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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에요 (10/129)


10화.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에요
2022.07.04.



 


“이쪽이 선약인데 그냥 가면 씁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묵직한 힐난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오른쪽 얼굴 옆에 놓인 백작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이비의 얼굴을 몽땅 덮을 만큼 컸다. 게다가 생김새는 매우 험했다.

울퉁불퉁한 뼈마디나 도드라진 힘줄은 둘째치고, 그의 손에는 꽤 오래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당연히 티엔다의 여타 귀족 청년들처럼 섬섬옥수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백작의 손은 용병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거칠었다.

덕분에 이비는 새삼 실감했다. 이 사람이 비스의 총사령관, 그러니까 전투를 업으로 삼는 군인이라는 사실을.


‘총사령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불한당처럼 굴면 쓰나요!’

그래서 이비는 속으로 힘껏 항의하며 다시 침착하게 문고리를 당겨보았다.

물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문의 무게는 이비 아리아테를 향한 백작의 집념이었고, 그걸 이해한 이비는 결국 이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맞아요. 오늘은 백작님과 선약이 있죠. 아, 정화식이 끝나면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제가 깜빡하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백작님께서 또 걸음하시게 만들었네요.”

이비는 귀엽게 자책하며 백작의 팔 안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그러곤 잠시 고민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불쌍하게 괴롭힘당하던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

경험으로 만들어진 이비의 큰 편견에 의하면 영웅 심리를 가진 남자들은 대부분 그런 말을 원한다.

그리고 이비는 미엘과 리오가 있는 데서 자신만 덜컥 꺼내 온 백작이 어지간히도 자아도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적당한 인사치레가 필요하겠지만, 이비는 짧은 궁리 끝에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백작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 아까 그 일이 괴롭힘이라고 시인하는 꼴이고, 나아가 미엘과 리오가 작고 소중한 평민 소녀를 괴롭히는 악녀들이라고 일러바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성녀 후보님의 체면이 있지, 그런 얄팍한 고자질은 결코 안 될 일이다.


‘그러니까 아까 일은 그냥 모르는 척 덮는 게…….’

이비가 딱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까 같은 일이 자주 있습니까?”

“아까 같은 일이 미엘 세드로의 괴롭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자주 있어요.”

그런데 백작이 기습적으로 물었고, 이비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실토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헛숨을 삼켰다. 내리 무표정하던 백작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당황한 이비는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에요. 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정화식이 열리는 날에는 다들 예민하니까요.”

아, 구차하다.

이비는 자신의 발언을 그렇게 평가했다.

열 살 꼬맹이처럼 이름까지 콕 찍어 쟤 나쁜 애라고 일러바치다니, 그래 놓고 뒤늦게 구구절절 감싸는 척하다니.

이건 마치 허술한 이간질처럼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백작도 그렇게 느꼈는지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오늘 답변을 들으러 오신 거죠?”

이비는 민망함을 참을 수 없어 차라리 말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작은 그렇다며 고개만 끄덕일 뿐 미엘이나 아까 일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여기서 백작과 담판을 짓게 된 이비는 긴장을 삼키기 위해 숨을 깊게 마셨다.

후견의 조건으로 성녀 자리를 포기하라는 백작의 제안은 당연히 거절이다. 하지만 거절하며 백작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래저래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이비는 직전의 정화식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백작도 정화식을 봤다면 더 이상 이비에게 성녀가 안 어울린다느니 하는 말은 못 할 터.

이비는 차분히 결연하며 운을 뗐다.


“마음은 정했습니다, 백작님. 우선 과분한 제안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백작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한 말에 요 며칠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물론 그 꿈은 네 놈이 나오는 악몽이었다.

이비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백작의 제안으로 자신이 얼마나 설렜는지 한참 동안 설명했다.

그러곤 아주 완곡하게 덧붙였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백작님.”

백작은 이비의 거절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형식적인 태도로 백작이 이유를 물으려 했다.


“이유는…….”

“저는 성녀가 반드시 되고 싶어요.”

“왜…….”

“그게 마냐냐의 가호를 받은 제 사명이니까요.”

“그렇다고…….”

