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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시온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19/129)


19화. 시온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2022.08.04.



 


“집사를 남편으로 만들어서 방을 빌릴 정도면 이미 결론이 난 걸 텐데.”

백작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단조로웠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오만도 여전했다.

그래서 이비는 저 백작에게 새삼 질려 버렸다.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다니.

이비는 정말 귀엽지 않은 놈이라 생각하며 곱게 웃었다.


“백작님께서 신분을 숨기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걸 알면서 굳이 이 집에 들어왔군요.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으로.”

하지만 이비의 상냥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대답은 빈정댐과 추궁에 가까웠다.


“계산은 다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다면.”

백작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안경을 쓰면 사람이 좀 수더분해 보이는 법인데, 저 백작은 무딘 안경을 콧대에 걸친 와중에도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미소를 유지한 채 몰래 이를 악물었다.

디에스의 말이 맞았다.

디에스는 백작에게 선을 지키며 접근하라고 했다.

지금 상황은 백작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 그 심기를 거스르면 우리 쪽 손해라면서.

지금 백작의 태도를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이 상황은 백작에게 약점도 위협도 아니었다.

하긴 대귀족이 남몰래 시골 마을에서 지낸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직무 유기, 전선 이탈?

그것도 추궁할 윗사람이 있어야 죄가 되는 법이다.


“약점이라니 당치 않으세요. 백작님께 약점이 될 만한 게 어디 있겠어요. 만에 하나 있다 해도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거 알아요.”

그래서 이비는 가슴께의 숄을 여미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저도 설마 이런 곳에서 백작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혹시 제가 백작님을 미행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해세요.”

“안심하십시오. 당신을 그 정도로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제게 백작님을 미행할 능력 같은 건 없어요. 낮에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죠. 그리고 제게는 백작님께 이해를 구할 기회이기도 했고요.”

백작의 매몰찬 태도에도 이비는 참으로 갸륵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백작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투였다.

참 한결같은 버르장머리지만, 이비는 꾹 참으며 말을 계속했다.


“낮에 봤어요. 백작님께서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요.”

애들이 공 좀 달라니까 그걸 냅다 던져 버렸지, 나쁜 자식.


“잠깐이지만 참 좋아 보였어요. 이게 백작님의 소중한 일상이구나, 감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 직무 유기, 전선 이탈. 이딴 건 백작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든 권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 마을에선 어떨까?

당신이 여기 정착한 게 2년 전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고 했다.

게다가 성격 나쁘기로 유명하더라.

원한다면 황제처럼 살 수 있는 당신이 왜 이런 너절한 생활을 택했을까?

이비는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추론했다.

티엔다에도 가끔 있다. 귀족 생활에 회의감과 환멸을 느끼는 괴짜들이.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이런 삶은 무의미하다며 앙탈을 부리는 별종들이 말이다.

이비는 시온 라우렐 역시 명백하게 그쪽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걸로 협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안정적인 일상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죠. 그런데 저는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고 있어요. 백작님께서 티엔다를 떠나신 이후로요.”

더 정확히는, 네 놈이 무자비한 선언을 냅다 던지고 가 버린 이후로.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지만, 이비는 선을 지키라는 디에스의 말을 곱씹으며 읍소했다.


“그래서 백작님께 선처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제게 일상을 돌려줄 분은 오직 백작님뿐이세요. 그리고 백작님께서는, 일상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이비는 말을 맺으며 백작을 조심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눈을 의심했다.

백작이 답지 않게 웃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꽤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입가에만 담긴 그 웃음은 이름 붙이자면 냉소, 정체를 헤아리자면 가소로움이었다.


“일상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백작이 그렇게 웃는 낯으로 이비의 마지막 말을 따라 했다.


“선언을 철회하지 않으면 너의 일상도 망쳐 놓겠다. 이런 협박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이비는 저주 때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리 완곡히 말해 본들 의미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저 만만치 않은 백작이 호락호락 넘어갈 리도 없으니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나았다.

백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비는 조금 무서웠지만, 그만큼 오기도 생겼다.

네 놈이 한 짓에 비하면 요 정도 협박은 애교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다.

동시에 구구절절 설득하고 싶었다.

2년이나 여기서 지냈다면서, 아이들까지 가르친다며. 그럼 너한테도 나름 중요한 장소일 거 아니야. 적당히 타협해 줘!

이비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백작을 바라볼 때였다.

백작이 웃음을 지우며 되물었다.


“아직 성녀 자리를 포기 못 한 겁니까?”

“네.”

“이미 포기하고 여행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백작은 뜻밖이라는 듯 중얼댔고, 이비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서 어리둥절하게 생각하다가, 뒤늦게 이해하고 눈을 치켜떴다.

백작은 이비가 성녀 자리를 이미 포기한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찾아온 것도 일종의 피난으로 짐작한 거다.

