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나도 안 괜찮아!
(1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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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하나도 안 괜찮아!
2022.07.14.
아직 여명이 들지 않은 어둑한 새벽, 시온은 보좌관들과 라우렐 성을 나서고 있었다.
티엔다에서의 용무를 마쳤으니 그만 비스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시온은 어제 이비 아리아테의 성녀 발탁에 반대하는 뜻을 귀족계에 밝혔다.
노골적인 어휘를 사용했으니 분명 소란스러워질 거다.
그리고 화살은 자연히 이비 아리아테에게 향하겠지.
그 애가 꽤 곤란해지겠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날 보험으로 쓰겠다는 둥,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라는 둥,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는 그 당돌한 성격이면 딱히 걱정할 필요 없을 테니까.
시온이 이비에 대한 단상을 정리할 때였다.
“시온!”
단조로운 말굽 소리를 뚫고 시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뻔했다. 이 성에서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 이복형인 라우렐 대공뿐이었다.
말을 타고 나타난 대공은 침실에서 막 나온 듯 실내복 차림이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호위대도 보좌단도 없이 시종 하나만 다급히 따르고 있었다.
대공이 그런 차림으로 달려 나오자, 시온의 보좌관들은 곧장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래서 시온도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춰 세웠다.
“다시 비스로 가는 거야?”
시온을 따라잡은 대공이 물었다.
예민하고 고압적인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토록 지극하게 구는 형에게도 시온은 고개만 끄덕일 뿐,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대공이 서운한 듯 되물었다.
“또 언제 돌아와?”
돌아오다니. 시온에게 이건 틀린 표현이었다.
그에게 티엔다나 라우렐 성은 돌아올 곳이 아니다.
단지 필요에 따라 마지못해 와야 했던 장소일 뿐.
가능하면 발을 더 대고 싶지 않지만, 조만간 다시 오기는 와야 했다.
그래서 시온은 대공에게 간략히 대답했다.
“성녀 발탁식 때.”
그때, 시온은 성녀가 되지 못한 이비 아리아테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
―바옌 공작이 대노함. 라우렐 백작의 선언은 신과 티엔다비스에 대한 반역이라며 격분.
―몬트라 후작이 귀족들과 회담함. 모두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겠다고 입장 표명.
―투하 가로 항의 빗발침. 성녀가 나서는 것을 가문 차원에서 고려 중.
―탑에 직접 항의하는 자들도 있지만 탑주는 여전히 침묵.
―라우렐 대공은 동생의 결정을 사실상 묵인.
이비는 대귀족들과 성녀의 현재 상황이 담긴 쪽지를 눈으로 훑었다.
그러곤 그 옆에 놓인 귀족들의 여론도 마저 살펴보았다.
―어떻게 평화를 저당잡나, 이 또한 다른 대귀족에 대한 모욕이다, 라며 라우렐 백작을 비판하는 목소리 일부.
―백작의 기분을 헤아려야 한다, 그는 심각한 하극상을 당했다, 라며 라우렐 백작을 두둔하는 목소리 상당.
―아마네세르의 감시자를 건드리고 아무 대가도 없을 줄 알았나, 모든 책임은 이비 아리아테에게 있다, 라며 이비 아리아테를 비난하는 목소리 상당.
―그 평민을 즉결처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비, 라며 비아냥대는 목소리 한 번.
―이비 아리아테를 성녀로 만들면 안 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목소리 대다수.
―꼭 성녀가 되지 않아도 정화는 계속 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의견도.
쪽지를 다 확인한 이비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다.
티엔다의 들썩이는 여론을 확인한 이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마, 울지 마.’
그러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그딴 인간 때문에 눈물 한 방울도 떨어트리지 마.’
이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이미 눈가에 가득 맺힌 눈물이 더 불어나지 않게 버텼다.
정말이지 백작은 화려하게 저질러 주었다. 그래 놓고 다음 날 새벽 비스로 훌쩍 떠나 버렸다.
