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래도 내가 안 어울려?
(8/129)
8화. 이래도 내가 안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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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이래도 내가 안 어울려?
2022.06.27.
이비 아리아테의 머리카락이 황홀한 물빛으로 물들었다.
그 놀라운 변화에 몇몇 귀족이 탄성을 터트렸다.
300년 전, 마냐냐 탑이 세워진 이래 무수히 많은 정화자가 마냐냐를 불렀다.
하지만 그중에서 마냐냐의 빛으로 자신을 물들였던 건 오직 초대 성녀뿐이었다.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신비를 다시 실현한 새로운 기적, 이비 아리아테는 눈을 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비의 음정을 따라 호수가 요동치고 바람이 일었다. 이비의 긴 예복과 땋아 내린 머리카락도 함께 율동했다.
이비의 음빛깔이 높아지자 호수 밑바닥에서부터 푸른 빛이 일어났다. 잠든 마냐냐가 이비의 소리에 공명하며 발하는 빛이었다.
일렁이던 호수의 표면은 이제 작은 태풍을 만난 것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지만, 이비의 노랫소리는 그마저도 꿰뚫으며 마냐냐를 깨웠다.
휘몰아치는 물결, 번지는 광휘, 아름다운 노랫소리, 그리고 가운데 선 신성한 소녀.
귀족들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숨을 참았다.
혹자는 이비 아리아테에게 무릎 꿇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이비는 그들에게 엎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비의 노래가 점점 빨라지며 고음으로 치달았다. 절정을 향해 달리는 이비를 따르듯 물보라도 더욱 거세졌다.
멸망을 피하고자 섭리를 어긴 이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고장 난 세계를 보완하기 위해 네 마리의 용이 있었지만, 이젠 그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나약한 인간 곁에는 전설만 남았다.
이비는 그것을 쓸쓸하게 여겼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 홀로 남은 우리가 정말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노래했다.
비록 완벽하지 않은 세계여도 어쨌든 살아가야 하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한없이 오르던 이비의 음색이 끝내 절정에 다다랐고, 그와 함께 마냐냐의 빛이 범람하며 세상을 뒤덮었다.
강한 빛이 쏟아지자 귀족들이 황급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주위가 밝아지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그와 함께 불어닥친 바람이 그들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체면도 버리고 몸을 웅크리며 충격을 피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후,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사위가 잠잠해진 것을 느낀 자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그러자 그들의 생경한 눈에 평화로운 호숫가의 풍경이 비쳤다.
빛은 이미 사그라졌고 물보라는 잦아든 지 오래였다. 푸르게 물들었던 이비 아리아테의 머리카락도 어느새 검게 돌아와 있었다.
모든 것이 정화식이 열리기 전과 같았지만,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염수로 채워져 탁했던 호수가 어느새 투명해져서 정오의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저 많은 물이 모두 정화되었다. 그걸 확인시켜 주려는 듯, 탑의 소년들이 다시 호숫물을 떠서 테라스로 올렸다.
하지만 귀족 중에 그 물맛을 확인하는 자는 없었다. 그 자체가 방금 목도한 기적에 대한 모욕 같아서, 귀족들은 그저 이비 아리아테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건 시온 라우렐도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이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냉랭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날것 그대로 피어 있었다.
마침 그때 이비가 고개를 돌려 테라스에 앉은 시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이 마주쳤지만, 시온은 이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비가 시온을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이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이래도 내가 성녀에 안 어울려?
.
.
.
정화식이 끝났다.
본래 정화식은 탑의 체면을 위해 고위 귀족들이 의례적으로 참석하는, 매우 단조롭고 형식적인 행사였다.
하지만 2년 전, 이비 아리아테가 등장하며 정화식은 40일을 기다려야 겨우 볼 수 있는, 그마저도 일반 귀족은 몇 개월 전부터 자리를 예약해야 참석할 수 있는 예식으로 변했다.
티엔다 귀족의 격은 이비의 정화식을 본 자와 못 본 자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이비 아리아테가 선사한 기적은 오늘도 역시 경이로웠다.
그래서 희열에 휩싸인 귀족들은 여운에 잠기거나 자기들끼리 횡설수설하거나 이 기적의 주체인 이비를 찾아 댔다.
하지만 정작 이비는 자신을 향한 갈채와 환호를 뒤로한 채, 아무도 없는 창고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죽겠다…….’
직전의 신성한 모습이 무색하게도, 이비는 쭈그렁 주저앉아 곡소리를 냈다. 마냐냐를 부르는 데 체력을 다 써 버린 탓이었다.
그래서 몹시 기진맥진했지만, 이비는 정화식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숨어야 했다. 덕분에 옷도 갈아입지 못해 몸은 반쯤 젖은 상태였다.
‘여기 있다가 좀 한산해지면 나가야지.’
이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놓인 거대한 결정에 등을 기댔다.
이비가 숨은 곳엔 수정처럼 보이는 광물이 가득했다. 이건 마냐냐의 가호로 걸러 낸 바다의 결정, 그러니까 소금이었다.
제대로 된 정화식이 열리면 탑에 이런 결정이 맺힌다. 이곳은 그 결정을 보관하는 탑의 창고였다.
정화식을 기껏 멋지게 해 놓고 이런 곳에 숨다니. 이비는 무릎에 이마를 대며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했다.
‘설마 귀마개가 날아갈 줄은…….’
원래 이비는 정화식이 끝나면 최대한 신속하게 귀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화식 때 잠시 빼 둔 귀마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몰아치는 바람에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정화식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은 창고에 숨어서 다들 속히 집에 가 주길 바라는 중이었다.