“티엔다와 비스를 위해서도, 저는 마냐냐 탑에 남아야 해요.”

그때마다 이비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백작의 질문을 가로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이비 아리아테의 대화법에 백작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 후, 백작이 나직이 말했다.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듣는 버릇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백작의 짜증 섞인 물음에 이비는 겸손히 대답했다. 그러곤 깜짝하게 웃는 얼굴 뒤로 부지런히 식은땀을 흘렸다.

정화식을 본 직후라 좀 봐줄 줄 알았는데 이비를 대하는 백작의 태도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이 와중에 말실수를 연발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백작에게 이비 아리아테는 천하의 머저리로 인식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비의 이런 예상은 적중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시온은 마치 늑대에게 물린 토끼처럼 허둥대는 이비 아리아테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대뜸 이런 데로 끌고 왔으니 긴장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비 아리아테가 계속 보이는 경솔함은 단지 긴장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었다.

시온이 티엔다에서 확인한 이비 아리아테의 평판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마냐냐의 가호를 받은 경이로운 존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민답게 순수하면서 평민답지 않게 기품이 넘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시온은 이비 아리아테에게서 순수함도 기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품은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파탄 났으니 더 거론할 필요도 없고, 그걸 마지못해 순수함으로 여겨 주려 해도 이비 아리아테가 보이는 수작이 너무 빤하다.

물론 시온도 저 많은 물을 정화한 이비 아리아테의 능력만은 인정했다.

이비가 물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노래하는 모습은 마치 마냐냐의 현신 같았고, 시온은 그 모습을 보며 숨 쉬는 것조차 잊었었다.

다만 이비 아리아테가 가진 건 그게 전부였다.

정화식이 끝나면 창고에서 괴롭힘당하는 신세에, 그게 걱정돼서 자주 그러냐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이르고, 그래 놓고 뒤늦게 다 이해한다는 듯 너스레.

마치 열 살 먹은 학생들이나 할 법한 행동을 스무 살 난 여자가 하고 있다.


‘듣던 거랑 너무 다르잖아.’

물론 시온도 티엔다의 평판이 이비 아리아테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평판이란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온은 여기서 대충 알아낸 평가가 아니라 이비를 부탁한 ‘그 사람’의 말로 이비 아리아테를 상상했었다.


―이비는 강해. 강한 데다가 영리하고 대범하고 눈치도 빠르고 요령도 좋고 말도 잘하고 게다가 노력도 대단히 많이 하고…….

―야, 작작 해.

그 사람은 이비 아리아테에게 모든 걸 바친 사람답게 틈만 나면 이비를 칭송했다.

그래서 소년 시절의 시온은 진저리를 내며 그의 열띤 말을 끊어 내야 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야. 정말.

그럼 그 바보 같은 남자는 꼭 이런 식으로 말을 맺었다. 그리움이 가득한, 미련한 눈으로.

시온은 그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이비 아리아테와의 만남을 미룬 것도 사실 상당 부분 이것 때문이었다.

그러다 더는 미룰 수 없어 결국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찾아왔는데 이게 웬걸.


‘대체 어디가 멋지다는 건데…….’

시온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러곤 자신의 상상과 상반된 현실에 다시 집중했다.

여러 호평과 달리 시온이 본 이비 아리아테는 받은 능력에 비해 너무나도 얄팍한 사람이었다.

그걸 확인했으니, 시온은 더 이상 시간 끌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다시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이미…….”

“내가 포기시키는 것보단 스스로 포기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이비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내가 손을 쓰면 분명 소란스러울 텐데, 여기서 합의하는 편이 피차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비는 경직된 얼굴로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저 백작 놈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작은 여느 때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선언하고 있었다.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론은 내가 정한 쪽, 그러니까 네가 성녀 자리를 포기하는 쪽으로 날 거라고.


“저, 백작님. 제 의사는…….”

“존중은 하지만 승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백작님은 왜 자꾸 사람 얼굴로 개소리를 하실까.


‘그럼 생각할 시간은 왜 준 건데?’

자문하던 이비는 백작의 뻔뻔스러운 면상에서 답을 찾았다.

