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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그러게 좀 착하지 (11/129)


11화. 그러게 좀 착하지
2022.07.07.


어둑한 저녁, 어린 이비는 무너진 담벼락 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아이는 무릎을 꼭 끌어안고 선잠을 자다가, 자박대는 발소리에 흠칫 깨어났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몸서리를 쳤다.


“괜찮아, 나야.”

그러자 석양을 등진 커다란 그림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익숙한 음성에 이비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댔다.


“아저씨…….”

점성술사를 뒤늦게 알아본 이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희미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점성술사가 염려스럽게 묻자 이비는 억지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털털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무릎에서 피 나는데.”

“앗.”

이비는 자기가 다친 걸 그제야 알았는지 놀라서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을 감쌌다.

그러자 점성술사가 이비의 손을 잡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내민 하얀 손수건에 이비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저씬 손수건이 되게 많네요.”

이비는 점성술사가 자기 때문에 손수건을 매번 버리는 게 미안해서 일부러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걸 아는지 점성술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이비의 무릎을 닦아 주며 다시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잡혀갈 뻔했어요.”

“어디로?”

“그건 잡혀가 봐야 알겠죠.”

이비가 태연히 말하더니, 곧 눈썹을 곤두세우며 투덜댔다.


“진짜 어이없죠. 자기들이 뭔데 나를 팔려고 해? 콱 다 벼락 맞아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이비의 일상은 다사다난했다.

매일 도망치고, 훔치고, 얻어맞고, 숨고, 어디론가 끌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버틴다.

그 와중에 억척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객기나 허세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이비의 작지만 강한 의지였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점성술사는, 오늘도 만신창이가 된 이비에게 오랫동안 고민한 말을 꺼냈다.


“이비야, 나하고 같이 살지 않을래?”

뜻밖의 제안에 툴툴대던 이비가 놀라서 쳐다봤다.

이비는 점성술사를 향해 크고 까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저씨, 변태예요?”

“아니야…….”

“다들 말로는 아니라고 하죠.”

이비가 노골적인 눈으로 점성술사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래서 점성술사는 다급히 해명했다.


“어떤 부인이 자기 집 2층에 세를 놨어. 깨끗하고 방도 여러 개인데 그 부인이 식사까지 챙겨 준다고 해서, 거기서 같이 지내자는 거야. 나랑 단둘이 살자는 게 아니라. 물론 네 방은 따로 있을 거고.”

반쯤 농담이었는데, 점성술사가 놀라서 구구절절 설명하자 이비는 피식 웃어 버렸다.

이비의 표정이 풀리자 점성술사가 다시 물었다.


“거기서 지내지 않을래?”

“싫어요.”

“왜?”

“못 믿겠어요.”

하지만 이비의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잖아요. 사람은 다 자기한테 좋은 일을 하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돕지 않아요.”

“다 그런 건 아니야.”

“다는 아니어도 대부분은 그렇죠. 그래서 나는 이유 없이 도와주는 거 싫어요. 그게 미끼인지 함정인지 의심하기 귀찮아요.”

이비가 냉소를 섞어 말했다.

그때 이비의 태도는 마냥 건방지고 반항적이었지만, 정작 여린 가슴은 몰래 뛰고 있었다.

사실 이비는 점성술사의 제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자길 잡아가려던 사람들처럼 점성술사도 그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이비도 점성술사를 그렇게까지 불신하진 않았다.

만약 아무 신뢰도 없다면 이비는 그냥 알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곤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영영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비는 점성술사를 좋아했고, 지금처럼 종종 만나 대화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오히려 버릇없이 말하며 선을 그었다.

친절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당신에게만은 배신당하고 싶지 않으니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다행히 점성술사는 이비의 애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서 잔잔히, 평소처럼 예쁜 입술로 웃어 주었다.


“그래,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이비의 거절에도 점성술사는 여전히 상냥했고, 그 모습에 이비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런 이비를 향해 점성술사가 못내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런데 이비야, 세상엔 대가 없는 도움도 있어.”

“아저씨는 진짜 세상 물정 모르네요.”

하지만 이비는 고집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생겨요. 도움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다못해 구걸해서 빵을 얻어먹는 것도 동정받는 법을 아는 사람한테만 있는 자격이에요. 그런데 나한텐…….”

이비는 잘난 척 말하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나한텐 아무 자격도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비는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이내 씩씩하게 말을 바꿨다.


“나한테는, 물론 더 큰 자격이 생기겠죠. 그러니까 아저씨랑 같이 지내는 건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요. 나중에 저어기, 티엔다로 가면요!”

 

.
.
.

그렇게 약속한 지 어언 8년.

어린 시절 다짐대로 도움받을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충분해진 이비는, 그럼에도 극심한 고독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집사……. 찻잔 그만 닦고 내 얘기 좀 들어 봐요. 오전에 다들 호수에서 뱃놀이했대요. 정화식이 잘 끝난 기념으로요. 그리고 오후엔 몬테라 후작이 차담회를 연대요. 정화식이 잘 끝난 기념으로요. 또 내일은 베르데 자작이 별장에서 수상 정원을 공개한다는데, 알죠? 이것도 정화식이 잘 끝난 덕분인 거……. 저기, 집사. 지금 내 말 듣고 있어요?”

