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비는 여전히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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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비는 여전히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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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비는 여전히 어렵지 않다
2022.08.08.
이비 아리아테는 눈으로 보던 것만큼 작았다.
옷자락을 겨우 한 줌 그러쥐는 손도, 시온의 등 중간쯤에 겨우 닿는 이마의 높이도.
그래서 시온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비를 완벽하게 가려 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보야, 치마는 어쩔 건데.’
시온은 이렇게 타박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이비의 긴 잠옷 치마가 시온의 다리 사이로 보였다. 이건 시온이 어떻게 한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이 허술함에 시온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아무렴 남편이 있다고 했으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한들, 그냥 우연히 부엌에서 마주쳤다고 둘러대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렇게 숨었다가 들키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일 텐데, 시온은 이비 아리아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비에겐 시온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하나는 마르소 부인이 이비와 시온을 보면 ‘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라고 물어볼 확률이 대단히 높고, 이 질문으로 이비의 저주가 이비를 곤경에 빠트릴 확률 역시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이비는 마르소 부인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자신이 ‘백작님과 대화 중이었어요!’, ‘이분이 바로 라우렐 백작님이세요!’, ‘대귀족이시죠!’라고 말해서 백작에게 살해당하는 상상을 했고, 이런 상황을 피해 시온의 등 뒤로 숨는 편을 택했다.
“아, 난 누군가 했네. 혼자 있었어요?”
수면 모자를 쓰고 나온 마르소 부인이 시온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지 뭐야. 옆방에서 나는 소리였나 봐요. 내가 방음이 안 된다는 얘길 깜빡했네.”
마르소 부인이 부산스럽게 말하며 혀를 찼다.
다행히 부인은 시온의 다리 밑으로 보이는 치맛자락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둠과 노안 덕분이었다.
마르소 부인은 우연히 마주친 시온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참, 괜찮으면 내일 아침은 내려와서 같이 먹어요. 그 부부랑 인사도 하고.”
부인이 시온에게 이비와 디에스를 소개해 줄 요량으로 말했다.
그에 시온은 좋다 싫다 대답하는 대신 낮게 중얼댔다.
“그 사람들 가짜 부부 같던데.”
“응?”
알 수 없는 소리에 부인이 고개를 갸웃댔다.
그리고 시온의 뒤에선 이비가 그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옷이 당겨지는 느낌과 등이 긁히는 감촉에 시온은 아닌 척 말을 돌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려가겠습니다.”
시온의 뒤늦은 대답에 부인이 미심쩍게 끄덕였다. 그러곤 정말 별나다고 중얼대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시온이 자신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만 나오시죠.”
그와 함께, 이비는 숨어 있던 모습 그대로 두 손을 가지런히 맞잡은 채 시온의 등에서 물러났다.
이비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고, 시온은 그런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다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처럼 하면 됩니다. 티엔다에서도.”
딴 곳을 보던 이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듯 곤란하게 웃었다.
그건 매달리고 숨고 조르라는 말.
그러면 지금처럼 뜻대로 움직여 주겠다는, 참 자비롭고도 오만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웃었다. 그리고 시온은 이비가 웃는 이유를 모른 채 물었다.
“성녀 자리만 단념하면 되는데, 계산이 더 필요합니까?”
“필요해요.”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라더니.”
냉큼 대답하는 이비에게 시온이 혀를 차듯 말했다.
그런 것치곤 계산에 너무 서툰 거 아니냐, 이런 의미의 힐난이었다.
여전히 말투는 냉랭하고 표정도 차가웠지만, 이비는 이 남자가 자신을 등 뒤에 숨겨 줬던 것을 기억하며 말을 이었다.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라서 셈이 맞아야 하거든요. 아까, 제가 이용당할 뿐이라고 하셨죠?”
“사실이니까.”
“맞아요. 사실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이용당하지 않나요? 서로 이용하고, 필요로 하고, 그러다 각자의 가치에 맞는 자격을 얻고. 저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재잘대는 이비의 태도는 아까와 사뭇 달랐다.
그저 몸을 낮추고 백작의 눈치를 살피던 이전보다 밝았다.
어쩌면 건방지게 여길 수도 있는 태도지만, 시온은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지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래서 백작님의 제안은 계산에 안 맞아요. 제게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격이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작정 제 앞길을 막은 백작님을 믿기도 어려워요.”
앞길을 막았다는 표현 역시 지나치게 도발적이지만, 시온은 이마저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 허용에 힘입어 당당히 말을 맺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요. 늘 이용당했지만, 이용당하면서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알아서 잘하니까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저주가 말실수를 유발했지만 이비는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이쯤 기어올라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예상대로 시온은 팔짱을 낀 채 이비를 쳐다볼 뿐 그 말버릇을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문제 삼지만 않을 뿐, 그의 완고함은 여전했다.
“거절합니다.”
“이건 강압이에요.”
“인정합니다.”
“인정만 하면 다예요?”
“유감입니다.”
“아니……!”
이비가 울컥 따지려 들자 시온이 손으로 이비의 입을 막았다.
“또 숨고 싶지 않으면 목소리 낮추시죠.”
시온의 큰 손이 이비의 입뿐만 아니라 얼굴 절반을 전부 덮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에게 볼을 붙잡혔던 굴욕을 떠올렸다.
물까?
물어도 봐줄 것 같긴 하다.
아니, 근데 이런 것만 봐주면 뭐 하냐고!
