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성녀가 되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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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성녀가 되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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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성녀가 되려는 이유
2022.06.16.
“자, 다 됐어.”
점성술사의 말에, 어린 이비는 나른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곤 말끔한 눈앞을 보고 큰 소리로 감탄했다.
“앞이 잘 보여!”
이비는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뒤로 땋은 머리가 함께 흔들렸다.
항상 눈을 찌르던 앞머리가 사라지고 부스스하던 산발이 정리되었다. 이비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자기 머리끝을 보려고 애를 썼다.
뒤에 앉은 점성술사는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이것도 있어.”
그건 푸른색 리본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좋은 물건 같아 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사이 점성술사는 그것으로 이비의 머리를 장식해 주었다.
머리에 리본이 달리자, 이비는 어색한 듯 그것을 더듬대며 중얼댔다.
“난 이런 거 안 어울려요.”
“예쁜데?”
“어차피 금방 뺏길 건데 무슨 소용이에요. 여기 사는 나쁜 놈들은 돈 되는 건 다 자기 거라고 한다고요.”
이비는 예쁘다는 말에 괜히 거칠게 대꾸했다. 그러곤 머리에서 리본을 단호히 떼어 냈다.
하지만 미련이 남는지, 그걸 점성술사에게 돌려주지는 않고 만지작댔다.
그 파란 리본은 촉감이 좋고 색깔도 예뻤다. 그런데 이비의 손에 닿자 금세 때가 타 버렸다.
리본이 더러워지자 이비는 깜짝 놀라 그것을 떨어트렸다가, 이내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이런 건요, 저기 티엔다에서 사는 애들한테나 어울리는 거라고요. 손에 흙 묻을 일 없는 귀족들이요.”
이비가 이렇게 말할 때 점성술사는 잠잠히 웃고만 있었다.
그 침묵에 안심한 이비는 뒤에 앉은 점성술사의 다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러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점성술사의 턱과 하늘을 가린 티엔다의 밑면이 함께 보였다.
좋아하는 것들이 한눈에 보이자 이비는 씩 웃었다. 그러곤 무릎에 떨어진 리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도 이거 내가 가질래요. 나는 나중에 티엔다로 갈 거니까 거기서 쓰게요. 그때는 분명 잘 어울릴 거예요!”
.
.
.
그렇게 장담한 지 어언 8년, 그리고 시온 라우렐 백작이 이비의 저택에 방문한 지는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은 이비가 자숙을 핑계로 외출을 금한 시간이자, 이 넓고도 좁은 티엔다에 소문이 구석구석 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으쌰.”
상자를 들고 서재로 들어온 이비는 그것을 책상 위 은쟁반에 그대로 엎었다.
그러자 상자에서 종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그 손바닥만 한 종이는 티엔다 곳곳에서 일하는 익명의 조력자들이 매일 남기는 간단한 현황보고였다.
이비는 자신의 평판을 알기 위해 정기적으로 쪽지를 수거하고 확인했다.
‘그럼 한번 볼까……?’
매주 하는 일이지만, 이비는 평소보다 긴장한 얼굴로 쪽지를 펼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주에 들어온 이비의 이야기는 대부분 라우렐 성에서 열린 연회와 연관이 있었다.
―이비 아리아테가 그렇게 대드는 건 처음 봤다, 대단히 뜻밖이라는 놀람 다수.
―위아래조차 모르는 자를 성녀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 상당.
―대귀족에게 덤빈 이비 아리아테의 용기가 가상하다는 찬사 한 번 들어 봄.
―라우렐 백작이 이비 아리아테를 쳐다본 이유를 다들 궁금해함.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쪽지를 열어본 이비는 의외로 온건한 반응에 눈을 깜빡였다.
예상대로 삼삼오오 모인 귀족들은 이비와 백작의 이야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대귀족에게 덤빈 이비 아리아테를 돌로 쳐야 한다는 여론은 아직 없었다. 몇몇 부정적인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여느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비는 반신반의하며 쪽지를 더 확인했고, 그럴수록 확실해졌다.
이비가 필사적으로 높인 위상은 한 번의 폭주로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그 온순한 이비 아리아테가 왜 저렇게 덤벼들었을까?’라며 의아해하는 모양새였다.
