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쪽이 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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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쪽이 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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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쪽이 선약
2022.06.30.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없잖아요.”
이비의 원망 섞인 눈초리에 리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리오 투하는 갑자기 대드는 이 평민이 황당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평소 이비 아리아테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요령이 좋았다. 아무리 괴롭혀도 잘만 빠져나가는 여우 중의 여우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물론 모르니까 그러신 거겠죠. 제가 왜 그랬는지, 투하 양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사연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하는 이비 아리아테는 어딘지 위태롭고 절박해 보였다.
평소 리오는 저 건방진 평민이 주제를 파악하길 바랐다. 늘 생글대는 얼굴이 분수에 맞게 침울해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통쾌하기는커녕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런데도 리오는 지고 싶지 않아 다시 소리쳤다.
“마,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제가 이 이상 무슨 말을 어떻게 똑바로 하겠어요. 나를 저열하게 여기는, 관심이나 구걸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상대에게.”
하지만 그 발악마저도 이비의 차분한 힐난에 도로 막혔다.
비록 지금은 질투에 눈이 멀어 마구 패악을 부리지만, 리오는 근본적으로 곱게 자란 아가씨였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에게도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 이비 아리아테에게 지적당하다니.
상상도 못 한 하극상에 머릿속이 엉키기 시작했다.
반박하고 싶은데 마땅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이비가 쐐기를 박았다.
“제가 비스 출신의 평민이라고 해서,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 건 아니에요.”
이비의 준엄한 책망이 리오의 양심을 세차게 꿰뚫었다.
그로써 리오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어여쁜 홍안을 보며 이비는 속으로 중얼댔다.
‘해치웠나?’
그런 것 같다. 해치웠다.
리오 투하는 서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비를 쳐다보는 두 눈에도 배신감만 가득할 뿐 더 덤벼들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저주 때문에 이게 무슨 굴욕인지…….’
평소 이비는 리오가 아무리 캉캉 짖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럼 리오가 더 약이 올라서 혼자 부들대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사뿐히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유력한 성녀 후보 이비 아리아테의 품위였는데, 저주 때문에 온갖 구차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비는 그게 적잖이 서러웠지만, 지금은 탄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한 명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풉!”
마침 그때 달콤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의 주인은 옆에서 지켜보던 미엘 세드로였다.
“아, 이비 때문에 미엘은 너무 웃겨요.”
미엘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을 쿡쿡댔다. 그러더니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티엔다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사람 취급까지 바라면 어떡해요, 이비. 버릇이 너무 잘못 들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미엘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귀여웠다. 그래서 그 안에 숨은 독기가 오히려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이비는 저 갈고닦은 폭언이 놀랍지도 않았다.
정화자들 중에서 이비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리오 투하라면, 이비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단연코 미엘 세드로였다.
게다가 아주 만만한 리오와 달리 미엘은 잔악하고 집요한 녀석이었다.
“계속 이러면 이비가 곤란해지니까, 미엘이 예절 교육을 시켜 줄게요.”
아니나 다를까 미엘이 달뜬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잘못했으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예요. 이런 건 원래 평민들이 더 잘 아는데, 역시 버릇이 잘못 들었나 봐요.”
“세드로 양, 지금 제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시는 건가요?”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그래야 미엘이 이비를 감싸 주죠.”
이비가 확인차 묻자 미엘은 티 없이 밝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래서 이비는 바닥 대신 미엘의 안면에 무릎을 대 볼까 하다가 그 삿된 생각을 재빨리 떨쳤다.
‘얘는 또 어떻게 치우지?’
미엘 세드로는 리오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 교육 운운하는 미엘의 말은 의외로 정당했다.
뛰어난 정화자인 이비는 마냐냐 탑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래서 탑주 외엔 아무도 이비를 벌할 수 없지만, 미엘 세드로만은 예외였다.
왜냐하면 미엘이 탑주인 로히카 세드로의 사촌이자 그 탑주가 이미 공언한 차기 탑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엘에겐 비공식적으로나마 이비를 문책할 권한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이비는 여기서 무릎을 꿇어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냥 재워 버릴까? 미엘 세드로, 리오 투하 둘 다.’
고민하던 이비는 조금 과격한 방법을 떠올렸다.
때론 단순한 게 제일이다. 마침 장소도 적당하니 이 성가신 애들을 아주 살짝만 질식시키면…….
“누가 왔네.”
그런데 그때 미엘이 돌연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댔다.
미엘은 그렇게 말하며 물러났고, 이비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깨달았다.
미엘의 말대로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단호한 발소리가 다소 빠르게 이어지더니, 이윽고 이들이 있는 소금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리오는 입을 막으며 비명을 삼켰고, 미엘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시온!”
예고도 없이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시온 라우렐 백작이었다.
이비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랄 겨를도 없이, 미엘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미엘이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그 친근한 말투에 이비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는 사이겠구나, 같은 대귀족이니까.’
