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7화 마지막 한 자리
하이덴.
녀석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다른 놈들과 궤를 달리하는 녀석이다.’
아무리 내가 한계까지 몰린 후 싸웠다지만 발칸은 약한 적이 아니었다.
컨디션을 회복한 상태에서 전투했더라도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했을 거고.
‘뮬랑 카센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전했겠지.’
나름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 강한 순서를 따지자면.
뮬랑 카센.
이 녀석은 혼자 해결하기 버거운 수준이다.
악마화와 절대 영역을 얻은 지금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당시에는 그렇다.
모두가 합심해 힘을 깎아 놔야 잡을 수 있다.
‘그 아래가 발칸.’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괴물.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수련가이자 혼돈의 힘까지 사용하는 노괴였다.
그보다 살짝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게 델버튼과 에렘바트고.
둘은 동급이라 본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녀석은.
‘장담하건대 뮬랑 카센보다 한 수 위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발칸을 단번에 도륙 냈으니까.
정점이라 자부하던 뮬랑 카센도 저 녀석 앞에서는 어떨지 가늠할 수 없었다.
[98층 클리어!]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덕분에 발칸을 잡고 98층을 클리어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녀석이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
‘설마 나랑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혼돈의 파편이라는 놈들이 워낙 변덕이 심하니 방심할 수가 없다.
내 친구라고 자처했지만 친구끼리 싸우기도 하지 않던가.
【긴장 할, 거 없, 다.】
“긴장 안 했거든?”
거짓말은 아니다.
녀석이 발칸을 해치우고 포탈이 열리자마자 메시지를 뿌렸으니까.
99층으로 향하라고.
지금쯤 냥펀과 핥짝이를 포함해 98층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이 위로 올라갔을 거다.
여기부터는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
죽어 봤자 다시 올라오면 그만이니까.
[냥냥펀치]: 99층 도착!
[정수리 핥짝]: 탈모쉨아 빨리 와라, 너가 좋아하는 모포 깔아 둘게
[니머리 탈모]: 히이익! 모포 싫어!
[냥냥펀치]: 3단 매트리스도 준비해 뒀다구!
[니머리 탈모]: 끼아아악!
[쁘띠공듀]: 탈모맨은 재입대를 하기로 했어요오… 일동 박☆수
[정수리 핥짝]: 짝짝짝! 힘든 결정 응원합니다!
[냥냥펀치]: (박수갈채) 국가가 부른닷!
[니머리 탈모]: 아니거든!
커뮤니티를 보니 확실히 다 올라간 모양.
탈모맨을 놀려먹는 걸 보니 99층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위험에 빠지지는 않은 거 같다.
【오. 오오.】
-힐끔힐끔.
녀석이 내 커뮤니티를 훔쳐본다.
몸을 배배 꼬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쩌랴.
이미 녀석은 내가 쁘띠공듀인 걸 알고 있다.
‘이거 때문이라도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녀석을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혹시 아는가.
이 괴상한 녀석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내 닉네임을 외치고 다닐지.
“으으으.”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혼돈의 파편과 맞서는 쁘띠공듀(남성, 신체 건강)!
【부끄, 러움이 느껴, 지는, 군.】
“닥쳐 주면 안 될까?”
진심으로.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나도 위로 올라가야 한다.
녀석은 그걸 원하지 않아 보이고.
왜냐.
“좀 비켜 주지?”
【아직은, 안 된, 다.】
하이덴이 포탈을 가로막고 있다.
갈 거면 자신을 뚫고 가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면서.
“원하는 게 뭐야. 빨리 말해. 나도 바쁘니까.”
【그대, 위로 올, 라가면 견뎌 낼 수, 없다.】
견뎌 낼 수 없다라.
시련?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떠오르는 존재가 없는 건 아니다.
“베드록 바알루제. 녀석을 말하는 건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녀석도 경계할 정도면 얼마나 강한 존재라는 걸까.
애초에 돌파가 가능한 건가?
그보다 말이 좀 애매하다.
‘진다거나 죽는다도 아니고 견딜 수 없다라.’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네가 이번, 세대에 태어날 혼, 돈의 파편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지켜봐 왔지.
녀석이 중얼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베드록 바알루제.
그는 모든 숭배자의 왕이었고.
‘나랑 가장 많이 부딪친 게 숭배자지.’
당연히 나에 대한 정보가 녀석에게 넘어갔을 거다.
알게 모르게 나를 지켜보고 확인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겠지.
이거 완전 변태 아닌가.
왜 멀쩡히 등반하는 사람을 가만 못 놔둬서 안달인지.
됐다.
곧 마주칠 거고 언제나 그렇듯 꺾을 테니까.
그런 내 생각을 알고 있는지 녀석이 거대한 몸을 숙여 나를 바라봤다.
【친구여. 그대는 나와, 닮았다.】
“닮긴 뭘 닮아. 생긴 거부터가 다르구만.”
【그렇기에 기꺼이 그대를, 돕고자, 한다.】
가볍게 내 말을 무시한 녀석에게서 혼돈이 빠져나온다.
그에 반응해 나의 혼돈 역시 덩치를 불렸으니.
【정, 상에 올라,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가.】
하이덴의 의지가 메시지가 되어 떠오른다.
[자신의 세상을 저버린 존재, 하이덴이 당신과 거래하고자 합니다.]
[하이덴은 당신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슷하나 다른 자. 강한 흥미가 맴돕니다.]
【부럽, 구나. 무엇이 그리 지, 키고 싶은가.】
【스스로의 정체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자야.】
그야 당당히 못 밝히지.
그동안 커뮤니티에서 해 온 짓이 있는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밝힐 생각 없다.