‘아, 다행이다, 진짜…….’
그걸 확인한 이비는 가슴을 크게 쓸어내렸다.
이것 때문에 지난 사흘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밤마다 저 나락으로 되돌아가는 꿈을 꿔서 잠도 계속 설쳤다.
그런데 귀족계의 반응은 생각보다 평이했고, 이비는 그 사실에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겨우 한시름 놓은 이비는 뒤늦게 촛불을 켰다. 그러곤 확인한 쪽지를 태우며 나머지 것들을 마저 펼쳐보았다.
―이건 라우렐 대공을 향한 이비 아리아테의 반격이라는 누군가의 농담. 바보인 듯.
―라우렐 백작도 이비 아리아테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의견 다수.
―꽤 심각한 사안인데 라우렐이 의외로 조용하다는 의문 종종.
이비는 라우렐의 이름이 연이어 적힌 쪽지를 보며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라우렐 대공은 왜 아직도 조용하지? 노발대발하면서 날 가두라고 해야 정상인데.’
사실 이비는 연회장에서 저지른 사고 때문에 탑에 갇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티엔다의 고위 귀족들이 이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이기 때문이다.
만약 티엔다의 다른 평민, 그러니까 하인이나 상인으로 일하는 자가 이비처럼 라우렐 백작을 모욕했다면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최악의 경우 처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비는 달랐다. 마냐냐 탑에 속한 이비는 탑주에게만 처분받기 때문에 그 라우렐 대공조차도 직접 손댈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대공이 탑주에게 난리를 쳐야 정상인데, 어째 이쪽도 묘하게 감감무소식이다.
‘설마 백작이 중재한 건가?’
이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흘 전, 라우렐 백작이 던지고 간 제안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제부터 당신을 보살필 예정입니다. 최대한 성의껏.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십시오.
그 백작님은 놀랍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덕분에 이비는 백작이 건넨 잔이 축배인지 독배인지를 밤낮으로 고민해야 했다.
만약 저 말이 진짜면 백작이 이비를 처벌하려는 형을 말렸을 수도 있다.
물론 가짜여도 그럴 수 있다. 알고 보니 대공과 백작은 한패여서, 이 미천한 평민이 감히 성녀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고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중일 수도 있다.
온갖 추측과 의심이 머릿속을 떠돌자, 이비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진즉에 내린 결론을 되뇌었다.
‘진짜든 함정이든 상관없어. 어차피 거절할 거니까.’
이비는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다.
성녀를 포기하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백작이 후견인이 아니라 발닦개를 자처해도 마찬가지다.
이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녀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백작의 제안은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절하는 부담만 얹어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네.’
백작이 대답을 듣겠다고 한 날. 동시에 내일은 마냐냐 탑에서 정화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다음날이 걱정스러워, 이비는 지친 심정으로 손에 든 쪽지를 태웠다.
하지만 다음 쪽지도 이비를 피곤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온 라우렐과 이비 아리아테가 이미 아는 사이라는 추측 다수에게 호응.
―둘 다 초면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분명 비스에서 만났던 거다, 라고 침 튀기며 말하는 귀족 놈의 앞니를 깨 버리고 싶다.
―두 사람이 연인관계이거나, 연회장에서의 일은 치정 싸움일 거라는 의심 소소.
―시온 라우렐이 이비 아리아테의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문도 있어 의심 확산.
‘연인이라니 대체 누가…….’
이비는 기가 막혀서 실없이 웃었다.
그래, 이런 말도 나올 줄 알았다. 질철질척하니 가장 재밌는 얘기니까. 하지만 설마 비스에서 만났다는 과거사까지 알차게 만들어 낼 줄이야.
이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대다가, 다음 쪽지를 보고 웃음을 뚝 그쳤다.
―이비 아리아테는 시온 라우렐에게 안 어울린다는 몇몇 영애의 격양된 주장.
이 역시 그냥 웃어넘길 내용이지만, 하필 그 쪽지에 쓰인 특정 표현이 백작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안 어울립니다. 당신에게 성녀는, 전혀.
사흘 전, 백작은 더없이 무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논하듯이.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이비는 기분이 꽤 나빴었다.
‘나도 알아, 안 어울리는 거.’