생각할 시간을 준 거지, 선택권을 준 건 아니란다.

그 명백한 의도에 이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역시 함정이구나! 부탁받았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이비의 두 눈에 불신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백작이 말했다.


“전에 한 말은 사실입니다. 가문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대귀족의 맹세에 이비는 백작을 향한 매도를 멈췄다. 그러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백작을 쳐다봤다.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 말은 제가 성녀가 되는 걸 백작님께서 직접 막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그 후에는 약속대로 돌봐 주실 거고요?”

“네.”

“그럼 만약에 제가, 백작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가 된다면요?”

“무의미한 가정입니다.”

이비 아리아테의 물음에 시온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비 아리아테의 커다란 눈이 처연하게 흔들렸다.


‘너한테는 날벼락이겠지.’

시온은 침묵하는 이비를 보며 속으로 중얼댔다.

물러날 생각은 없지만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무심코 꺼냈다.


“가혹합니까?”

원망하려면 하라는 의도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오히려 좋아요.”

이비 아리아테가 돌연 씩씩하게 말했다.

그래서 시온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어째서?”

“제가 어떻게 나오든 알아서 하실 생각이라면 저도 그래도 된다는 거잖아요. 그러다 성녀가 되면 원래 목표가 달성된 거니까 그대로 좋고, 만약 안 되면 백작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것도 좋고.”

이비의 당돌한 대답에 시온은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격하게 솔직했던 이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비는 이렇게 야비하지 않아!’

아차 하면 터지는 저주 때문에 머릿속 계산까지 다 읊어 버렸다.

이비가 그 말들을 주워 담지 못해 허둥대는데, 어처구니없어하던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보험으로 삼겠다?”

“네, 맞아요.”

“원래 그런 성격입니까?”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이에요.”

“그런데 왜…….”

‘그만 해!’

백작의 질문이 이어지자, 저주에 입을 빼앗긴 이비는 질겁해서 달려들었다. 급한 대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절박한 시도는 아주 보기 좋게 사고로 번졌다.

울퉁불퉁한 돌계단의 단 차와 벽에 비스듬히 기댄 백작의 자세, 그리고 이비 아리아테의 다급함이 겹쳐 이비는 그만 백작과 함께 와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방심한 사이 이비에게 깔린 백작이 계단에 걸터앉은 자세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하지만 질문이 완성되기 전에 그의 무릎에 앉은 이비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그로써 백작은 별안간 덮쳐지고 입까지 틀어막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대범한 짓을 벌인 이비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지척의 거리에서 백작은 잠자코 이비를 보고 있었다.

손 치우라는 무언의 종용으로 느껴졌지만, 이비는 손을 치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느 쪽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버티자 백작이 손을 뻗었다.

이비는 당연히 자기 손을 떼어 내려는 줄 알고 그만 물러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작의 손이 향한 곳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이비의 얼굴이었다.

백작의 거친 손끝이 이비의 뺨에 닿았다.

이비가 흠칫 놀라 몸을 물렸지만, 백작의 무릎에 앉아 있는 채로는 얼마 도망갈 수도 없었다.

결국 백작의 큰 손이 이비의 얼굴을 덮었다.

낯선 손길에 이비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러나 백작은 개의치 않고, 이비의 양 볼을 엄지와 중지로 꾹 눌러 버렸다.


 


‘으으윽!’

얼굴이 순식간에 찌그러진 이비는 이 무례에 경악하며 그에게서 후다닥 물러났다.

그러곤 자신의 양 뺨을 손으로 감추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백작을 쳐다보았다.

항의하고 싶지만 백작의 얼굴에 먼저 손을 댄 주제라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벽에 등을 붙인 채 헛숨만 삼키고 있자, 그 사이 백작이 일어나 구겨진 옷을 털었다.


“뜻은 잘 알았습니다.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백작은 이비가 넘겨 준 코트도 다시 걸쳤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맺었다.


“합의는 틀렸고 피차 원하는 대로 할 것 같으니, 성녀 발탁이 끝난 후 알려 주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백작은 이 말을 남기고 먼저 계단실을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비는 한참 후에야 충격에서 벗어나 그 뻔뻔함에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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