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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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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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
2022.06.23.
이비의 등장에 화기애애하던 성소가 고요해졌다.
먼저 있던 여섯 명의 정화자는 새로 온 한 명의 정화자를 데면데면하게 쳐다만 보았다.
노골적인 배척이었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성소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정화자, 리오 투하가 침묵을 깨며 이비에게 다가갔다.
“늦었네요, 아리아테 양. 일부러 이렇게 촉박하게 온 건 아니겠죠?”
리오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이비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그 미지근한 반응에 리오가 울컥해서 다시 따졌다.
“당신,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의 행실로 탑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몰라요?”
“……늦어서 죄송해요, 투하 양.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마저 이야기해요.”
리오의 매서운 추궁에도 이비는 여상히 웃는 낯이었다.
이비는 그 말을 남긴 채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향했고, 리오도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리오는 제 자리에서도 이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때 이비 아리아테, 저주에 걸려 모든 물음에 진실을 답해야 하는 불운한 소녀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이비는 리오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딱 맞는 귀마개가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정화식의 대책을 묻는 디에스에게 이비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곤 의아해하는 집사에게 며칠간 열심히 깎아 만든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게 뭐죠?
―재질은 코르크고 용도는 귀마개예요.
―이 잔머리는 대체…….
은근히 비하가 섞였지만, 이비는 디에스의 감탄에 기꺼이 으스댔다.
디에스가 자리를 비운 며칠간 이비는 열심히 생각했다. 이 저주를 안고 험난한 티엔다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이비에게 걸린 저주는 질문을 통해서만 발현되니 질문을 안 받으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온 라우렐과의 만남을 통해, 상대의 질문을 전부 예측하고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이비는 더 단순한 방법을 떠올렸다.
상대의 말을 아예 안 듣기로, 뭐라고 하는지는 표정이나 입 모양으로 적당히 때려 맞추기로.
누가 알면 정말 얕은 술수나 쓴다고 비웃겠지만 아무렴 어떠리.
애당초 이비는 부정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을 구원한 게 언제나 이 잔머리였음을 말이다.
‘정화식만 후딱 마치고 도망쳐야지.’
이비의 다짐에 호응하듯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정화자들이 대열을 갖췄다.
그때 가장 앞에 선 것은 이비였다.
동료들의 시선이 등을 찌르는 게 느껴졌지만, 이비는 즐겁게 받아들였다.
이 견제와 질투는 이비 아리아테가 여전히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라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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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다에는 ‘신의 수반’이라는 별명이 있다.
거대한 호수가 티엔다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높은 곳에서 보면 정말 물그릇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호수는 티엔다비스의 유일한 수원지였다.
그래서 티엔다비스의 모든 생명은 이 호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신의 수반이라는 것은 그런 경외와 감사를 담은 별칭이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봅니다. 오늘도 기대가 되네요.”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마냐냐 탑의 테라스에서,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카셀 몬트라. 대귀족인 몬트라 후작가의 주인이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제복 차림의 노부인, 바옌 공작도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정화식에 비하면 근래 것들은 확실히 볼만하지. 아, 백작은 이걸 처음 보겠군.”
바옌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금발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라우렐 대공과 함께 정화식에 참여한 시온 라우렐이었다.
노공작이 모처럼 친근히 말을 붙였건만, 시온 라우렐은 그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 거만함에 바옌 공작의 이마에 골이 팼다.
올해로 일흔인 바옌 공작은 마찬가지로 대귀족이며 은퇴 전엔 수만 명을 통솔하던 장군이었다.
그런 사람이 먼저 말을 붙이는데 저 금발의 라우렐은 아까부터 사람을 본 척도 안 하며 혼자 제왕처럼 굴고 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바옌 공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개탄했다.
“이비 아리아테가 아주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군!”
하지만 시온은 여전히 바옌 공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앉은 라우렐 대공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젊은 대공이 정색하자 노공작이 다시 빈정댔다.
“우연히 들었습니다. 지난 연회 때 이비 아리아테가 백작을 훈계했다지요?”
“누가 감히 라우렐을 훈계한다는 건가.”
라우렐 대공이 엄한 목소리로 바옌 공작을 질타했다. 그러자 바옌 공작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노골적인 불만에 대공이 다시 입을 열자, 지켜보던 몬트라 후작이 웃는 낯으로 끼어들었다.
“아이참. 고정들 하세요, 보는 눈도 많은데.”
후작이 탑 외벽에 설치된 다른 테라스를 눈짓했다.
거기에도 티엔다의 귀족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대귀족들이 앉은 이 특등석을 몰래 힐끔대는 자도 있었다.
몬트라 후작의 중재에 라우렐 대공과 바옌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온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한 채 홀로 환멸을 삼키고 있었다.
라우렐, 바옌, 몬테라. 모두 고귀한 대귀족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들의 성미는 싸구려 주점의 시정잡배와 다를 게 없었다.
시온은 이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그럼에도 그가 이 갑갑한 자리에 붙어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비 아리아테, 그의 해묵은 빚.
“아, 드디어 시작하나 봅니다.”
그때 요령 좋은 몬테라 후작이 호수 쪽을 가리키며 분위기를 풀었다.
말마따나 테라스보다 한층 아래 있는 단으로 정화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정화식이 열리는 단은 호수 바로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호수의 물결이 참방대며 단 위로 밀려 올라왔고, 그 때문인지 정화자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저기 보이네요, 우리 이비.”