이비의 끝도 없는 하소연에 디에스는 마른 수건으로 찻잔을 닦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듣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도 들었고 두 시간 전에도 들었는데 여전히 듣고 있네요.”

“맞아요, 나는 한 시간 전에도 두 시간 전에도 집사하고만 얘기하고 있어요……!”

이비가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러더니 소파 팔걸이에 이마를 박으며 엎어졌고, 그 연극적 행위를 보다 못한 디에스가 핀잔하듯 혀를 찼다.


“정 심심하면 책이라도 읽으시죠. 아니면 악기 연습을 하시든가요.”

“그건 싫어…….”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디에스가 피로한 목소리로 신음했지만, 이비는 집사의 고충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비가 디에스를 붙잡고 괴롭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전한 저주 때문에 대화 상대가 집사밖에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화식이 끝난 직후 이전과 너무 다른 본인의 처지 때문이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등장 이후, 티엔다 사교계에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

정화된 물이 비스로 다 흘러가기 전에 그 맑은 물로 온갖 방식의 유희를 즐기는 거였다.

가볍게 배를 띄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청량한 호숫가를 배경으로 시 낭독회나 연주회를 열거나, 물을 잔뜩 끌어와 꽃잎이나 허브를 띄운 거대한 수영장을 만드는 등, 정화식의 여운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근래 티엔다의 유행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초대받는 건 마냐냐를 깨우는 이비 아리아테, 바로 사랑스러운 예비 성녀님이시다.

그렇게 온갖 곳을 다니며 주목받고 칭찬받아 겉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속으로는 한껏 우쭐하는 게 이비의 낙이었는데.

저주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고 저택에만 콕 처박히게 된 이비는 작금의 실정이 몹시도 억울했다.


“그날이 그리워요…….”

그들의 환호, 그들의 찬사, 또 그들의 열렬한 갈채.

욕망에 충실한 이비가 아련한 눈으로 과거의 영광을 그리자, 디에스가 다 닦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 그러시면 안전한 모임에 잠깐 다녀오세요. 거기서 시답지 않은 얘기만 하다 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집사, 때로는 시답지 않은 얘기가 더 위험하답니다.”

디에스가 건성으로 내놓은 대안에 이비는 흐린 눈으로 웃었다.

안 그래도 이비는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인 모임을 골라 살짝 나가볼까도 생각했다.

단지 심심해서가 아니라, 어서 근신을 끝내야 라우렐 백작과의 문제도 지난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교계에 조금씩 얼굴을 내비치며 건재함을 드러내려 했는데, 막상 나가려니까 예상되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생각해 봐요. 아르코 영식 같은 사람이 이 모자 어때요, 라고 물어보면 나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자랑스럽게 쓰고 계시네요, 라고 대답할지도 몰라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가식이 없어서 일상생활조차 안 된다니……. 그러게 좀 착하지 그랬어요.”

집사가 태연히 속을 긁자 이비는 코웃음을 크게 쳤다. 그러곤 바보를 가르치듯 집사를 천천히 타일렀다.


“집사. 내가 착하다는 소리 들으려고 가식을 부리는 건 사실이지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 행동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면 그건 가식이 아니라 내 새로운 모습이라고요.”

“그래서 라우렐 백작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때려잡고 싶어요.”

착함에 실패한 이비가 웃는 낯으로 디에스의 찻잔을 높이 들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의 팔목을 붙들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이비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후, 디에스가 소중한 찻잔을 보듬으며 말했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곧 뱀 사냥에 대한 보고가 올 겁니다.”

“네, 희소식이 있으면 좋겠네요…….”

이비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곤 조금 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집사가 라우렐 백작의 이름을 꺼내는 바람에 그 남자의 말이 다시 떠오른 탓이다.


―내가 포기시키는 것보단 스스로 포기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합의는 틀렸고 피차 원하는 대로 할 것 같으니, 성녀 발탁이 끝난 후 알려 주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어제, 정화식이 끝나고 백작은 이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동시에 내가 너의 성녀 발탁을 반드시 막을 테니, 너는 어떻게 지원받을지나 생각하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통보였다.

아직 아무 일도 없긴 하지만, 이비는 그 대귀족의 으름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디에스에게 의견을 물었다.


“라우렐 백작 말이에요, 그 사람이 정말 내 성녀 발탁을 막을 수 있을까요?”

새로운 성녀를 결정하는 건 대귀족 가문의 수장들과 현 성녀의 고유 권한이다.

그리고 이비는 현재 라우렐 대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옌 공작과 몬트라 후작, 그리고 성녀인 로블레 투하의 지지를 받아 가장 유력한 차기 성녀로 거론된다.

즉 천하의 라우렐 대공조차 다른 대귀족의 뜻을 좌우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 가문의 장도 아닌 백작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호언장담하는지, 이비는 그게 못마땅하고도 미심쩍었다.

그런데 집사가 전혀 뜻밖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라우렐 백작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애당초 라우렐 가의 권력 자체가 백작에게서 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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