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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교에 서툰 백작님 (4/129)


4화. 사교에 서툰 백작님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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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른 시간에 취했다니, 하인들이 샴페인을 얼마나 날랐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나?”

백작의 혼잣말은 단조로웠다.

그래서 이비는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입으로는 느긋하게 읊조리며, 눈으로는 저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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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확인이 되면 좋겠지만, 하인들이 잔을 건넨 상대를 과연 다 기억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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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겁니다. 아직 초저녁이었으니까.”

이비가 애써 반박했지만, 역시 백작의 반응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무릎에 얹어 둔 손을 몰래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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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고 늘어지러 온 건가?’

그럴만하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그렇게 구겼으니, 밤새 이를 갈다가 날이 밝자마자 달려온 모양이다.

이비는 백작의 악의를 확신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이어질 수모를 견디기 위해 몸을 더 낮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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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사자가 그렇다면 믿어야겠죠.”

백작이 돌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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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해서 따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교에 서툴 뿐.”

어제 일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투였다.

긴장하던 이비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백작이 느긋하게 찻잔을 드는 모습에 그만 얼이 빠졌다.

사교에 서툴다고? 아니, 그 반대였다. 백작은 아주 능숙하게 사람을 농락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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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라뇨, 충분히 할 만한 이야기였어요. 백작님께는 그저 죄송할 따름인걸요. 어제 일은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백작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게 여실히 느꼈지만, 이비는 재차 조아렸다. 자존심이 아파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전날 일을 매듭짓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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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가 아니면 됐습니다. 그 일은 사고로 여길 테니 본론으로 넘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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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이라면…… 다른 용무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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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백작은 이비의 사과를 선뜻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다시 운을 띄웠고, 덕분에 이비의 머릿속은 또 바빠졌다.

본론이라니. 무슨 본론이 있지?

시온 라우렐이 이비 아리아테의 집까지 찾아올 만한 용무.

딱히 짚이는 게 없다. 굳이 억지로 짜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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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첫눈에 반해서?’

디에스가 비웃던 첫 번째 가설이 급부상했다.

그건 이비도 반쯤 농담이었는데, 이비는 새로운 전개에 반신반의하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너무 낙관적인 해석 같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비는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 특히 어제는 정말 예쁘게 꾸미기도 했다.

게다가 백작의 이 반응. 조금 갈구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어제 일을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이비가 저지른 무례에 비하면 대단히 관대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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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호감이지!’

계산도 태세전환도 빠른 이비는 이번에도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꿨다. 그러곤 언제 긴장했냐는 듯 앙증맞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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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 용무가, 어제 저를 쳐다…….”

보신 것과 연관이 있나요? 이비는 이렇게 물으려 했다. 그런데 백작이 복수하듯 그 말을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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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당신을 쳐다본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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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에 서툰 변태라서?”

이비의 대답에 잔인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침묵에 동참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아주 달랐다.

백작은 가늘어진 눈으로 이비를 노려봤고, 반대로 이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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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영혼으로만 고성의 비명을 질렀다.

변태라니, 백작님께 변태라니!

공황이 온 이비는 몰아치는 혼돈 속에서 차라리 웃어 볼까 생각했다. 여기서 바보처럼 웃으면 귀엽게 봐 주지 않을까? 아니다, 차라리 혀를 깨물자. 장렬히 전사해 명예라도 지키자.

이비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다가 자신을 쏘아보는 백작에게 급히 사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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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죄송합니다, 제가 가끔 말이 헛나올 때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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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치곤 지나치게 구체적인 감이.”

백작의 질책에 이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망할 저주, 이 망할 저주.

이비가 서럽게 침묵하자 백작은 옅은 한숨을 뱉어 냈다. 그러더니 실랑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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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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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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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가 찾는 사람인지 확인한 겁니다. 이비 아리아테.”

백작은 착오 따위 없다는 듯 이비를 호명했다. 그러곤 눈이 동그래진, 아무것도 모르는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앉은 이비 아리아테는 마치 인형 같았다.

직선으로 흐르는 머리카락과 작고 갸름한 얼굴, 검게 빛나는 눈동자. 반짝이는 실크 블라우스에 연보랏빛 스커트. 그 위로 드러난 여린 어깨선.

백작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이비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서, 차분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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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지켜 달란 부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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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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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부터 당신을 보살필 예정입니다. 최대한 성의껏.”

백작은 성의껏이란 말이 참 무성의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설명도 심히 불친절했다.

그로써 이비가 혼란에 빠지자 백작이 뒤늦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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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는 삶을 보장하겠습니다. 혼자이길 원한다면 혼자인 채로, 귀족이 되고 싶다면 입양으로든 결혼으로든 희망하는 가문에 주선하겠습니다. 그 후로도 필요한 건 모두 지원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최대한 성의껏.”

백작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조로웠지만, 그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는 소리다.

마치 여동생이나 딸에게 하듯 앞날을 책임져 주겠다는 말이다.

이 지나친 제안에 이비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못하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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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무 과분한 이야기인데 저한테 왜 그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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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이 있습니다. 당신을 부탁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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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이비는 정말 몰라서 물었다.

아까 얘길 듣고 계속 생각했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이비를 지켜 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

동시에 백작에게 빚을 지울 만한 사람.