이비는 백작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물었다.
백작의 말이 맞다. 이비는 가장 유력한 성녀 후보지만, 그건 사람들이 바라는 성녀의 모습을 연기해서 얻어 낸 것뿐이다.
정작 이비의 천성이나 진심은 성녀라는 고결한 허상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지난 2년간 아등바등 몸부림쳤는데, 그런 이비에게 백작은 참으로 무신경하게 말했다.
―고생이 지긋지긋하다면 성녀보다 내 피후견인으로 지내는 편이 나을 겁니다.
라고.
‘웃기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비는 백작의 오만에 헛웃음을 머금었다.
백작은 자신이 대단한 시혜를 베푼다고 믿는 모양인데, 그건 정말 크나큰 착각이다.
백작이 성녀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준다는 것은 이비도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는 것들이다.
스무 살이 된 이비는 이미 몇 명의 귀족 영식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중엔 이비의 인기나 능력에 눈독 들이는 한심한 녀석도 있고, 이비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건실한 청년도 있다.
그들에게 왼손 약지만 내밀면 이비도 귀족 가문에 편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그러지 않았다. 성녀가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었다.
5년 전, 비스의 보육원에서 지내던 이비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탑주의 눈에 들어 티엔다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비가 티엔다의 사교계에 첫발을 들인 건 2년 전, 열여덟 살 때였다.
그 사이 3년간 이비가 머문 곳은 티엔다 어딘가의 안락한 저택이 아니라 마냐냐 탑의 깊은 지하였다.
티엔다엔 낙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이비가 도착한 그곳은 그간 거쳐온 빈민가나 보육원보다 더 끔찍한 나락이었다.
하지만 발을 잘못 들인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이비는 탑의 지하에 갇혔고, 그곳에서 티엔다의 귀족들을 위해 노예처럼 굴러야 했다.
어두운 빈민가와 감옥 같은 보육원에서 벗어나려다가 오히려 더 지옥 같은 지하에 처박힌 셈이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주저앉지 않았다.
어릴 적 외친대로 어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갈망했고, 그래서 가진 전부를 걸었다.
―성녀가 되겠다고?
―재미있네. 좋아요, 해 봐요. 성공하면 소원대로 놓아줄게요.
―대신 실패하면, 너는 평생 이 밑바닥에서 사는 거야. 저 너덜너덜한 개와 함께.
그곳에서 탑주는 이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아이가 당차게 내기를 걸어오는 모습이 깜찍하고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탑주에게 그것은 장난 같은 변덕이지만 이비에겐 생애 유일한 기회였다.
성녀가 되는 건 이비에게 그런 의미였다.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비만의 언어였다.
‘됐어, 그만 생각해.’
이비는 자신의 양 뺨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그러곤 무거운 기분을 떨치고 다시 씩씩하게 쪽지를 펼쳤다.
―이비 아리아테가 백작에게 대놓고 꼬리치더라, 교양 없긴, 누가 비스 출신 아니랄까 봐! 라며 열등감을 표출하는 영애 한 명.
“훗.”
이비는 그 쪽지를 보자마자 불살랐다. 그러고도 모자라 쟁반에 남아 있던 쪽지까지 화르륵 태웠다.
아하하, 다 타 버려라!
세상의 추악함에 격분한 성녀 후보 이비 아리아테는 결국 쟁반에다 방화를 저질렀다.
그로써 모닥불이 일어나자, 문가에서 예상치 못한 핀잔이 들려왔다.
“그 나이 먹고 불장난이라니요.”
피로가 가득한 목소리에 이비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왔는지 검은 코트 차림의 디에스가 문가에 서 있었다.
“아, 왔어요?”
이비는 책상의 불을 끄기 위해 양손을 파닥댔다. 물론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그 가상한 노력에 디에스가 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은쟁반과 짝을 이루는 뚜껑으로 활활 타오르는 쟁반을 덮어 주었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탄내가 진동하자, 이비는 머쓱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조사는 어땠어요? 뭐 알아낸 거 있어요?”
디에스는 이비의 저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지난 사흘간 저택을 비웠다.
그래서 이비는 기대에 찬 눈으로 디에스를 바라보았고, 유능한 집사는 제법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상당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저주를 건 자를 추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