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확실히 이상한 놈 (3/129)


3화. 확실히 이상한 놈
2022.06.09.


백작의 시선이 매섭게 이비를 향했다.

그래서 이비는 아무 죄 없이 죄인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16584001145843.png

‘내가 뭘 어쨌다고……?’

이비는 갑작스러운 눈총에 당황하며 생각했다.

오늘 처음 뵌 백작님께서 나를 마구 노려보시는 이유.

16584001145843.png

‘라우렐 대공의 동생이라서?’

당장 생각나는 건 이거 하나였다.

이비가 백작에 대해 알 듯, 백작도 이비에 대해 알 것이다.

이비는 그간 유례가 없던 평민 출신 성녀 후보고, 보수적인 라우렐 대공은 그런 이비의 성녀 발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이비와 라우렐 대공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이비는 반신반의하며 백작을 마주 보았다. 설마 이름 높은 영웅께옵서 그런 이유로 유치한 시비를 거는 건가 싶었다.

16584001145843.png

‘눈인사라도 해 보자.’

고민하던 이비는 귀여운 얼굴로 백작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백작은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이비를 쏘아보았다.

16584001145843.png

‘아, 뭐 하자는 거지?’

이비는 억지로 웃으며 난감함을 삼켰다.

그 와중에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 이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백작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이비를 발견했고, 곧 호들갑을 삼키며 속닥거렸다.

그래서 가련한 이비는 속을 한숨을 토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다간 이상한 오해를 사게 생겼다.

이비는 하는 수 없이 당황을 숨기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말아쥐며 백작에게 다가갔다.

귀족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길을 터 주었다. 그로써 백작과 순조롭게 마주한 이비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16584001145843.png

“처음 뵙습니다, 백작님. 마냐냐 탑의 이비 아리아테라고 합니다.”

계속 쳐다보셔서 왔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이제 말씀하세요.

이비는 대충 이런 심정으로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그 후로 이어진 것은 무거운 정적이었다.

이비를 무섭게 노려보던 백작은 이비의 인사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푸념했다.

16584001145843.png

‘도련님이 버르장머리가 없네, 인사도 할 줄 모르고.’

누가 봐도 민망한 상황이지만 이비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잔뜩 있었다. 이비가 사교계에 첫발을 들였을 때, 이런 식으로 무안 주던 철없는 귀족들이. 그때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이비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을 즈려밟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백작은 무표정하게 이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의도 예의도 없는 태도였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상냥하게 웃었다.

16584001145843.png

“백작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제가 마음이 앞서서 착각한 모양이네요. 부디 용서하세요, 백작님.”

이비가 다시 몸을 낮추자 백작을 제외한 귀족들의 입가가 흡족해졌다.

저게 바로 티엔다 사교계가 이비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전혀 하층민답지 않은 예법, 어떤 상황이든 부드럽게 포장하는 처신, 윗사람을 높일 줄 아는 저 공손함.

게다가 신의 가호를 크게 받아 쓸모도 가득하니 이비는 곁에 두고 관상하기 좋은 정말 어여쁜 평민이었다.

귀족들은 이비의 그런 면모에 새삼 만족했고, 이비는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16584001145843.png

“그래도 이렇게나마 인사드릴 수 있어서 무척 기쁘고, 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실은 백작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만나 뵙기를 늘 기다렸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순진한 눈으로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두 가지 상황을 예상했다.

하나는 백작이 이비를 끝내 무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비의 할 말이 궁금해진 백작이 마지못해 되묻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이비는 아주 예쁘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기다리는데, 백작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16584001145876.png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백작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동시에 딱 예상한 만큼 건조하기도 했다.

호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목소리였지만, 이비는 백작의 목소리를 들은 것에 만족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곤 아주 해맑게 말했다.

16584001145843.png

“생긴 대로 버르장머리가 없으시네요!”

저주의 시작이었다.

.
.
.


16584001145843.png

“원래 하려던 말은 ‘티엔다비스를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이 계시기에 세상은 오늘도 평화로워요, 백작님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이었어요.”

회상을 마친 이비가 회한 가득한 눈으로 중얼댔다.

그건 꽤 괜찮은 설계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티엔다비스의 영웅에게 감사를 표하다니, 은근슬쩍 성녀 행세를 할 기회였다.

그런데 갑자기 시작된 저주가 이비의 본성을 까발리며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덕분에 이비는 백작을 세 번이나 욕하고 횡설수설하다가 연회장에서 도주했다. 그러곤 다 망했다는 생각에 밤새 울었다.

그 와중에 이비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어떻게든 성녀가 되어야 한다는 집념 때문이었다.

이로써 자초지종을 알게 된 디에스가 무감한 얼굴로 끄덕였다.