“훗.”
그런데 이비의 입에서 돌연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후후후…….”
이비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음산하게 웃었다.
백작이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그 거만하던 시온 라우렐도 정화식을 보더니 잔뜩 놀라서 이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이비는 그게 너무 통쾌해서 손발로 바닥까지 치며 기뻐했다.
‘이제 나한테 안 어울린다는 소린 못 하겠지.’
우쭐해진 이비가 흐흐 웃을 때였다. 창고 밖의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봤어요, 이비 아리아테가 이쪽으로 오는 걸요.”
그 바람에 두둥실 떠 있던 이비의 가슴이 도로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이비가 놀라서 숨을 죽이자 자박대는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자더니 도망이나 치고, 경박해도 정도가 있지……!”
이 목소리는 아까 이비와 실랑이를 벌인 정화자, 리오 투하의 것이었다. 그걸 알아챈 이비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아까 그것 때문에 날 찾는 거야?’
이비는 리오 투하의 고지식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중에 봐요, 나중에 얘기해요, 같은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붙는 사람은 남녀불문하고 무서운 법이다.
발소리가 창고의 문 앞까지 다가왔다. 이비는 황급히 창고 구석으로 몸을 숨겼고, 직후 덜그럭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다.
“창고?”
리오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더니 혀를 차며 신경질을 냈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사람은!”
다행히 저 고상한 영애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숨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이비는 그 편협한 상식에 안도하며 리오가 떠나길 기다렸다.
“나는 이비 아리아테가 이렇게 뻔뻔하게 넘어가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한 짓 좀 봐요. 아무리 신분 상승이 간절해도 그렇지, 어떻게 감히 백작님께……!”
하지만 리오 투하는 몸을 돌리는 대신 그 자리에서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열하게 관심을 구걸하는 사람과 같은 소속이라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요. 교양과 품위가 모자라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대체, 누가 비스 출신 아니랄까 봐!”
리오의 원색적인 비난에 이비는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정화자들 중에서 이비를 가장 미워하는 한 사람을 꼽으라면, 이비는 망설임 없이 저 리오 투하를 고를 것이다.
리오는 대대로 많은 성녀를 배출한 명문 투하 가의 차녀다.
게다가 친언니가 바로 이번 대의 성녀인 로블레 투하였다.
이렇듯 마냐냐 탑과 연이 깊은 리오에게는 꿈이 있었다.
언니의 뒤를 이어 성녀가 되는 것.
그래서 언니와 함께 나란히 이름을 남기는 것이 바로 이비 아리아테가 꼼꼼히 부숴 버린 리오 투하의 소중한 꿈이었다.
‘쟤는 오늘도 기운이 넘치는구나.’
이비는 씩씩대는 리오를 향해 조용히 혀를 찼다.
이비는 리오가 왜 자길 미워하는지 잘 알아서 저 발언에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리오 투하가 제풀에 지쳐 돌아가길 느긋이 기다릴 때였다.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리오의 것이 아닌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에 리오가 놀라서 불평을 멈췄고, 이비도 기겁하며 입을 막았다.
‘내가 있는 걸 눈치챈 거야?’
아무런 소리도 안 냈는데, 대체 어떻게?
이비가 영문도 모른 채 경악할 때였다.
“거기 누구 있어요?”
“네, 있어요!”
“이비 아리아테!?”
“네, 맞아요!”
참사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리오의 물음에 발랄하게 대답해 버린 이비는 비통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다급한 발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고, 이비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금 결정 뒤에서 나온 이비는 두 소녀와 마주했다.
한 명은 여태 떠들어 댄 리오 투하였고, 이비가 여기 있는 걸 알아챈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미엘 세드로였다.
‘하필 이 두 명이라니…….’
그들을 본 이비는 마음이 한층 더 우울해졌다.
그런 이비를 향해 리오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죠?”
“투하 양이 내 욕을 하는 걸 듣고 있었어요.”
이비는 지친 심정으로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방치했다.
그래서 리오의 표독하던 얼굴이 멍해졌다.
평소 이비는 얄미울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물론 리오는 그게 다 가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저 이비 아리아테가 이렇게 대드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리오는 예상치 못한 반박에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눈썹을 곤두세웠다.
“다, 당신! 이제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군요!”
리오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래도 험담하던 걸 들켜서 몹시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 무슨 욕을 했다는 거죠?”
“신분 상승을 위해 저열하게 관심을 구걸한다는 말이 욕이에요, 투하 양.”
“뭐라고요?”
“신분 상승을 위해 저열하게 관심을 구걸한다는 말이 욕이라고요, 투하 양.”
리오의 물음에 이비는 같은 대답을 두 번이나 해 버렸다.
그래서 싸우자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집사, 나 어떡해요!’
연이은 파탄에 이비는 마음으로 디에스를 찾았다.
묻는 말에 딱 다섯 번 대답했을 뿐인데 이 난장이 벌어지다니, 정말이지 뭐 이딴 괘씸한 저주가 다 있나 싶었다.
속이 터질 지경이지만 이비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칼춤은 이미 다 췄다.
이제 이비에게 남은 길은 이대로 동네 제일가는 미친 애가 되느냐, 아니면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 빠져나가느냐. 둘 중 하나였다.
물론 이비의 선택은 후자였다.
“……알고 있어요. 투하 양이 절 싫어하는 걸요.”
“지금 무슨 소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없잖아요.”
리오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비는 참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맺었다.
그러곤 리오 투하를 차갑게 노려봤다.
크게 상처받은 얼굴로, 무척이나 속상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