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지나치게 솔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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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나치게 솔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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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나치게 솔직해졌다
2022.06.06.
티엔다로 올라오기 전, 이비에게는 성이 없었다.
성은커녕 부모도 집도 없어 빈민가의 천애 고아로 지내던 어린 시절.
평범하게 다사다난하던 어느 날,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점성술사가 물었다.
“이비야, 너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뜬금없는 물음에 어린 이비는 점성술사를 빤히 쳐다보다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저씬 뭐 그런 얘길 사람 코피 흘릴 때 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허접한 가판에 앉은 점성술사를 띠껍게 흘겼다.
말마따나 그때 이비는 만신창이에 코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점성술사가 기껏 빌려 준 손수건도 이미 피로 흥건한 상태였다.
그날, 고작 열두 살이던 이비는 뒷골목 패거리를 만나 가혹하게 얻어맞았다. 상납금을 안 내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 걸린 탓이었다.
그래서 이비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투덜대자, 점성술사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새로운 다짐이 생기는 법이잖니.”
“차라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시죠.”
“오늘도 우리 이비는 냉정하기도 하지…….”
이비의 차가운 대꾸에 점성술사가 슬픈 척 중얼댔다. 그래서 이비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더러운 뒷골목에서 이비를 사람 취급해 주는 건 점성술사뿐이었다.
비록 이름도 안 알려 주고 얼굴도 안 보여 주지만, 왜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 자리를 깔았는지도 전혀 모르겠지만, 점성술사에겐 늘 신세를 지고 있기에 이비는 못 이기는 척 대답해 주었다.
“나는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려운 사람?”
“봐요, 내가 아침부터 왜 이 꼴이 됐는데요. 쉽고 만만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이비는 신랄하게 말하며 자신의 상처투성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어려운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 모양 이 꼴인 거예요.”
이비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손 모양에 싫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기, 티엔다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허공에 뜬 거대한 대륙과 그 주변을 지키는 몇 개의 섬이 있었다.
저것의 이름은 티엔다. 귀하고 높으신 분들이 사는 땅이었다.
아주 먼 옛날, 바다가 지상을 덮었다.
수몰의 형태로 멸망이 도래하자 신은 자비를 베풀어 두 손으로 대지를 퍼 올렸다.
그러곤 하늘을 닮은 네 마리의 용에게 공중에 떠오른 그 땅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신의 가호로 탄생한 두 개의 공중대륙이 지금 우리가 사는 티엔다비스이다……라고 예전에 점성술사가 가르쳐 주었다.
그중 높은 곳에서 햇빛을 독차지하는 땅이 티엔다 대륙, 낮은 곳에서 그늘과 저주로 몸살을 앓는 게 바로 이비가 사는 비스 대륙이다.
“아저씨가 그랬죠? 저 위에는 귀족들이 산다고. 두고 봐요, 나는 언젠가 저 위로 갈 거예요.”
이비가 티엔다를 향해 흙투성이 손을 뻗었다. 앙상한 손끝이 초라했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까만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나는 저기서, 엄청나게 어려운 사람이 될 거예요!”
.
.
.
그렇게 선언한 지 어언 8년.
목표대로 티엔다에 올라온, 그리고 성녀의 자리까지 목전에 둔 이비는 그럼에도 여전히 기구한 자신의 팔자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 이비 님. 소원이 뭐죠?”
“세계정복.”
“그런 막꿈 말고 실현 가능한 목표는요?”
“성녀가 되어 권력을 잡겠어요.”
“그럼, 탑주님께 평소 하고 싶은 말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 이 성격파탄자! ……아, 정말 어쩌면 좋아요.”
막힘없이 대답한 후, 이비는 자신의 발언에 이마를 짚었다.
아마 평소의 이비라면 소원이나 포부, 그리고 지인에 대해 질문받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길.
―성녀가 되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어요.
―존경하는 탑주님,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어젯밤 시작된 이변이 이비에게서 처세를 빼앗았다.
그로써 검고 세속적인 본심을 다 들키게 생긴 이비는, 환멸을 삼키기 위해 한참 동안 이마를 짚고 있어야 했다.
“지나치게 솔직해진 것 같긴 하네요.”