“그러는 너도 혼돈의 파편이 됐다는 건 자기 세상에 미련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
으레 그러하듯 혼돈의 파편은 100층에 오른 자.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시에 사명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여럿이었다.
물론 나처럼 강제적으로 올라간 사람도 있겠지만.
에렘바트처럼 특이 케이스도 있고.
그렇다고 한들 대부분 가히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자들이 많았다.
비록 지금은 타락해서 인격도 행실도 괴상한 녀석들투성이었지만.
-우우우웅.
내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녀석이 몸을 들썩였다.
소리 내 웃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이덴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과거를 고백합니다.]
【난, 세상을 증오한 자. 조롱과 질시, 혐오를 받은 자.】
-쿠구구구궁!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것은 지독하면서도 강렬했으며.
[정신 보호(SSS) Lv.MAX]
그의 삶과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어땠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증거기도 했다.
【비, 웃는 자들을, 짓밟고.】
정신 보호 덕에 정신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으나 그의 힘에 의해 보이는 환상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를 보여 주고자 함인가.
-철퍽.
하이덴을 경멸하는 자들이 핏덩이가 되어 사라진다.
그를 무시하던 이들이 경배한다.
【나를 욕, 하던 이들은 구걸을 했으며.】
수많은 난관.
그에게 의지하는 동시에 뒤에서는 욕했던.
숨길 수 없는 혐오 속, 하이덴은 욕망을 찾았으며 그를 더더욱 추잡하게 만들었다.
이미 그런 취급을 받았기에.
추악한 외모와 함께 스스로도 점점 무뎌져 갔음을 인정했다.
필요에 의해 허물을 덮어 주었으나 결코 인정은 받지 못한 삶.
【오물을 뒤집은 자를 조롱하던 이들은 묻혔다.】
달콤한 속삭임.
그를 꼬드기는 유혹과 허울뿐인 대우.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던져 주듯 베푸는 동정.
그를 통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자들.
조그마한 감정만 내비쳐도 반응하는 모습은 동물원 속, 먹이에 흥분하는 짐승과 같았다.
【진심 따위는 없는 세상.】
아부를 하는 자는 원하는 것이 있었고.
경의를 표하는 자는 그를 이용하고자 했다.
강하기에.
그가 아니면 나설 이가 없었기에 필요할 때만 찾고 버렸다.
진실된 대가는 무엇도 없었다.
【난 떳떳하지 않다. 세상 또한 그러했다.】
서로가 웃으며 요구하고 받아들였지만 그 속은 썩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모두를 위하는 척 행동하기도 했으나 그도 알았다.
그들의 동정, 자신의 행동 모두 위선일 뿐임을.
이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멀어질 것임을.
분노를 느꼈다.
자신을 그렇게 원하면서 어째서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가!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그래서 복수했지.】
모두가 기대했던 100층에 도달한 초인.
하이덴은 즐겁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토록 잘난 체하던 이들이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비틀린 인성과 증오에 빠진 괴물.
그것이 하이덴이었으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더구나.】
그 결과는 스스로를 더욱 밑바닥에 처박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끄러웠다.
늦게나마 밖으로 나가는 건 어떨까 고민한 적도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자신을 원망할 이들의 목소리가 무서웠다.
그래서 숨었다.
탑으로.
자신의 세계를 멸망으로 확정 지은 선택을 감추며.
【그대는 다르다.】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필름처럼 이어지던 환상 역시 조각나며 흩어졌다.
난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 씨. 골 아프네.’
이미 여러 차례 봐 왔던 광경.
망할 혼돈의 파편에 발 한쪽 걸치고 있어서인지 녀석들과의 동화율이 높아졌다.
녀석이 느낀 감정의 동요와 경험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라진다.
혼돈이 가미된 기억이란 그런 거였다.
나조차도 잠시 잊게 만드는 고약한 것.
【발화되지 않은 개념을 피워 주마. 네겐 그것이 필요할 것이니.】
어느새 누그러진 혼돈의 기운.
간질간질한 뭔가가 내게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떨쳐 내려 해도 원래부터 나의 것이었다는 것처럼 달라붙는 이질적인 무언가.
【개념을 넘긴다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바.】
후욱!
내게 깃들어 있던 혼돈이 증폭된다.
【나의 것을 주고자 하지만 우습게도 난 그대의 세상이 궁금하다.】
녀석이 내게 손을 뻗었다.
막대한 혼돈이 공간을 짓누른다.
하늘이 주저앉은 듯한 감각!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밀도 높은 혼돈이 일대를 장악한다.
【그대, 나의 계승자가 되어라.】
결코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손짓이었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계승자?
마침 한 자리 비어 있기는 하다.
내가 계승할 수 있는 존재는 셋.
한 명은 알리오스였고 다른 한 명은 릴카다.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아 있었으나.
“…내가 왜?”
굳이 녀석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압박당하는 와중에도 입가를 비틀었다.
물론 가능은 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기도 했고.
무려 100층까지 오른 존재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모르는 비밀들을 알려 줄지도 모른다.
안전장치도 조금은 있다.
계승해 준 자는 계승자를 공격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 위험한 녀석을 밖으로 데리고 가도 될까.’
내가 녀석을 계승하면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이 녀석은 어디로 나가게 될까?
본인이 있던 세계?
아닐 거다.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고.
그러니 분명 나를 따라 나올 거다.
혼돈의 파편은 그만한 힘이 있을 테니.
더 강력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조건을 들어주면 생각해 보지.”
【무엇이냐.】
“먼저.”
역시 이것부터 해야겠다.
“내가 쁘띠공듀인 거 말하지 않기.”
【…그래.】
녀석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