16584001163644.png

“여러모로 공교롭군요. 저주가 시작된 시점도, 그 상대도.”

16584001145843.png

“가장 공교로운 건 그 백작님의 불가사의한 성품이고요.”

16584001163644.png

“확실히 이상한 놈 같기는 합니다. 대체 왜 그런 거죠?”

16584001145843.png

“여기엔 세 가지 가설이 있어요.”

디에스의 물음에 이비가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똑 부러지는 얼굴로 말했다.

16584001145843.png

“우선 첫 번째, 나한테 반했다.”

16584001163644.png

“저런.”

16584001145843.png

“들어 봐요, 사람한테 눈을 못 떼는 건 보통 사랑에 빠졌을 때 하는 행동이잖아요.”

16584001163644.png

“험하게 노려봤다면서요. 인사는 무시하고.”

16584001145843.png

“부끄러워서 그랬겠죠.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라서요.”

이비의 뻔뻔한 주장에 디에스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지만 이비는 굴하지 않고 다음 가설을 꺼냈다.

16584001145843.png

“그리고 두 번째, 나한테 악의가 있다.”

16584001163644.png

“중간이 없네요.”

16584001145843.png

“어중간한 사람이 그러겠어요?”

16584001163644.png

“아뇨, 백작 얘기가 아니라…….”

16584001145843.png

“하여튼, 내가 너무 싫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그 대공님의 동생이니까요.”

호감이 아니라 비호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비는 당당했다. 모든 가능성을 공평하게 열어 두겠다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디에스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16584001163644.png

“그럼 마지막은요?”

16584001145843.png

“마지막 세 번째는, 시온 라우렐이 이 저주와 연관이 있다.”

침착하게 듣던 디에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하지만 이비는 여상히 진지했다.

16584001145843.png

“나는 만약에 누굴 저주했으면 그 상대를 지켜볼 것 같아요. 결과를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어제 백작은 날 집요하게 쳐다봤고, 하필 그때 저주가 시작됐고, 덕분에 나는 굉장히 곤란해졌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수상하지 않아요?”

16584001163644.png

“일리는 있습니다만, 고작 이비 님을 저주하려고 라우렐 백작이 나설 것 같진 않습니다.”

‘고작’ 이비는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나는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차분히 덧붙였다.

16584001163644.png

“그리고 백작이 범인이면 우리가 더 곤란합니다.”

16584001145843.png

“왜요?”

16584001163644.png

“노체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두 가지뿐이니까요. 저주의 매개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저주를 건 사람이 죽거나. 그리고 라우렐 가를 수색하거나 백작을 암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16584001145843.png

“……그럼 세 번째는 취소할까요?”

손익 계산이 분명한 이비는 이번에도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러곤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84001145843.png

“그럼 라우렐 백작은 범인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이 저주를 풀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16584001163644.png

“우선 밤의 일족을 찾아서 저주의 식(式)이 언제 어디서 열렸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이걸 알아보는 데만 사흘 정도 걸리고, 그 이후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겁니다.”

디에스는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면서도 확답은 주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는 가 봐야 안다는 소리였다.

앞날이 막막했지만, 이비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디에스가 저주에 대해 잘 알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84001145843.png

“알겠어요. 그럼 저주에 대한 건 맡길게요. 아, 그리고 이것도요.”

이비가 테이블에 놓인 편지를 내밀었다.

16584001145843.png

“라우렐 백작에게 보낼 편지예요. 당장 만나긴 어려우니까 사과 편지부터 썼어요.”

16584001163644.png

“사과하려면 해명이 필요할 텐데요.”

16584001145843.png

“대충 썼어요. 술이 좀 과했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비는 자괴감을 삼키기 위해 애써 웃었다.

이건 내가 술주정뱅이라고 자백하는 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렴 저주를 들키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저주를 들키고 이 뿌리 깊은 가식까지 파헤쳐지면 위선자에 기만자에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비는 결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16584001145843.png

“최대한 잘 포장해서 썼으니까 라우렐 성으로 보내 주세요. 그다음 어떻게 할지는 더 생각해 볼게요.”

이비는 반드시 성녀가 되어야 했고, 이비와 운명을 같이하는 디에스도 그걸 바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디에스는 마찬가지로 결연히 끄덕이며, 편지를 들고 이비의 방을 나섰다.

그러더니 불과 십여 분만에 되돌아왔다.

16584001163644.png

“상당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16584001145843.png

“……갑자기요?”

문제라면 이미 차고 넘치는데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이비가 억장이 무너지는 얼굴로 쳐다보자, 디에스는 여느 때처럼 침착하게 고했다.

