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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그건 짐승 이하의 (21/129)


21화. 그건 짐승 이하의
2022.08.11.



“대귀족의 뺨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눈뜨자마자 대체 무슨 소릴…….”

이비가 침대에 누워 새로운 포부를 밝히자, 거울 앞에 서 있던 디에스가 흐린 눈으로 핀잔했다.

하늘이 말갛게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간밤에 잠깐 감상적이었던 이비는 이른 아침을 향해 기지개를 활짝 켰다.

그러곤 이미 옷을 갈아입고 소매 단추를 잠그던 중인 디에스에게 말했다.


“타협해야 한다면 정강이를 찰 수 있는 사람도 좋아요.”

“뺨도 정강이도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정신 차릴 필요가 있으니 가서 세수부터 하세요.”

디에스의 합리적인 타박에 이비는 순순히 세안실로 향했다. 그러곤 일부러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렇게 간밤의 것들을 씻어 낸 후, 이비가 디에스에게 젖은 머리를 맡긴 채 말했다.


 


“어제 백작이 먼저 정체를 밝혔어요. 별로 숨길 마음도 없던 것 같아요.”

숨겨도 소용없다고 생각한 건지, 숨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볼수록 듣던 거랑 다르지 않아요? 그 사람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백작의 소문을 떠올렸다.

사교계의 소문에 따르면, 시온 라우렐은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눈부신 금발, 그리고 텅 비어 생기가 하나도 없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비가 본 백작의 눈은 텅 비기는커녕 언제나 꽉꽉 들어차 있었다. 집요함과 거만함, 그리고 못돼처먹음 등으로 말이다.


“확실히 공허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죠.”

디에스도 비슷한 생각인지, 수건으로 이비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며 대답했다.


“하지만 공허해야 정상입니다. 역대 라우렐 백작은 대대로 그래 왔으니까요.”

“대귀족은 그런 것도 물려받는군요. 대단하다…….”

“물려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이비의 영혼 없는 감탄에 디에스가 부연했다.


“여기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타르데스의 가호를 받기 위해 마음을 비우도록 훈련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용을 추락시키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사리사욕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이미 생겼죠, 그 문제.”

용을 추락시키는 힘을 가진 사람이 콕 찍어 매장한 이비 아리아테가 여기 있다.

이비는 자기가 당한 일이 새삼 괴팍하다는 생각에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마네세르와의 전투로 인한 병이라는 겁니다.”

“병이요?”

“지나친 충격으로 정신이 망가진다고 보는 건데, 더 유력한 가설은 이쪽입니다.”

아마네세르. 티엔다만큼이나 거대한 미친 용.

이비는 그런 것과 싸우는 게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대신 며칠 전 타르데스의 따님들에게 둘러싸였던 일을 떠올렸다.

무서웠지…….

이비는 사람에게 우호적이지만 조금 심술 맞던 빨간 용들을 떠올리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따님 한 분이 덤벼들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 같은데, 아마네세르라니.


“어떤 감시자가 날아오르는 아마네세르를 보고 미쳐 버렸다는 일화도 있죠.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치열하게 싸우는 쪽도 당연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지금 백작은 아무리 봐도 공허한 녀석이 아니라 속이 배배 꼬인 녀석인데.

이비는 괜히 꿍해져서 백작의 이력을 되뇌었다.

시온 라우렐이 백작이 되어 경계로 내려간 건 7년 전.

그의 나이가 올해 스물네 살이라고 하니, 열일곱 살 소년일 때 그런 곳에 보내진 셈이다.

그때부터 아마네세르라는 대재앙과 싸웠다고 생각하면, 성격이 그 모양으로 빠그라진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이비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비의 머리를 충분히 말린 디에스는 수건 대신 빗을 들며 마저 말했다.


“어쨌든 시온 라우렐이 역대 백작들과 다른 건 사실입니다. 이번에 드러난 성격도 그렇고, 아마네세르를 격퇴하는 속도도 그렇고.”

“속도라뇨?”