그로써 모든 원망은 티엔다에 남은 이비에게 쏟아졌다.
덕분에 이비는 사교계에 첫발을 들였을 때보다 더 심하게 고립되어 귀족들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
겨우 눈물을 삼킨 이비는 고개를 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마음의 요동은 여전했다.
발밑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저주에 걸린 날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내가 포기시키는 것보단 스스로 포기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새까만 머릿속에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손을 쓰면 분명 소란스러울 텐데.
그래,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철저히 지켰다.
하여 정말 훌륭하게 이비를 궁지에 몰았다.
백작의 말과 업적을 곱씹던 이비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믿지 않길 잘했다. 빚을 갚겠다느니 돌봐주겠다느니 하는 허울에 넘어가지 않기를 잘했다.
왜냐면 그 인간은 단지 성가시다는 이유로 남의 삶을 헤집고, 자기가 알아서 돌봐줄 테니 네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작자니까.
‘그런 인간에게 기댈 생각을 하다니, 너도 아직 멀었구나.’
이비가 냉혹하게 자조했다.
그럼에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만약 백작이 정말 화가 나서 이런 거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이비의 무례를 벌할 생각인 거면, 이비도 상황 자체는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그게 아니었다.
이비가 한 말에 딱히 아무 감정도 원한도 없으면서, 단지 자기가 내건 제안을 성사시키려고 상황에 이용했다.
이비가 원하지도 않는데 멋대로 돌봐주겠다던, 그 웃기지도 않는 제안 때문에.
화가 가득 찬 이비의 뇌리에 다시금 백작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성녀 발탁이 끝난 후 알려 주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웃기지 마, 이 미친 자식아……!’
이비가 가까스로 비명을 삼킬 때였다.
“이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되겠냐고!”
서재 밖에서 디에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비는 불가피하게 빽 소리쳤다.
저주는 이런 상황에서도 알차게 속을 썩였다.
덕분에 한층 더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비는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러곤 고요한 문밖을 향해 다시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 문의 맞은편, 복도에서 잠시 굳어 있던 디에스는 주저하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 잡다한 서류 앞에 앉은 이비가 보였다.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이비는 여느 때처럼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안색이 평소보다 파리했는데, 이비는 그걸 내색하기 싫은지 구태여 생긋 웃고 있었다.
“아, 어떡하죠. 지금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남은 건 잔뜩 화가 난 바옌 공작 정도?”
이비가 디에스를 향해 서류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몬테라 후작은 가장 먼저 발을 뺄 모양이고요.”
“그 사람, 지난주에도 이비 님께 꽃다발을 보냈던 거로 아는데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니까요. 그냥 이비는 달지만, 라우렐 백작이 뭍은 이비는 쓰다. 뭐 이런 거겠죠.”
이비가 묻지도 않은 얘길 발랄하게 종알대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창백한 얼굴로 까르르 웃는 모습이 꽤 가관이라, 디에스가 보다못해 물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안 맞아! 하나도 안 괜찮아! 미칠 것 같아!”
어김없이 본심이 폭발했다.
그로써 아슬아슬하게 쓰고 있던 가면이 날아가자, 이비는 잔뜩 억울한 얼굴로 디에스를 쳐다보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다.
“이 저주 진짜 짜증 나…….”
이비의 자괴감 가득한 푸념에, 디에스가 그 옆으로 다가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적당한 곳에 널브러진 이비의 뒤통수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위로 같은 거 하지 마.”
이비가 더 짜증을 냈다.
그래서 디에스는 다독이길 멈추고 이비의 머리를 좌우로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위로는 확실히 아닌 짓거리에 이비가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았다. 그 결과 디에스는 명치를 맞아 마른기침을 토하게 되었다.
정당한 응징한 후, 이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온 얼굴로 다시 말했다.
“괜찮지는 않지만, 그래도 덕분에 판단이 섰어요.”
“이 와중에 또 무슨 판단을…….”
