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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736화 (736/740)

736화 나가지 않은 자

컨디션 최악, 다른 이들 또한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황 속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도박수.

지금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것뿐이다.

카오스 박스.

릴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혼돈의 파편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

이것을 오픈하면 뭔가가 나온다.

잡다한 아이템부터 보물.

거기에.

‘혼돈의 파편을 없애기도 하지.’

릴카가 직접 겪었던 일이니 확실하다.

다만, 그와 반대로.

‘혼돈의 파편이 나올 수도 있고 말이야.’

그렇기에 도박수.

아무런 일도 없을 수도, 일이 해결될 수도, 더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내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카오스 박스가 열립니다!]

[행운 스탯이 반짝입니다!]

내게는 행운 스탯이 있다.

평상시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필요한 순간에는 여지없이 존재감을 내뿜는 특수 스탯.

“좋았어! 발동될 줄 알았다고!”

“그에에!”

믿음은 배신하지 않았다.

행운 스탯이 발동하며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건!”

다가오던 발칸마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대박인가? 대박 당첨이라 녀석이 사라지는 건가!

기대감에 주먹을 쥐는 그 순간.

[하이덴이 당신의 부름에 기꺼워합니다!]

[수줍은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외칩니다!]

“하이덴? 뭐? 어?”

-쿠오오오오오!

막대한 양의 혼돈이 몰아쳤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이 혼돈.

그러나 물도 쌓이면 바다가 되고 바닥의 모래도 커지면 사막이 되는 법.

압도적인 밀도로 휘몰자 혼돈 그 자체도 유형화된 격류가 되었다.

에렘바트? 뮬랑 카센? 눈앞의 발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저 이름.

‘내가 아는 이름이야.’

이미 만난 적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열화판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70층, 한계 돌파 스킬북을 얻을 때 겪었던 시험.

그곳은 열화된 혼돈의 파편과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저 하이덴이라는 녀석은.

[위선과 부끄러움의 하이덴이 등장합니다!]

나를 보며 부끄러워했던 녀석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쁘띠공듀로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기억을 읽더니 응원해 주고 사라졌던 녀석.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네.

‘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이 녀석인가.’

뮬랑 카센과의 계약.

그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파편의 친구 칭호.

그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이 있다는 메시지가 떴었다.

지금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 녀석이 분명한 거 같기는 한데.

[하이덴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에 모습을 숨깁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러모로 골 때리는 녀석이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다른 혼돈의 파편과 달리 이 녀석은 내게 호의적이다.

[하이덴이 당신을 반가워합니다.]

[하이덴이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하이덴은 당신이 부끄럽습니다.]

[하이덴은 당신을 인정합니다.]

.

.

.

당장 공격하지 않고 호감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왠지 메시지를 읽을 때마다 울컥했지만 참았다.

다른 미친놈들이 나타나지 않은 게 어디야.

무엇보다.

‘행운 스탯이 반응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는 거야.’

그렇게 판단했다.

제멋대로 발동되기는 했지만 한번 발동하면 반드시 내게 좋은 방향으로 움직였으니.

“어째서 네놈이 여기에 나타난 거지!”

발칸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녀석을 어떻게 평가하든 하이덴은 급이 높은 존재가 분명했다.

-꾸드드득.

패기로웠던 발칸이 처음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다.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

나와 싸울 때도 당황하지 않았던 녀석이 보폭을 줄이며 움직인다.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

‘저곳에 하이덴이 숨어 있는 건가.’

모르겠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즛.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보이는 건 없었으니.

혼돈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든 아니면 여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네놈이 왜 어슬렁거리는지는 몰라도 이자는 내 몫이다!”

-콰아아앙!

발칸의 목표가 나라는 사실.

오필리아의 분전으로 시간을 끌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 쉬었다고 힘이 들어가기는 했으나.

“으음!”

일어서는 것도 버겁다.

그에 반해 발칸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고.

내게 뻗어 오는 공격.

이 상태로 흘려 낼 체력이 없다.

안개 질주로 피하고 싶었지만 그만한 마력이 남아 있지 않다.

패시브 스킬로 버티는 수밖에.

그래도 그냥 맞는 건 억울하니.

‘팔 하나를 내주고 기회를 만든다!’

비장의 수는 아직 하나 더 남았다.

놈에게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콰아아아앙!

날아오는 주먹을 왼쪽 팔로 받았다.

[강철의 의지(SS) Lv.10+]

[강체强體(SS) Lv.10+]

[물리 공격 내성(SSS) Lv.10]

패시브 스킬이 발동되었음에도 버티기 힘든 충격.

뿌드득.

뼈가 부서지는 감각에 이를 악물며 놈에게 손을 펼쳤다.

차원 상인에게 구한 두 개의 이세계 스킬.

그중 하나는 검강이었으며.

