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백작의 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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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백작의 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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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백작의 압승
2022.07.11.
“라우렐 백작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애당초 라우렐 가의 권력 자체가 백작에게서 오는 거니까요.”
“그 정도예요……?”
디에스의 말에 이비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디에스는 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아시잖습니까?”
“알아요, 비스에 있었어요.”
“더 정확히는 비스의 경계에 있었죠.”
경계. 비스 동쪽에 있는 대륙 유일의 접경지역.
그곳에선 무려 300년 전에 시작된 전쟁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분쟁이 아니라, 어느 위대한 존재의 광기로 인한 불행이었다.
“동쪽의 경계, 아마네세르가 있는 곳에요.”
디에스가 발음한 꺼림칙한 이름이 이비의 귀에 박혔다.
아마네세르. 그건 한때 티엔다비스를 수호하던 황금빛 용의 이름이다.
그는 ‘새벽을 깨우는 아마네세르’라 불리며 해일과 태풍으로부터 티엔다비스를 지켜 낸 존재였다.
하지만 그 또한 300년 전 일어난 비극으로 본래의 숭고한 역할을 잊어버렸다. 노체에 의해 타락해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용은 비스 동쪽에 유폐된 채, 지금도 여전히 날뛰는 중이다.
“날뛰는 아마네세르를 동녘에 가두고 감시하는 게 라우렐 가의 소임이죠. 그리고 지금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게 라우렐 백작이고요.”
“그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물론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귀족들의 의견을 혼자 묵살할 수 있어요? 비스를 지키는 건 바옌 공작가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비가 또 다른 대귀족인 바옌을 거론하며 되물었다.
이비의 말처럼 바옌도 뿌리 깊은 무관 가문이고, 그 가문에서 통솔하는 군대 역시 비스 전역에서 활약 중이었다.
“하지만 라우렐과 바옌의 역할은 완전히 다릅니다.”
가볍게 대꾸한 디에스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다시 손질을 시작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선 바옌 공작의 군대가 하는 일은 비스의 치안관리입니다. 자경 능력이 부족한 도시에 주둔하거나, 도적 떼를 소탕하거나, 노체의 저주로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고 때로는 밤의 일족을 사냥합니다. 한마디로 비스의 주민들을 위한 군대인 거죠.”
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비스에 있을 때 종종 보았다. 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검은 고래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것을.
그 검은 고래가 바로 바옌 공작가의 상징이었다.
“반면 라우렐 대공가의 군대, 그러니까 동녘의 감시자들은 동부의 경계에만 주둔합니다. 그리고 아마네세르를 감시하면서 경계의 괴물들이 밖으로 못 나오게 막는 역할을 하죠.”
그러니까 라우렐의 군대는 아마네세르라는 거대한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고, 바옌의 군대는 비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것이란 소리다.
이비는 이 둘의 어떤 점이 다른지 생각하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귀족들은 바옌 공작의 군대에 관심이 없겠네요.”
“맞습니다. 밑대륙에 사업장이 있는 귀족 외엔 대체로 무관심합니다. 비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티엔다 귀족들에겐 별다른 피해가 없으니까요.”
이비는 곧장 핵심을 짚어 냈고, 디에스는 그 영리함에 속으로 웃었다.
아마 티엔다 귀족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떤 화제든 능숙하게 이어받는 이비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전까지 이비는 글자만 겨우 알 뿐, 거의 모든 것에 무지했다. 험지에서 살아남기 급급했던 탓이다.
그런데 이비는 티엔다 귀족계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이 십여 년에 걸쳐 배운 것들을 단숨에 격파했다.
과감하고 효율적으로, 또 끈질기게.
이걸 모르는 귀족들은 이비의 능력이 마냐냐의 가호를 받은 목소리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디에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확신했다. 귀족들이 가늠조차 못 하는 이비의 진짜 저력은, 이 총명함과 담력이라고.
이비에게 새삼 이채를 느꼈지만, 디에스는 내색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었다.
“반면 아마네세르는 티엔다에도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배웠으니 아실 겁니다. 예전에 아마네세르가 티엔다를 바다로 떨어트리려 했다는 걸.”