“원래 아마네세르와의 교전은 며칠씩 이어집니다. 백작도 처음엔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는데, 갈수록 시간을 줄이더니 이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마네세르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경계에서는 이걸 안정적인 감시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례적인 일로 봐야 하죠.”

잘났다면 잘난 거고, 위험하다면 위험한 거고.

어쨌든 뭔가 다르다.

혹시 이 차이가 백작이 말한 ‘빚’과 연관이 있는 걸까?

이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백작이 어제 알려 줬어요. 자기가 빚진 사람이 내가 아는 점성술사 아저씨라고.”

디에스의 빗질이 잠시 멈췄다 도로 움직였다.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그도 이 집에서 백작을 보자마자 비슷한 추측을 한 모양이었다.


“그럼 신뢰해도 되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집사의 물음에 이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책을 읽듯 말했다.


“몬트라 후작은 이비를 좋아하죠. 하지만 라우렐 백작과 얽힌 이비는 싫어해요.”

이건 당연한 계산의 결과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

달콤한 사탕과 개미가 꼬인 사탕의 가치가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점성술사에게 빚을 져서 이비를 돌봐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백작은 어떨까요? 탑주와 얽혀 있는 이비도 똑같이 돌봐줄까요?”

어제 백작은 점성술사를 언급하며 이비에게 다시 계산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비는 계산이 필요한 쪽은 오히려 백작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권력자이시니 평민 소녀 하나쯤이야 어떤 식으로든 구원할 수 있다고 장담하겠지.

하지만 그 평민 소녀가 탑주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기꺼이 날 구원하겠다고 나설까?


“판단이 쉽지 않네요.”

“이걸 백작에게 상의하는 건?”

“위험합니다.”

디에스의 단호한 대답에 이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탑주 로히카 세드로는 라우렐과 대등한 대귀족이다.

그들은 용의 가호로 세상을 지탱하고 있기에 다른 대귀족보다 월등하고, 또 그러기에 서로의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그러니 백작이 빚을 갚기 위해 그 금기까지 어길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백작에게 이걸 털어놓고 계산을 맡길 수도 없다.

마냐냐 탑의 지하에 대한 걸 외부로 발설했다간 성녀고 나발이고 탑주에게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큰 저울이 있으면 좋겠어요.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하나씩 다 달아 보게요.”

“마침 탑이 있으니 접시 두 개만 구하면 되겠네요.”

이비의 덧없는 푸념에 디에스도 재미없는 농을 던졌다. 그래서 이비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여기 더 머물러야겠어요.”

저주를 풀기 위해 조력자를 만나려면 오늘 오전에 움직여야 하지만, 이비는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저주를 푸는 것보다 급한 게 시온 라우렐이라는 걸림돌을 치우는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비는 어젯밤 뺨을 때려 주고 싶었던 상대와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이 역시 비굴한 결정이지만, 이비는 가볍게 받아들였다.

세상도 기적에 의존해 억지로 돌아가는데 이비 아리아테의 어렵지 못한 삶에 품위라니, 명백한 사치다.

그래서 이비는 다시 발버둥 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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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스는 기다리던 마차를 도시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편으로 조력자에게 편지도 보냈다.

디에스가 나갔다 오는 바람에 아침 식사는 조금 늦어졌다.

그럼에도 백작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마르소 부인은 선생이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 매번 아침을 거른다며 불평했다.

백작이 내려오지 않아서 이비는 귀마개를 넣어 두었다. 디에스가 옆에 있어서 마르소 부인의 소소한 물음은 곧잘 넘길 수 있었다.

그로써 아침 식사 후 차를 마실 때까지의 시간은 무난히 흘러갔다.

그믐을 앞두고 누릴 수 있는 마지노선 같은 평화였다.


“그런데 어쩌려고 그믐날 다니는 거니, 큰일 나려고.”

마르소 부인이 문득 걱정했다.

그래서 이비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어린 시절엔 이비도 그믐밤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티엔다에서 지내며 그믐에 대한 걸 완전히 잊어버렸다.