16584001163644.png

“라우렐 백작이 저택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이비는 심장을 뱉을 뻔했다.

.
.
.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왜 와요!

이비 님을 만나러 온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아무도 못 만나!

그럼 오늘은 만나기 어렵다고 전할까요?

아니지, 여기서 백작을 문전박대하면 어떡해!

……그럼 어쩌자고?

라우렐 백작의 왕림에 이비는 간만에 반말로 디에스를 타박했다. 그러곤 중증도의 불안증세를 보이며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뜯다 끝내는 디에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십여 분 후, 이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단아한 모습으로 응접실 앞에 섰다.

16584001145843.png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결국 백작을 만나기로 한 이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 대귀족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분명 어제 일 때문일 텐데, 여기서 숨어 버리면 더 큰 분노를 살 것이다.

그걸 전심으로 막아야 했던 이비는 결연하게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채광 좋은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따스한 봄볕이 사선을 그리며 공간을 채웠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있었다.

완벽한 각도로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시온 라우렐이었다.

16584001213929.png

 
그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햇빛과 뒤섞인 광경에 이비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러다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건 이비가 디에스에게 맡긴 편지였다. 아무래도 현관에서 가로챈 모양인데, 이미 다 읽었는지 봉인이 뜯겨 있었다.

이비는 암담한 마음을 삼키며 백작에게 인사했다.

16584001145843.png

“다시 뵙습니다, 백작님. 여기까지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16584001145876.png

“앉으십시오.”

백작이 짧게 명령했다.

이번에도 인사를 못 받았지만, 이비는 얌전히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어깨를 움츠린 채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까지 찾아온 백작은 여전히 냉랭하고 무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의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이비는 잔뜩 각오하고 판결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백작이 입을 열었다.

16584001145876.png

“대화하러 온 것뿐입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습니다.”

16584001145843.png

“네……?”

16584001145876.png

“내 태도 때문이면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경계에 오래 머물러 사교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이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최악의 첫인상 탓인지 이 상식적인 말이 꽤 뜻밖이었다.

16584001145843.png

‘생각보다 착해……?’

16584001145876.png

“아니면 버르장머리가 없는 탓일 수도 있고.”

16584001145843.png

‘아니, 취소.’

백작을 달리 보려던 이비는 그가 덧붙인 말에 재빨리 마음을 접었다.

이 와중에도 백작은 무표정했고, 그래서 이비는 그가 농담하는 건지 빈정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사교에 서툴러서 이러는 거면 세계 제일의 목석이고, 일부러 이러는 거면 이거 아주 못돼먹은 녀석이다.

이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히 운을 뗐다.

16584001145843.png

“어제 일에 관해 이야기하러 오신 거지요……?”

16584001145876.png

“그 얘기도 해야겠죠. 어제 일은…….”

16584001145843.png

“정말 죄송했습니다!”

백작이 아직 말하는 중인데 이비가 성급히 끼어들었다.

말이 끊긴 백작이 쳐다보자 이비는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백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16584001145876.png

“편지 읽었습니다. 편지를 보니 어제 일은…….”

16584001145843.png

“술에 취해서 그런 거라고 썼지요, 너무 부끄럽지만 사실이에요.”

16584001145876.png

“술 때문,”

16584001145843.png

“이라고는 해도 그런 결례를 저지르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16584001145876.png

“그래서 편지로 사과를,”

16584001145843.png

“대신할 생각은 결코 아니었어요. 다만 백작님을 뵙기 어려울 것 같아 편지 먼저 쓴 건데,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백작님. 부디 알려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실까요……?”

이비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연거푸 사죄했고, 말허리가 계속 잘린 백작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백작이 침묵하자 이비는 그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사실 이비는 응접실로 내려오기 전에 디에스와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이대로 백작을 만나면 저주 때문에 욕부터 나올 게 뻔하니, 차라리 백작이 뭔가 물어볼 것 같으면 먼저 대답해 버리자는 거였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지만, 연기력도 순발력도 발군인 이비는 이 대범한 계획을 그럴싸하게 성공시켰다.

다만 문제는 연달아 말을 가로채인 백작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는 거였다.

16584001145843.png

‘화났나?’

이비가 슬그머니 백작의 안색을 살필 때였다. 내리 조용하던 백작이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댔다.

16584001145876.png

“변명이 너무 무성의한데.”

그 혼잣말은 날카로웠다.

16584001145876.png

“그 이른 시간에 취했다니, 하인들이 샴페인을 얼마나 날랐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나?”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들어 이비를 바라보았다.

그때 백작의 눈빛은 어제처럼 매서웠고, 그래서 이비의 가련한 심장은 또 한 번 나락을 맛보았다.

165840012510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