 몸을 사렸다.
티엔다에 저주가 얼씬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냐냐 탑은 저 소금 결정으로 뒤덮여 있고, 창고마다 결정이 그득 쌓여 있다.
그래서 티엔다에선 그믐을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비스는 아니었다.
비스에서는 달마다 찾아오는 재앙을 피하려고 돈을 있는 대로 바쳐 소금을 사거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새벽을 기다린다.
그럼에도 불행을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게요, 비스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비 아리아테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참으로 덧없고 무책임한 소리였다.
마냐냐의 소금이 비싼 이유는 마냐냐 탑과 몬트라 후작이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탑은 몬트라 후작에게만 소금을 유통하고, 몬트라 후작은 비스의 평민들이 자기 목숨값을 얼마나 낼 수 있는지 계산해 최대한 값을 올렸다.
모두 그 탐욕스러운 저울질의 결과인데 탑의 정화자인 이비 아리아테는 마치 남 얘기하듯 착한 목소리로만 중얼댄다.
물론 시온도 이비가 이 일에 무고함은 알고 있다.
다만 그는 저 이기적이고 비겁한 티엔다가 정말 싫어서, 거기 편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비 아리아테도 별로 곱게 봐 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계속해서 경솔하게 발언하는 이비 아리아테는 말이다.
“소금은 그렇다 치고, 본인이 성녀라고 소문을 낼 생각입니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어요.”
거짓말을 참 쉽게도 한다. 그래서 시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연히 없어야겠죠. 아직 성녀도 아니고 앞으로 성녀가 될 것도 아니니까.”
시온의 경고에 이비의 표정이 얼었다. 그래서 시온은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
이비 아리아테는 사사건건 저런 표정이다. 저렇게 상처받은 눈으로 쳐다보면 뭐든 해결된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시 날 협박할 생각이 남았다면 재고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협박이요……?”
이비 아리아테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 반응은 시온을 또 한 번 어이없게 만들었다.
어젯밤 이비는 일상의 소중함 운운하며 시온의 상황을 이용하려 들었다.
그래서 시온이 협박하는 거냐고 묻자 틀린 말은 아니라고 또 당당히 대답했다.
불과 어제, 아니.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이 와중에 이비가 애꿎은 애를 붙잡고 자신이 성녀라고 하니, 시온에겐 이게 얼토당토않은 수작으로 보였다.
그래서 당장 일어나서 경고하러 온 건데 정작 이비 아리아테는 또 놀란 토끼 눈.
“협박이 아니라 복수여도 마찬가집니다. 억울하겠지만 당신이 본 걸 폭로해 봤자 비스든 티엔다든 믿지 않을 거고, 당신은 그걸 증명하지도 못할 겁니다.”
시온의 이어진 말에 이비의 눈은 더 동그래졌다.
그래서 시온은 정말 편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얼굴로 거짓말하면 일부러 속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시온 역시 만감이 교차해, 빠르게 말을 맺었다.
“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다면 계산 먼저 충분히 하시죠. 유효하든 유효하지 않든 뒷감당도 해야 할 테니까.”
시온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그로써 혼자 남은 이비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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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내려온 이비는 어쩐지 멍한 얼굴이었다.
이비는 그런 얼굴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디에스는 이비가 언제 저런 상태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렸고, 곧 이비가 고개를 들었다.
“집사.”
이비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로 디에스를 불렀다.
그러더니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디에스를 얼싸 끌어안았다. 그러곤 포옹을 극구 거부하는 집사를 향해 눈을 별처럼 빛냈다.
디에스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디에스는 이비가 언제 이런 눈이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이비 아리아테가 잔머리를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굴린 직후에만 보여 주는 확신의 눈빛이었다.
***
점심이 지나자 마을은 본격적으로 어수선해졌다.
사내들은 혹시 마을 주변에 동물의 사체 따위가 없나 살펴보았다.
크게 우는 가축은 이미 전날 산으로 보낸 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텅 빈 헛간을 보고 이번엔 너무 죽지 말아야 할 텐데, 라며 혀를 찼다.
가장 걱정인 건 아기가 있는 집이었다. 부모들은 울음소리가 새 나가지 못하게 아기와 함께 지하로 들어갔고, 그 위를 두꺼운 카펫으로 덮었다.
창문은 판자로 가리고 굴뚝도 단단히 막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사람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모조리 현관 옆에 세워 두었다.
그렇게 재앙에 대비하는 오후, 마르소 부인의 이층집은 유독 더 소란스러웠다.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몰려 온 탓이었다.