몬테라 후작이 정화자들 중에서 이비를 발견하고 히죽댔다. 그러더니 친근한 척 시온에게 말했다.
“이비 아리아테의 진가는 정화식에서만 볼 수 있죠. 그걸 보면 아마 백작님 마음도 풀리실 거예요.”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모호하게 말한 티가 났다. 하지만 시온은 그 장단에 넘어가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정화자들이 단에 서자, 그 주변으로 잔을 든 소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잔으로 호숫물을 뜨더니 그것을 테라스마다 달린 바구니에 넣고 밧줄을 당겼다.
그러자 두레박처럼 바구니가 딸려 올라가며 테라스에 앉은 귀족들에게 호숫물이 든 잔이 전달되었다.
대귀족들이 앉은 자리에도 잔이 올라와, 몬테라 후작이 그걸 꺼내 라우렐 대공에게 건넸다.
아직 기분이 언짢은 대공은 마지못한 투로 그 잔에 담긴 탁한 물을 손끝으로 찍어 핥았다.
이어 바옌 공작과 몬테라 후작도 똑같이 행동했다.
“짜네요.”
“흠.”
호숫물을 맛본 바옌 공작과 몬테라 후작이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후작의 말대로 그 물은 짜고 썼다. 바다에서 퍼 올린 해수이기 때문이다.
“이걸 그대로 흘려 보내면 비스에 난리가 나겠어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꽤 죽어 나가겠지.”
“예전엔 종종 있었죠. 저 소금물을 제대로 정화하지 않아서 비스의 들판이 싹 다 말라 버린 일이.”
몬테라 후작이 가볍게 낄낄대며 난간에 턱을 괬다. 그러더니 이비를 보며 은근히 속삭였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지나치게 평탄하단 말이죠, 귀여운 이비 덕분에.”
후작의 경박함에 시온이 미간을 좁힐 때였다.
저 밑에서 미풍처럼 여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정화자들이 입을 열어 마냐냐를 부르는 소리였다.
정화식이 시작되자 귀족들은 잡담을 멈추고 소녀들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그런데 저들의 노래엔 가사가 없었다.
마냐냐의 울음소리를 흉내 낸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마냐냐는 저 호수 밑바닥에 잠든 용의 이름이다.
비구름보다 높은 곳에 있는 티엔다비스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게다가 허공에 놓인 탓에 물이 마르는 속도도 빨라, 그냥 두면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가물어 버릴 땅이었다.
섭리를 이탈한 대가로 결함을 떠안은 티엔다비스.
이 완벽하지 않은 세계를 위해, 신은 맑은 아침을 본떠 마냐냐를 만들었다.
아침을 다스리는 마냐냐,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내는 정화의 용.
그 아름다운 용은 신에게 받은 능력으로 탁한 바닷물을 맑은 담수로 바꿨다. 그리고 그것을 땅으로 흘려 보내 목마름을 달래 주었다.
자애로운 마냐냐는 그렇게 티엔다비스를 다스렸지만, 다른 용들의 가호가 그러하듯 그의 정화 역시 300년 전에 끊기고 말았다.
반역의 용 노체와의 전쟁에서 힘을 다 써 버린 마냐냐가 깊은 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마냐냐는 잠들기 직전, 가련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힘을 빌려 주기로 약속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해 깊이 잠든 마냐냐와 공명할 것.
그렇게 노래를 통해 정화의 가호를 빌려 오는 자들이 바로 마냐냐 탑의 정화자였다.
잔잔한 호수 위로 정화자들의 맑은 목소리가 번졌다.
그리고 시온은 그 노래가 참 단조롭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인가?’
이비 아리아테의 진가를 볼 거라더니, 지금 저 광경은 시온이 소년 시절에 본 정화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우아하게 꾸민 영애들이 노래할 뿐인, 볼거리로 썩 나쁘지 않지만 그게 전부인.
그래서 시온은 미심쩍은 기분으로 이비를 쳐다봤다가 뜻밖의 모습을 발견했다.
호수를 향해 선 이비는 아직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미 노래를 시작한 다른 정화자들과 달리 그는 노래하지 않고 그저 호수를 바라만 보았다.
무언가를 찾듯, 혹은 바라듯.
그러길 한참, 노래하던 정화자들이 호흡을 고를 때 이비 아리아테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동시에 소름 끼칠 만큼 맑은 목소리가 다른 정화자들의 노래를 꿰뚫었다.
그 순간 시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깊고도 깨끗한, 인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운 음색이 시온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사로잡힌 것은 비단 시온만이 아니었다.
이비의 정화식을 이미 몇 번이나 본 다른 귀족들도 꼼짝없이 매료되어 넋을 놓았다.
이비를 싫어하는 라우렐 대공마저도 의자의 팔걸이를 꽉 쥔 채 전율을 참고 있었다.
그렇게 단 한 소절로 귀족들을 사로잡은 이비는, 잔잔하고도 탁한 호수를 향해 노래를 퍼트렸다.
이비가 노래하자 다른 정화자들도 이비를 따라 음색을 더했다. 하지만 이비의 목소리는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더 두드러졌다.
정화자들의 노래는 이비를 위한 것이었고, 이비는 그 소리를 모아 자신의 노래로 만들었다.
마냐냐의 울음을 흉내 낸 애달픈 목소리에 호수의 표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감지한 이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비의 음색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호수가 크게 물결쳤다.
그와 함께 이비 아리아테의 검은 머리카락은 황홀한 물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