“네, 알아요. 그러니까 티엔다와 별 연관 없는 일을 하는 게 바옌 공작의 군대, 티엔다의 직접적인 위협을 막는 게 라우렐 대공가와 백작이라는 거죠?”
이비의 얄밉도록 명료한 요점정리에 디에스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정확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바옌 군대의 역할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라우렐 백작의 임무는 오직 백작만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건 왜요?”
“아마네세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몰라요.”
“날개를 펼치면 티엔다를 모두 가릴 정도라고 합니다.”
“거짓말.”
“사실입니다. 마냐냐를 생각해 보세요.”
이비가 믿지 못하고 의심하자 디에스는 정말이라는 듯 마냐냐를 언급했다.
정화식 직후, 탁하던 물이 공기처럼 투명해지면 호수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럼 진흙과 뻘에 파묻힌 마냐냐의 윤곽도 볼 수 있는데, 웅크리고 잠든 마냐냐의 몸체는 그 넓은 호수의 밑면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
이비는 그런 마냐냐를 떠올리고 뒤늦게 수긍했다.
하긴, 움츠린 상태로도 그렇게 큰데 날개까지 펼치면 티엔다를 덮고도 남겠다.
게다가 티엔다는 비스에 비하면 아주 작은 땅이다.
산맥과 들판, 그리고 강을 담은 비스는 대륙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만, 티엔다는 호수 하나를 겨우 품은 자그마한 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비는 한 생명체가 티엔다와 비견되는 크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꽤나 감탄했다.
그리고 이어진 디에스의 발언은 이비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런 아마네세르를 가두고 감시하는 걸 백작이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요.”
“혼자서요?”
“라우렐 가의 차남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임무입니다. 날아오르는 아마네세르를 추락시키고 다시 잠재우는 것, 그래서 동녘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 그게 그들의 역할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티엔다만큼이나 큰 용을 혼자 떨어트리고 막아낸다니. 이비는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놀란 얼굴로 묻자, 디에스가 명료하게 대답했다.
“이비 님이 마냐냐의 가호를 독점한 것처럼 백작도 타르데스의 가호를 전용 중이니까요.”
신이 하늘을 본떠 만든 네 마리의 용.
새벽을 깨우는 아마네세르.
낮을 다스리는 마냐냐.
황혼을 감시하는 타르데스.
그리고 밤을 살피는 노체.
한때 대륙을 보살피던 이 찬란한 존재들은 노체의 변절로 각기 다른 파국을 맞았다.
미쳐서 날뛰는 아마네세르.
힘이 다해 긴 잠에 빠진 마냐냐.
깊은 상처를 입고 침묵하는 타르데스.
산산이 부서져 저주의 근원이 된 노체까지.
그리고 그중 하나인 타르데스는, 마냐냐와 마찬가지로 한때 보살피던 인간들에게 자신의 가호를 빌려주었다.
그것은 온화한 마냐냐의 가호와 달리 더없이 거칠고 파괴적인 힘.
그 힘을 받아 아마네세르와 일평생 싸우는 것이 역대 라우렐 백작들의 임무이자, 가혹한 사명이었다.
“그러니까 백작은 아마네세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미친 용으로부터 티엔다비스를 지키고 있는 구원자인 셈이죠.”
디에스의 거창한 평가에 이비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백작의 위세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도, 그걸 여태 까맣게 몰랐다는 것도 이비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속성으로 교양을 쌓던 이비는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7년간 티엔다를 외면해 온 시온 라우렐 백작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버릴 것에 속했다.
그래서 이비는 백작에 대해 아주 얄팍하게만 알고 있었다.
라우렐 대공의 동생이 비스에 파견되어 있다더라, 그게 동녘에 있는 아마네세르와 연관되어 있다더라.
딱 이 정도였다.
하지만 디에스가 새롭게 알려 준 백작의 면면은 이비의 해석을 아득히 뛰어넘었고, 덕분에 이비는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욕을 했군요.”
이비가 새삼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댔다.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동녘의 경계에 대해서는 이비도 몇 번 들어보았다.
미쳐버린 새벽의 용 아마네세르가 내뿜는 독기에 땅은 불타오르고, 역리의 산물인 괴물들이 끝도 없이 태어나 이빨을 드러내는 이 세계의 지옥.