그런데 이비가 일상 운운하며 선언 철회를 요구하니, 아직 발버둥 치는 걸 알고 가소로워하며 웃은 것이다.

백작의 태도에 이비는 경악했다.

하도 당당하셔서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그는 자신의 선언으로 이비가 얼마나 곤란했을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가 성녀 자리를 진즉에 포기했을 거라고 짐작까지 하고 있었다.


“성녀 자리를 포기한 게 아니면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시간이 남아서 잠깐 들른 거예요.”

대꾸하고 싶지 않은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서 이비는 본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마지못해 둘러댔다.


“……원래는 백작님을 뵈러 경계에 가는 길이었어요. 백작님께 선처를 구하려고.”

“헛수고할 뻔했군요.”

“어느 쪽의 헛수고인가요?”

이비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백작님을 못 만나는 쪽의 헛수고인가요, 아니면 선처를 못 받는 쪽의 헛수고인가요?”

“양쪽 다겠죠. 오늘 밤은 후자의 의미로 이미 헛수고를 했고.”

백작의 돼먹지 못한 대답에 이비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걸했는데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통하기는커녕 단칼에 잘려 나갔다.

그래서 이비는 점점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잘못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저주 때문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이놈은 이비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수상쩍은 사정으로 이비를 휘둘러 댈 뿐이다.

이런 완고한 미친놈의 횡포로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싶어, 이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안 그러면 욕을 하거나 백작을 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비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티엔다 사교계는 태도가 가볍고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도 적당한 계기만 있으면 곧 잊을 겁니다.”

돌연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어쩐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구구절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은 당신이 말한 안정적인 일상과 거리가 멉니다. 귀족들이 원하는 건 당신의 능력뿐이고 그 가치가 다하면 티엔다는 당신을 쉽게 버릴 겁니다.”

이게 갑자기 뭐라는 거야.

백작의 뜬금없는 말에 이비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빡였다.


“성녀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기반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해 봤자 도리어 이용만 당할 뿐, 그게 당신이 말하고 바라던 어려운 사람의 모습은 아닐 겁니다.”

듣다 보니 좀 아프다.

이비는 슬쩍 고개를 들어 백작을 쳐다보았다.

백작은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놈의 만행을 잠깐 잊을 수 있다면, 걱정하는 표정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가 혼란 가득한 얼굴로 백작을 쳐다보자, 백작이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틀린 건 없어요.”

“그런데 왜 억울한 얼굴이죠?”

“다 너 때문이잖아요!”

이비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백작은 이비의 진심 어린 토로에 진지하게 되물었다.


“뭐가 나 때문이라는…….”

“그만 물어봐요!”

당황한 이비는 일전에 그런 것처럼 백작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처럼 그를 쓰러트릴 수 없었다.

두 번은 안 당한다는 듯, 백작이 이비의 양 손목을 단숨에 낚아챘기 때문이다.

결국 이비는 백작에게 붙들려 그 상태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비는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두어 번 팔을 당겨 보았다. 하지만 백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분한 눈으로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온은 혹시 이러다 정말 울리는 게 아닐까 내심 걱정했다.

아까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기에 우는 건가 싶어 짐짓 당황했었다.

시온은 이비를 보면서 적어도 울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번쯤 울려 보고도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린애처럼 약하고 딱히 영리하지도 못한, 그런 주제에 고집만 센 이비 아리아테.

시온은 여전히 고민이었다. 그 바보가 애지중지하던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또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시온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 아래 보이는 새하얀 잠옷에 한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걸 느꼈는지, 이비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팔 놔주세요.”

한계까지 온 목소리였다.

그래서 시온은 정말 울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놔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 누구예요?”

마르소 부인의 목소리였다.

아까 이비가 벌컥 소리치는 바람에 마르소 부인이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부인의 방은 부엌 바로 앞이어서 시온은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비의 팔목을 놓고 물러났다.

그러곤 적당한 변명을 생각하는데, 또 한 번 뜻밖의 상황이 이어졌다.

기껏 놔준 이비 아리아테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시온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그를 뒤집어 그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비의 이마가 등에 닿자 시온이 이비를 떼어 내려고 등 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비는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버텼다.

그사이 마르소 부인이 부엌에 도달했고, 이비는 다시 시온의 견갑골 사이에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새끼 고양이가 품으로 파고드는 듯한 감각에 시온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차마 힘으로 뿌리칠 수는 없어 결국 이비의 의도대로 등을 펴고 섰다.

그로써 이비의 자그마한 몸은 시온에게 완전히 가려졌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이비가 시온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시온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가까스로 힘을 풀었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등으로 소동물 특유의 포근한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비 아리아테가 마르소 부인의 눈을 피해, 자신의 등 뒤에 숨기로 작정한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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