“백작이나 탑주나 나한텐 똑같은 폭군이고, 여기 휘둘리지 않으려면 성녀 정도의 지위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요.”
한차례 폭발한 덕분인지, 이비의 표정은 꽤 단단했다.
이비는 그런 얼굴로 자길 미심쩍게 쳐다보는 디에스에게 말했다.
“분위기가 이 꼴인데 아직도 성녀 타령이냐 싶겠지만요, 나는 이 상황이 꼭 나한테만 불리한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럼 또 누구한테 불리합니까?”
“백작이요.”
그 증오스러운 자식을 떠올리며 이비는 이를 물고 웃었다.
“지금은 다들 놀라서 백작의 비위를 맞추려고 날 비난하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은근히 짜증 날 거예요. 자기 개인사 때문에 온 귀족을 협박한 백작이요. 이거야말로 횡포잖아요.”
“그럼에도 백작은 건재할 겁니다. 라우렐이니까.”
“하지만 같은 대귀족이 나서면 다르겠죠. 마침 바옌 공작이 이 일에 분개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분명 기회가 올 거예요. 이 상황을 뒤집을 기회가.”
그렇게 읊조리는 이비의 두 눈은 조용히 타고 있었다.
그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이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발악 같은 집념이었다.
남몰래 잠깐 좌절했던 이비는 다시 마음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생각을 시작했다.
“그 전에 이 저주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조력자에게서요.”
이비의 푸념에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 반가운 소식에 이비의 눈이 커졌고, 그래서 디에스는 뜸 들이지 않고 보고했다.
“성과도 있고 난관도 있는 모양입니다. 우선, 뱀이 있는 지역까지는 추적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 지역에 또 다른 밤의 일족이 있어서 어느 쪽이 뱀인지 헷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잠깐 밝았던 이비의 얼굴이 도로 우중충해졌다.
“무슨 말이에요, 자기들끼리 무슨 손발처럼 느낀다면서요. 그런데 그걸 헷갈린다고요?”
“그렇게 물어볼 걸 알았는지, 설명까지 써 놨습니다. ‘깍지를 껴서 손가락을 엇갈려 보면 너도 분명 그 손가락이 이 손가락인지 저 손가락인지 헷갈릴 것이다.’라고요.”
마치 약 올리는 듯한 비유에 이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더 가관은 그다음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 쪽에 비스로 내려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비 님이 옆에 있어야 뱀을 구분할 수 있다면서요.”
“비스로 오라고요?”
이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탑의 귀중한 자산인 이비는 탑주가 허락한 장소만 다닐 수 있다.
더욱이 이비는 예전에 탑주에게서 벗어나려고 비스로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그러다 호된 꼴을 당해 비스는커녕 티엔다도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신세인데, 그런 이비에게 내려오라니.
“꼭 내가 가야 하는 거예요?”
“모르겠습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제가 확인차 비스로…….”
“……아니요.”
디에스는 이비가 탑주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 알기에 미련 없이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돌연 이비가 디에스의 말을 막았다.
이비에겐 이제 여유가 없었다.
티엔다 귀족들이 돌아선 지금, 저주에 발이 묶인 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방법을 알아보려고 며칠씩이나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갈게요. 탑주한테 허가를 받고요.”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분명 이유를 물어볼 거고…….”
“백작이요.”
“백작?”
“백작을 만나야 한다고 할 거예요. 성녀가 되려면 백작을 설득해야 한다고요.”
디에스는 이비의 무모한 주장에 난색 하다가, 백작이라는 말에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탑주는 지금 나하고 내기 중이고, 내기가 끝날 때까지 권력을 써서 날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 가련한 집사를 위해 이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허락할 거예요. 여기서 날 막으면, 내가 성녀가 되는 걸 자기 권한으로 방해하는 게 되니까.”
한때 디에스는 확신했었다.
귀족들이 가늠조차 못 하는 이비의 진짜 저력은 총명함과 담력이라고.
그런데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이비 아리아테는, 잔머리 쪽이 훨씬 더 굉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