이비가 입이 막힌 채 시온을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시온도 이비를 쳐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눈치는 이제 다 봤는지 이비 아리아테가 할 말을 다 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할 말과 못 할 말을 썩 잘 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눈치를 보며 피곤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집어치운 것 같았다.
시온도 이쪽이 편했다.
하지만 알아서 잘하니 관여하지 말라는 말은 불쾌했다.
굳이 기분까지 상할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그러면서도 이비 아리아테가 한 말은 대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계산이 안 맞는다는 토로도, 믿기 어렵다는 하소연도, 그동안 잘해 왔다는 공치사도. 그중 틀린 것은 없었다.
그래서 시온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원래는 하지 않으려고 한 말을 꺼냈다.
“이 집에 살던 사람입니다.”
“음?”
이비가 입이 막힌 채 의문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내심 웃겼지만, 시온은 무표정을 고수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당신을 맡겼습니다. 당신과 함께 지냈던, 그 점성술사가.”
시온의 실토에, 이비의 두 눈이 한없이 커졌다.
그래서 시온은 그만 이비 아리아테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얼어붙은 이비에게 끝으로 고했다.
“그럼 다시 계산해 보길 바랍니다. 셈이 맞는지 안 맞는지.”
.
.
.
백작의 발소리를 듣고 나간 이비가 방에 돌아온 건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런데 백작이 2층으로 되돌아가는 소리는 그보다 한참 전에 울렸다.
아무래도 이비는 혼자 밖에서 바람을 쐬다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온 이비는 말없이 침대에 누웠고, 그 모습을 본 디에스가 걱정스레 속삭였다.
“심각한 척하면서 침대를 차지할 생각입니까?”
“맞아요. 이대로 잠들어 버리겠어요.”
본심을 들킨 이비가 베개로 디에스를 내리쳤다. 그리고 집사는 이 적반하장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다.
그렇게 한바탕하고 난 후, 이비는 씩씩대며 디에스를 노려보았다.
“피곤하니까 내일 얘기해요.”
이비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곤 백작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그 사람이 내게 당신을 맡겼습니다. 당신과 함께 지냈던, 그 점성술사가.
솔직히 말하면 짐작하고 있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시온 라우렐을 본 그 순간부터.
라우렐 백작이 비스의 수많은 마을 중 우연히 이 마을을 택해 하필이면 이비 아리아테가 살던 집에서 살게 될 확률은?
그건 아마 달걀에서 용이 나올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하는 게 맞다.
백작은 이 집이 이비와 점성술사가 살던 집인 걸 알고 찾아왔다.
그래서 이비가 이 마을에 나타난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해서 돌아온 거라고 짐작했다.
이로써 큰 의문 하나가 해결됐지만, 이비에겐 오히려 더 많은 혼란이 찾아왔다.
아저씨는 대체 백작에게 무슨 빚을 남긴 걸까.
백작을 만난 건 언제일까, 날 떠난 후였을까?
왜 나를 부탁한 걸까.
당신이 내 옆에 있지 않고.
이비는 백작의 방을 쫓아가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대신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뒤뜰에서 한참이나 찬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믐을 앞두고 손톱 모양으로 남은 날카로운 달이 가슴 언저리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약해진 틈을 타, 백작이 무심하게 던진 말들도 덩달아 이비를 흔들어 댔다.
귀족들이 원하는 건 네 능력뿐이야.
가치가 다하면 쉽게 버릴 거야.
성녀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
도리어 이용만 당할 뿐이야.
그런 게 정말, 네가 말한 어려운 사람?
이비는 이걸 부인할 수 없어 인정했다. 그리고 오히려 당당히 말했다.
서로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럼에도 잘해 왔다고.
하지만 사실 이비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비의 꼭 감은 눈앞에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이비 아리아테는 인형처럼 예쁘게 꾸미고 앉아 있었다.
겉모습은 어지간한 귀족 영애 못지않게 화사한데, 정작 그 속은 비스에 있을 때보다 더 너절했다.
잠이라도 한숨 편하게 잔 적이 없었다.
교양을 쌓기 위해 밤잠을 줄이며 책을 읽었다. 춤과 악기를 익혔다. 예쁘게 웃는 법도 연습했고, 드레스에 몸을 맞추려고 현기증을 참으며 굶었다.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매일매일 쪽지를 통해 엿듣기.
하지만 아는 게 그렇게 많아도 마음껏 말한 적은 없다.
생각이 있어도 없는 척, 할 말이 있어도 없는 척, 결국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티엔다가 허락한 관상용 평민의 삶은 노래해서 기적을 일으켜도, 물을 정화해 세상을 구해도 결국 거기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마저도 어느 대귀족의 선언에 와르르 무너져 또 전전긍긍.
티엔다에 오면 어려운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사실 이비는 그 어느 때보다 비굴했다. 그리고 절박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곱씹던 이비는 뒤늦게 후회했다.
아, 백작이 ‘지금처럼 하면 된다’고 지껄일 때 왜 그 뺨을 때리지 못했을까.
이 몸이 친히 간택했으니 귀엽게 매달리고 숨고 조르기만 하면 된다던 그 남자를 왜 곱게 돌려보냈을까.
그런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자존심도 없는 척 결국 그 사람이 어디까지 봐주는지 눈치를 보며 대들었다. 그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비는 여전히 어렵지 않으니까.
말로만 어려운 사람이 되겠다고 떠들 뿐, 여전히 마냥 쉬우니까.
그걸 새삼 뼈아프게 느낀 이비는 한숨 쉬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뒤척였다.
그날은 그믐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