“밖에 무슨 일입니까?”
시온이 마침 창문을 닫으러 올라온 마르소 부인에게 영문을 물었다.
“아, 그게, 1층 방에 있는 부부가 마을 사람들한테 마냐냐의 소금을 나눠 주고 있어요.”
이비 아리아테?
“집마다 한 줌씩 나눠 주는데, 세상에. 저게 다 어디서 난 건지…….”
마르소 부인의 말에 시온은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곤 사람들 사이에 선 이비 아리아테와 그의 집사를 발견했다.
시온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골치가 아파졌다.
그리고 마르소 부인도 걱정스레 혀를 찼다.
“어디서 가짜를 구해다가 저러는 거면 큰일인데…….”
그런 염려와 달리, 이비 아리아테의 소금은 진짜일 것이다.
그믐밤에 비스로 오게 됐으니, 안전을 위해 탑에서 소금을 가득 퍼 왔을 터.
그런데 그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다니, 시온은 저 모습이 명백한 도발로 보였다.
괜한 짓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이비 아리아테는 보란 듯이 저렇게 나왔다.
게다가 비스에 소금을 푸는 건 몬트라 후작의 고유 권한이다. 제아무리 마냐냐 탑의 이름 높은 정화자라 한들 저 행동은 분명 문제가 된다.
‘대체 뭘 어쩔 셈이지?’
시온은 이비 아리아테의 사고방식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비 아리아테가 바보라는 평가만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
.
.
결국 해가 졌다.
천천히 어둠이 내리고, 마을은 텅 빈 것처럼 고요해졌다.
칠흑이 하늘을 뒤덮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안에서 창밖을 훔쳐보던 사람들은 마치 뼈를 닮은 그 기괴한 형체에 입을 틀어막았다.
노체의 저주였다.
그것은 마치 얇은 커튼처럼 반투명하고 큰 짐승의 뼈 서너 개를 이어 붙인 듯 기괴한 형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수를 헤아렸다.
마을로 들어온 저주의 수는 셋. 그럼에도 사람들은 차마 적다고 여길 수 없었다.
저주는 땅을 딛는 것도 아닌 주제에 뼛조각들을 기괴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배회했다.
그러곤 구석구석 살아 있는 것을 찾아다녔다.
저주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어느 집 문틈으로 뼈끝을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돌연 흠칫 놀라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환호했다.
낮에 웬 처자가 나눠 준 소금이 진짜였다. 그래서 저주가 어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때 어느 집에서 으아앙 아이 우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스멀대던 저주들이 쏜살같이 움직여 일제히 그 집 앞에 섰다.
생명을 확신한 저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갉작대며 문틈을 긁어 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세 개의 저주 모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경련하더니 황급히 흩어졌다.
저주가 몰려들었던 그 문에서는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관에 놓인 마냐냐의 소금이 노체의 저주를 몰아내기 위해 저절로 타들어 가며 내는 연기였다.
이 마을에는 마냐냐의 가호가 가득했다.
죽은 용의 원한은 그 고결한 의지를 이겨 낼 수 없었다.
결국 먹잇감을 찾지 못한 저주들은 굶주림과 원한을 안고 조용히 사라졌다.
비명도 절규도 없이 저주가 물러나자, 바깥을 살피던 디에스가 말했다.
“이 일이 몬트라 후작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겠네요.”
“바라는 바예요.”
침대에 엎드려 있던 이비가 느긋하게 웃었다.
아까 아침, 시온 라우렐이 대뜸 쌀쌀맞게 뭐라 할 때는 이 자식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 보니 확신이 생겼다.
저 오만하고 뻔뻔한, 남의 인생을 꼬아 놓고 미안해하긴커녕 날 건들면 뒷감당 각오해라 으름장이나 놓는 이기적인 백작에게 모든 것을 돌려받을 확신이.
그래서 이비는 어서 이 밤이 지나 아침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믐밤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단지 배회하는 저주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평화로운 그믐이라고 생각했다.
새벽을 앞둔 가장 어두운 밤, 산을 흔드는 포악한 소리가 그 얄팍한 평화를 찢어발겼다.
꺄아아아!
그 천둥 같은 비명에 잠시 눈을 붙였던 사람들이 경악하며 일어났다.
그러곤 황급히 저주를 찾았다.
다행히 그것은 금방 발견되었다.
저 멀리서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산에 묶어 둔 가축을 기어이 찾아내 잡아먹은 저주가 부패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