티엔다에는 노체의 저주가 얼씬대지 못해 그믐도 위험하지 않은 탓이었다.

비스와 티엔다가 이토록 다른 걸 새삼 느낄 때였다.

딸랑대는 종소리와 함께 한 여자애가 집으로 달려들어 왔다.


“어?”

열 살 남짓한 그 애는 여기가 마치 제집인 양 들어 오더니, 마르소 부인과 둘러앉은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비를 빤히 보다 대뜸 물었다.


“언니는 누구예요?”

“언니는 성녀님이 될 이비 아리아테예요.”

“이건 농담이야.”

“맞아요, 농담이에요.”

진담을 농담으로 포장하기 위해 이비는 호호 웃고 디에스는 하하 웃었다.

하지만 아이는 웃지 않고 그들을 노골적으로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오늘은 수업 없잖니.”

마르소 부인의 물음에 아이가 경계를 풀며 대답했다.


“선생님한테 줄 거 있어요.”

“선생님 아직 주무시는데, 할미가 전해 줄까?”

“아뇨, 내가 직접 줄래요.”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래야지.”

부인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아이는 통통 뛰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도로 통통 내려와 불평했다.


“선생님 문 잠그고 자요!”

“너희가 맨날 쳐들어가니까 그렇지.”

“그럼 작은 방에서 기다릴래요.”

“엄마가 오늘 집에만 있으라고 안 했어?”

“점심때까진 괜찮아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자 마르소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저 애가 선생님을 유독 잘 따라. 그러고 보니 옛날 이비 같네.”

이비는 가슴이 괜히 따끔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다가 계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도 위에 올라가 봐도 돼요?”

“응, 괜찮지. 어차피 애들도 들락대니까.”

백작 놈이 2층을 다 빌렸다고 해서 못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비는 허락이 떨어진 김에 곧장 2층으로 향했다.

그러곤 여전히 복도를 둘러보다가, 문이 반쯤 열린 방에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공교롭게도 방은 옛날에 이비가 쓰던 방이었다.


“어.”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이비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또 대뜸 물었다.


“언니 근데 정말 성녀님이에요?”

“아직 아니에요. ……아까 그거 농담인 거 알지?”

이비는 애써 웃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바닥 카펫에 엎드려 공책에다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지금 뭐 해요?”

“숙제요.”

“선생님이 내준 거예요?”

“네.”

“선생님이 잘해 줘요?”

“그건 왜 물어봐요?”

“응, 그냥 너한테 말 걸고 싶어서.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아.”

별안간 이상한 말이 튀어나와 이비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급히 해명하려는데, 그 아이가 돌연 흡족하게 끄덕였다.


“진심이군요. 언니, 되게 솔직하네요.”

뜻밖의 말에 이비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무례하다가 아니라 솔직하다니. 이비는 이 말 한마디가 왠지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멍하니 있는데, 아이가 발을 동동거리며 재잘댔다.


“선생님한테 관심 있는 언니들이 다 그렇게 물어보거든요. 언니도 우리 선생님 좋아해요?”

“아니, 나는 너희 선생님이 정말 싫어.”

아, 또 너무 솔직하게 말해 버렸다.

하지만 아이는 이번에도 태연히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진심을 느꼈어요. 맞아요, 우리 선생님은 성격이 나빠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요. 언니가 솔직히 말했으니까 나도 말해 줄게요. 선생님과 나는 결혼할 사이예요.”

“음……. 그래……?”

“근데 선생님은 아직 몰라요.”

다행이다. 하마터면 인간을 혐오할 뻔했어.

이비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선생님이 제 청혼을 받아 줄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만약 받아 준다면 도망쳐야 해. 그건 짐승 이하의 변태야.”

아무 말이 막 나오는데도 마음이 편했다. 저주에 걸린 이후 느껴 본 적 없는 해방감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속이 후련할까?

이비는 왠지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동은 길지 않았다.


“애한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등 뒤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잠시 트였던 이비의 숨통을 도로 콱 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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