그리고 그런 곳에서 홀로 용을 떨어트리는 시온 라우렐…….
“이 정도면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난 거 아니에요?”
이비가 위기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디에스도 냉혹하게 긍정했다.
“잘나기는 당연히 백작이 훨씬 더 잘났고, 중요도를 따져도 그쪽의 압승이죠. 물이 없으면 괴롭지만 아마네세르가 풀려나면 몰살이니까요.”
그 말에 이비의 얼굴은 한층 더 핼쑥해졌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비의 성녀 발탁을 막겠다고 한 백작의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그 사람에게 정말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물론 그렇다고 백작이 다른 대귀족에게 명령하거나 강압하지는 못할 겁니다. 세드로든 바옌이든 몬트라든, 다 라우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이 있으니까요.”
이비의 얼굴이 하얘지자 디에스가 뒤늦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 말은 이비에게 조금도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대체 누구한테 무슨 빚을 졌다는 거지?’
이비는 백작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더더욱 의심스러워졌다.
가문을 걸고 맹세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동시에 의문 뒤로 한 가지 달콤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백작이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면, 탑주로부터 날 보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에게 나를 지켜주고 돌봐줄 의무가 정말 있다면.
이비는 어제 탑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백작은 이비의 젖은 예복을 보고 코트를 벗어 줬다.
이비를 도우려고 같은 대귀족인 미엘 세드로를 밀어냈다.
그리고 자신을 넘어트린, 심지어 그 위에 올라타 입까지 막아 버린 이비를 뿌리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이비의 양 볼을 가볍게 잡아 눌렀을 뿐.
백작이 뺨을 붙잡던 감각이 문득 생각났다. 민망해진 이비는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정말이지 그 일 때문에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그건 숙녀에게 가당치도 않은 희롱이었다.
한편으로 그건 관심이 없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을 종류의 접촉이었다.
‘나한테 관대한 건 사실이야.’
이비는 고민 끝에 인정했다.
딱히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지만, 게다가 정중함과도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백작은 이비를 꽤 많이 봐줬다.
이비가 저주 때문에 내뱉은 몹쓸 말까지 다 참아 줬으니, 생면부지의 대귀족이 이 이상 너그러울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살짝 믿어도 되지 않을까……?
‘아냐, 정신 차려.’
이비는 마음이 기우는 걸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생긴다.
그러니 대가 없는, 분에 넘치는 행운이 찾아오면 의심해야 한다.
덫에는 반드시 미끼가 놓이는 법이니까.
“……맞아요. 집사 말처럼 다른 대귀족들도 있고 백작도 이래저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니까, 결국 상식선에서 행동할 거예요.”
계산을 갈무리한 이비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곤 전전긍긍하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백작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가능성까지 배제하진 않을 것이다.
백작이 스스로 밝힌 목적은 빚을 갚는 것.
그러기 위해 이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비의 성녀 발탁을 막아서는 것도 그 일환이라면, 백작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무렴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너무 격하게 몰아붙이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비는 막연히 희망을 가졌다.
백작이 앞서 그랬듯 은근히 너그럽게 나올 거라는, 참으로 헛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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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내리 침묵하던 라우렐 백작이 이비 아리아테에 대한 입장을 드디어 공표했다.
문제의 연회로부터 꼭 일주일 만이었다.
「나 시온 라우렐은 라우렐 대공가를 능멸한 이비 아리아테의 성녀 발탁을 엄중히 반대한다.
그럼에도 결정권자들의 아집으로 위 사람이 성녀로 선발된다면, 나는 명예의 회복을 위해 이 결정이 철회될 때까지 아마네세르의 감시 임무를 중단하기로 선언한다.」
백작의 입장은 짧았다.
하지만 티엔다 귀족계를 발칵 뒤집어엎기에는 충분했다.
사실상 이것은 티엔다 전체를 향한 협박이었고, 귀족들의 목을 하나하나 정성껏 조르며 내린 명령이었다.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귀족들은 일제히 한곳으로 화살을 돌렸다.
감히 티엔다의 수호자인 백작님께 대역죄를 저지른 이비 아리아테에게.
백작은 분명 이비를 지키고 돌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백작은 그러기 위해 먼저 이비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