그때 가까운 곳에서 느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적갈색 단발 아래 집사의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에스. 이비와 생과 사를 함께하는 이비의 집사였다.
디에스는 어젯밤 이비의 상태를 곧장 알아챘다. 이비 역시 오늘 아침엔 집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서, 지금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이 저주의 실마리를 찾는 중이었다.
“대답을 참는 것도 말을 돌리는 것도 안 되는 거죠?”
“네, 입이 저절로 움직여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디에스가 장갑 낀 손으로 이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이비의 까만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역시 노체의 저주가 맞습니다.”
“노체라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집사의 확언에 이비는 흐린 얼굴로 웃었다.
노체. 본디 그것은 티엔다비스를 지키던 네 마리의 용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노체는 반역을 일으켰다가 다른 용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노체는 최후의 순간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는 자신이 신에게 받은 가호를 저주로 바꿔 온 세상에 퍼트렸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노체의 저주. 300년 전부터 시작된,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악의적인 재앙이었다.
“저주를 활용하려면 밤의 일족의 협조가 필요한데, 그들과 접촉하는 건 귀족에게도 위험한 일입니다. 혹시 주변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비 님을 저주할 사람이 있나요?”
“다른 성녀 후보, 귀족주의자들, 아니면 나한테 고백했다 차인 남자들이요.”
“용의자가 많군요.”
“없이 커서 뭐든 많은 게 좋더라고요.”
이비의 너스레에 디에스의 눈썹이 밑으로 휘었다.
정체불명의 저주에 걸렸는데 이리도 초연한 태도라니. 그게 미심쩍었던 디에스가 되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뇨, 괜찮은 척하는 거예요. 사실 밤새 울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으악!”
디에스가 비명을 지르며 이비의 턱에서 손을 뗐다. 치부를 들킨 이비가 그의 엄지를 콱 깨물어 버린 탓이었다.
디에스가 놀라서 쳐다보자 이비는 언제 물어뜯었냐는 듯 단아하게 웃으며 경고했다.
“불필요한 질문은 자제해 주세요.”
“허세는 자기가 부려 놓고 왜 화풀이…….”
디에스가 얼얼한 손을 털며 중얼댔지만, 이비는 못 들은 척 탄식했다.
“너무 심란해요, 걸려도 어쩜 이런 저주에 걸려서…….”
“저주의 기본 원리가 약점의 현실화입니다. 즉 이비 님의 약점이 본성의 발각, 가식의 폭로라는 뜻이죠.”
“……친절한 설명 아주 고맙습니다.”
집사의 신랄한 답변에 이비가 꾹꾹 눌러 웃었다. 하지만 디에스는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듯 태연히 덧붙였다.
“성녀 발탁을 두 달 앞두고 이런 저주에 걸리다니, 이 저주를 의뢰한 자는 이비 님이 성녀가 되는 걸 막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요.”
집사의 추측에 이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스의 말대로 두 달 후 차기 성녀가 결정된다. 그러니 성녀 후보들은 그전까지 당연히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떨어진 저주로 전날 이비는 대귀족에게 드잡이질하고 연회에 깽판을 놓았다. 성녀 실격을 판정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비가 어제를 떠올리며 다시 이마를 짚자, 디에스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라우렐 백작에겐 왜 그러신 겁니까?”
“난 가만히 있었는데 그 망할 놈이 먼저 건드렸어요. ……안 돼, 이비. 이러지 마.”
이비는 저도 모르게 투덜댔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망할 놈이라니, 성녀 후보의 고운 입에서 망할 놈이라니.
이비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짝짝짝 때리다가, 다시 단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건 불의의 사고였어요. 하지만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책임소재가 있는 쪽은 라우렐 백작님이라고 생각해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먼 곳을 보았다. 그러곤 아련한 얼굴로 어제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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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 연회장엔 달콤한 미뉴에트가 흘렀다.
대리석으로 재단된 공간은 면면이 찬란했고, 끊임없이 채워지는 술과 음식은 미식가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호화로운 사교장에서 사랑스러운 성녀 후보, 이비 아리아테는 물빛 드레스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웃는 이비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그건 잘 꾸민 겉치레일 뿐, 사실 그 속엔 음험한 계산이 가득했다.