이비의 지난 인생에 그토록 친근하고 유능한 인물은 단연코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물어본 것뿐인데 백작의 시선이 다시 가늘어졌다.

백작은 언짢은 걸 참는 기색으로 이비를 바라보더니 이내 묘한 말로 대답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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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면 굳이 알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아는 걸 원하지도 않을 테고.”

부탁을 받았는데 누구 부탁인지는 굳이 알 필요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혹시 자신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나 의심했다.

천애 고아인 줄 알았는데 사실 엄청난 부모가 있어서 뒤늦게 나를.

이 역시 너무 형편 좋은 해석이다. 그럼에도 이비는 내심 혹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백작의 말이 사실이면 이비의 앞날은 분명 장밋빛이다.

어제 연회장에서 저지른 잘못이 무마되는 건 당연하고, 휘청 흔들린 이비의 입지도 오히려 단단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비의 성녀 발탁을 반대하는 라우렐 대공이 동생 때문에 마음을 돌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성녀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 이 짜증 나는 저주도 더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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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이비는 실없이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앙 물었다.

그러자 이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백작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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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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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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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십시오.”

그 순간 이비의 넘실대던 기쁨이 뚝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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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를요?”

이비의 반문에 백작이 끄덕였다. 그래서 잠시 들떴던 이비의 마음은 도로 제자리를 찾았다.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라니, 왜 그런 조건이 필요하지?

이비는 의구심을 숨기며 백작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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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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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성녀가 되려는 이유는 뭡니까?”

그런데 버릇없는 백작이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쳐 버렸다. 그래서 이비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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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어려운 사람이라는 건 그러니까,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게, 성녀의 역할이니까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토해 낸 이비는 놀라서 급히 둘러댔다. 그러곤 백작이 자신의 본심을 못 알아들었기를, 설령 들었어도 대충 넘어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백작은 눈치도 없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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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을 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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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고생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아무리 지긋지긋해도, 모두에게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야겠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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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두가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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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모르죠.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질문이 이어지자 혀끝에서 저주가 춤을 췄다. 덕분에 이비는 말할수록 토하고 싶었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어느 정도 감당이 될 줄 알았는데, 이비의 저주는 생각보다 더 극악했다.

횡설수설하다가 밑천을 드러낸 이비는 자괴감을 삼키며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백작은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저 비스듬한 시선으로 이비를 주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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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이 지긋지긋하다면 성녀보다 내 피후견인으로 지내는 편이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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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백작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이비는 숙연한 얼굴로 욕을 삼켰다.

사교에 서툴다던 백작은 이비의 진심을 용케 알아들었다.

이 수습할 도리 없는 난장판에 이비는 고개를 떨궜고, 백작은 그제야 자신의 이유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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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녀 자리를 포기하라고 한 이유는 첫째, 성녀로 탑에 소속되면 간섭하기가 성가시고, 둘째, 성녀는 정기적으로 비스에 내려가야 하니 지키기 성가시고, 셋째, 전례 없는 평민 성녀가 어떤 위협을 당할지 모르니 이 역시 보호하는 데 성가시기 때문입니다.”

허튼소리를 늘어놓은 이비와 달리 백작의 이유는 명료했다.

그로써 성가시다는 말을 세 번이나 들은 이비는 다 타 버린 얼굴로 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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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넷째, 무엇보다 안 어울립니다. 당신에게 성녀는, 전혀.”

시온 라우렐 백작은 그의 말대로 사교에 서툰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상대의 억장을 이토록 효과적으로 무너트릴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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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대답은 나흘 후 듣겠습니다.

백작은 이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비 아리아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게 웃기만 했다.

백작이 라우렐 성으로 돌아온 건 정오가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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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거야? 옷까지 그렇게 차려입고.”

메인 홀로 들어서자 계단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백작과 닮은 흑발의 남자가 난간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이복형인 라우렐 대공이었다.

백작은 형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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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들었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대공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러곤 오히려 동생의 일에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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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항의서를 보낼 거야. 너를 모독한 이비 아리아테가 더는 나다니지 못하게 근신 처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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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

그런데 돌연 백작, 시온이 그 말을 막았다.

동생의 단호한 목소리에 대공은 놀라서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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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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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건드리지 마.”

시온은 알아듣지 못하는 형에게 재차 경고했다. 그러곤 그를 냉정히 지나쳤다.

당황한 대공이 뒤늦게 시온을 불렀지만, 시온은 이번에도 무시했다.

시온 라우렐은 티엔다의 모든 게 싫었다. 그래서 절대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억지로 돌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비 아리아테. 어쨌든 갚아야 할 빚.

차가운 얼굴로 복도를 가로지르던 시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미루고 미루다가 만난 이비 아리아테는 생각보다 바보였다.

연회장에선 가식을 떠는가 싶더니 돌연 버르장머리 운운하며 난장을 치지 않나, 해명한답시고 남의 말을 일일이 끊어먹질 않나, 대뜸 변태라며 매도하질 않나. 그래 놓고 실수라며 허둥대기나 하고.

시온은 그런 애가 이 험난한 티엔다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굳이 알 필요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빚만 갚으면 끝이다.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끝의 거스러미 같은 이비 아리아테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시온 라우렐에겐 큰 빚이 있다.

그리고 돌고 도는 그 빚은, 반드시 이비 아리아테에게 갚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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