이비는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려다가, 미엘의 얼굴을 보고 다시 깜짝 놀랐다.
백작을 바라보는 미엘의 뺨이 사랑스러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얘 설마 백작을 좋아하나?’
이비는 저도 모르게 의심했다. 아니, 확신했다.
미엘은 백작을 향해서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미엘과 달리 백작은 오늘도 과묵했다.
백작이 말없이 미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미엘도 백작에게 마주 달려갔다.
“오늘은 안 바쁜 거야? 그럼 이따 미엘이랑…….”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완전히 좁혀진 후 도로 멀어졌다. 백작이 자신을 향해 다가온 미엘을 그대로 지나친 탓이었다.
미엘은 놀라서 자신을 비껴간 백작을 돌아보았다.
백작도 곧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다름 아닌 이비 아리아테의 앞이었다.
백작이 이비를 내려다보았다. 이비도 놀란 토끼 눈으로 대뜸 자기 앞으로 온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의 표정은 오늘도 건조했다. 모든 게 무료하고 싫증이 난 사람 같았다.
백작은 그런 얼굴로 이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러곤 이비가 사양할 틈도 없이 그것을 이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얇은 예복 차림이던, 게다가 반쯤 젖어서 추위를 느끼던 이비는 낯선 체온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백작이 걸쳐 준 옷에는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냉랭한 외모와 달리 백작의 몸은 뜨거웠고, 그래서 이비는 그의 온도가 자신을 감싸는 것을 무섭도록 생생히 느끼고 말았다.
그건 시온 라우렐의 겉옷이 아니라 시온 라우렐 본인에게 안기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난감해진 이비는 그 겉옷을 끌어 내리려고 팔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백작이 이비의 어깨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이비는 코트를 벗기는커녕,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백작에게 반쯤 안겨 버리고 말았다.
이비가 놀라서 백작의 몸을 미는데, 백작의 어깨너머에서 미엘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쪽이 선약이야.”
미엘 세드로를 향한 백작의 대답과 태도는 단호했다.
잘라 내듯 말한 백작은 이비의 어깨를 안은 채 걸음을 뗐다. 덕분에 이비도 백작에게 등이 떠밀려 함께 걷게 되었다.
‘어어어?’
이비는 백작의 빠른 걸음에 이끌려 순식간에 미엘과 리오를 지나쳤다.
그러자 미엘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온!”
하지만 백작은 그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비가 코트에 파묻힌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리오는 바보처럼 놀란 얼굴이었고, 미엘은 이비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못 이기는 척, 백작을 따라가는 편을 택했다.
.
.
.
‘……날 죽일 셈인 거야.’
백작과 함께 복도를 걷던 이비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백작이 친히 찾아와 이비를 데려간 덕분에 미엘 세드로의 두 눈엔 서슬이 시퍼렇게 맺혔다. 이거 아무래도 두고두고 피곤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목소리 큰 리오 투하가 목격한 이상, 이 일은 티엔다의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질 게 뻔했다.
하루가 멀다고 구설에 오르는 성녀 후보라니. 지금 이비에겐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소금 창고는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설마 날 찾아온 건가?’
이비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잡은 백작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이해하기 힘든 게 몇 가지 있었다.
이비는 평소에도 그 소금 창고를 종종 이용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집사인 디에스뿐이다.
그런데 백작은 대체 거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게다가 백작은 그 창고에서 이비를 비롯한 정화자들에게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대체 무슨 일이냐,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같은 기본적인 상황 파악조차 없었다.
그저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와 이비를 낚아챘을 뿐이다.
이비는 이 모든 게 의아하고 의심스러웠지만, 백작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괜히 말을 섞어서 저주가 나오면 곤란하다.
그래서 지금 이비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백작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자 탑의 메인 홀로 이어지는 복도가 보였다.
그런데 백작이 거기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다시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 백작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출구가 도로 멀어지자 참다못한 이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백작은 이비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어느 문을 열고 이비를 밀어 넣었다.
백작이 이비를 끌어들인 곳은 가파른 벽돌이 나선으로 상승하는 계단실이었다.
요컨대 이곳은 소금 창고보다 더한 밀실이었고, 그래서 이비는 속으로 경악을 토했다.
‘성녀 후보가…… 밀회……?’
외간 남자와 이런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비에겐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당장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백작을 향해 급히 웃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렸네요. 백작님께 찬란한 아침의 가호가 함께하길. 옷 빌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돌려드릴게요. 그럼 백작님,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할게요.”
그러곤 백작에게 코트를 돌려주고 꾸벅 인사한 후 신속하게 돌아서서 계단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콰앙!
그런데 계단실의 문이 한 뼘 남짓 열린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도로 닫혔다.
이비의 뒤에서 뻗어 나와, 문을 단단히 짚은 커다란 손 때문이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어 이비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바로 등 뒤에서, 백작의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 선약인데 그냥 가면 씁니까.”
네, 씁니다.
이비 아리아테의 인생이,
요즘따라 유독 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