‘한동안 이렇게 큰 연회는 없을 거야. 오늘 최대한 눈도장을 찍어 놓자.’
성녀 발탁을 앞둔 이비는 그날도 평판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희망의 상징인 성녀는 ‘마냐냐 탑’에서 물을 정화하는 소녀들 중 가장 뛰어난 한 명에게 부여되는 영예였다.
티엔다비스는 대륙의 밑면이 허공인 탓에 물이 빠르게 고갈된다. 그래서 마냐냐 탑에서는 바닷물을 주기적으로 정화해서 가뭄을 막았다.
이때 물을 정화하는 건 신의 가호를 받은 특별한 소녀들이고, 이비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정화자였다.
때문에 다들 차기 성녀는 당연히 이비 아리아테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직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전대 성녀와 대귀족들이 하니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전대 성녀와 대귀족들이 반대하면 성녀가 될 수 없다.
결국 실력은 시험대에 오를 자격에 불과하고, 성녀를 확정 짓는 건 평판과 인맥인 셈이다.
이비는 그런 티엔다의 생태를 잘 알기에, 오늘도 귀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요령껏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터져 나온 감탄사가 부드럽게 나아가던 이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세상에, 저분이 라우렐 백작님이라고요?”
그 호들갑과 함께 화기애애하던 연회장이 술렁였다.
고상한 대화를 나누거나 미식을 음미하던 귀족들이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비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는 찬란한 금발을 후광처럼 짊어지고 있었다. 그의 우월한 키와 어깨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흘렀고, 수려한 얼굴은 멀리서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성화의 한 장면을 뜯어다 놓은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남자였다.
‘저 사람이 라우렐 백작…….’
이비는 감탄을 숨기지 않고 그 남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이비는 그에 대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시온 라우렐. 대귀족인 라우렐 대공의 이복동생이자 비스의 안정을 책임지는 총사령관.
티엔다비스를 다스리는 건 라우렐 대공가의 의무이고, 그중 밑대륙인 비스를 보호하는 건 그 가문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숙명이었다.
그래서 라우렐 대공의 동생인 시온 라우렐은 열일곱 소년 시절, 백작의 작위를 받고 비스를 감시하는 총사령관으로 밑대륙에 내려갔다.
그러곤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시는 티엔다로 올라오지 않았다.
중요한 절기에도, 정규 휴가 때도 그는 계속 비스에만 머물렀다. 형인 라우렐 대공이 아무리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려 7년이 지난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백작이 긴 침묵을 깨고 티엔다로 돌아왔다.
오늘 이 자리는 바로 그런 백작을 맞이하기 위해 라우렐 대공이 마련한 환영회였다.
‘잘났다는 얘긴 들었지만 정말 다 가졌구나.’
이비는 백작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으로 태어났는데 능력도 뛰어나고 얼굴도 저렇게 잘생겼다니, 역시 세상은 불합리로 가득 차 있다.
이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장의 급변한 분위기를 살폈다.
아까만 해도 이곳은 귀족들이 친목을 과시하는 사교장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백작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쟁쟁한 귀족들이 백작에게 말 한번 걸어 보려고 그 주위에서 몸을 꼬아 댔고, 비교적 신분이 낮은 귀족들은 그에게 접근조차 못 하고 발만 동동 굴러 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시온 라우렐 백작은, 자신이 연회의 주인공이란 자각조차 없는지 그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고 사람들과 차갑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 모양이네.’
그래도 흠이 있긴 있구나 생각하던 이비는, 이조차도 흠이 아니라 특권임을 깨닫고 실소를 삼켰다.
어쨌든 저 거물의 등장으로 이비는 하던 일을 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귀족들에게 접근해봤자 거치적댄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고, 감히 백작에게 다가갔다간 먼저 알랑대던 귀족들에게 눈총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비는 눈치껏 빠지기로 했지만, 정작 상황은 정반대 방향으로 이비를 잡아끌었다.
그건 저 멀리 있던 백작의 시선이 아무 조짐도 없이 이비에게 내리꽂히면서부터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비를 발견한 백작은 그대로 이비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마치 잡아먹을 듯이, 마치 네 놈을 찾고 있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