남은 하나는.

[업보 청산]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상대방에게 재현할 수 있습니다.

-죽은 횟수만큼 사용할 수 있습니다.

-9개월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쿨타임이 굉장히 길었으나 효과는 확실한 스킬.

업보 청산.

상위 층 시나리오를 거치며 쿨타임은 이미 지났다.

내가 선택한 죽음은 하나.

‘델버튼의 역병의 안개.’

-푸화아아아악!

내게 가장 많은 죽음을 선사한 델버튼의 능력이 녀석에게 뿜어졌다.

될까?

알 수 없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발칸 또한 혼돈의 파편이었으니까.

“크하아아악! 어째서 네놈이 델버튼의 능력을!”

역병의 안개에 뒤덮인 녀석이 온몸을 비튼다.

빠르게 녹아내리는 피부.

머리카락은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액화되어 흘러내렸으며 타 버린 피부 사이로 드러난 근육이 빠르게 괴사하기 시작했다.

확실하다.

‘놈에게도 통한다!’

다만.

“장난이 도가 넘었구나, 후배.”

“왜. 잘 어울리는데.”

이걸로는 부족하다.

몸의 절반이 녹았지만 무력화되지는 않았다.

아직 놈은 움직인다.

명백한 살기와 분노를 담아서.

-콰과앙!

지금까지도 사나웠지만 지금은 가히 흉폭하다.

나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젠장. 다시 올라온다.’

난 다음을 기약했다.

필요한 만큼. 녀석을 완전히 뭉갤 때까지 다시 올라온다.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주먹을 끝까지 노려봤고.

그 순간.

[하이덴이 델버튼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하이덴은 발칸이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덴이 자신의 친구를 위해 나섭니다.]

-우우우우웅.

시야가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

전투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공간이었으며.

“하이덴, 네… 놈!”

나와 함께 이동되었는지 핏덩이가 된 발칸이 주먹을 날리는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부릅뜬 두 눈.

거기에는 표현할 수 없는 증오와 경악이 섞여 있었다.

-쩌적.

-찌거억.

뼈와 살이 잘리는 소리가 들린다.

발칸의 몸에 붉은 실금 수십 개가 생겼고.

-후두두둑.

그대로 조각나 떨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육편.

역겨운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며 바닥이 흥건해진다.

녀석이.

‘죽었다.’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벌인 건지, 무슨 능력을 쓴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하이덴.

녀석이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우우우웅.

【오랜, 만이다.】

하얀 광채로 감싸인 자.

등 뒤로 여덟 개의 광휘의 검을 날개처럼 펼치며 허공에 부유한 존재.

말더듬이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친구를 위해, 내가, 왔다.】

녀석이 위선을 떨었다.

* * *

98층.

오필리아와 노블 나이트가 발칸이 만들었던 악몽에서 벗어났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악몽.

“이블아이는 어디 간 거죠?”

“이쪽에는 없습니다!”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대체 어디로.”

발칸의 죽음으로 능력이 사라졌고 그들은 이블아이를 찾아 나섰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보았었다.

이곳에서 카오스 박스를 던졌으며 몸서리칠 정도로 강력한 혼돈이 느껴졌다.

노블 나이트는 악몽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 같았으나.

‘도대체 어떤 괴물을 불러낸 건가요, 이블아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오필리아만큼은 아니었다.

세계의 구원을 위해 올라가고 있던 그녀였고.

여러 NPC의 계승자가 되며 남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또한 알고 있었으나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모든 숭배자들의 왕?

아니다.

그는 99층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기운도 달랐다.

위대함도 위엄도 없다.

지독한 악의와 그와 반대되는 순진무구함.

다른 혼돈의 파편과 비교해도 탑에 가까운 존재였지.

“설마.”

이만한 힘을 가진 혼돈의 파편이라면 이름이 알려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남은 건.

“잊혀진 자들 중 하나인 건가요.”

잊혀진 자.

초창기에 태어났으나 각자의 이유로 모습을 감추었던 이들이 분명했다.

오래되어 자신의 개념을 빼앗긴 몰락자들과 달리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자들.

변덕스러워 언제고 침묵을 깨고 나타날지 모르는 존재.

그렇기에 마주치지 않기를 기원해야 하는 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이미 드러냈으나 자신이 몰랐던 걸 수도 있다.

그녀라고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으니.

다만.

[98층 클리어!]

[포탈이 생성됩니다!]

-우우우웅.

발칸의 죽음으로 98층이 클리어됐다는 사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했다.

위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블아이를 찾을 것인가.

결정은 간단했다.

[냥냥펀치]: 오옹! 포탈 열렸당!

[정수리 핥짝]: 오필리아 있지? 여기 나랑 냥펀, 스마일캡, 마그마 요정이 있는데 올라간다

[냥냥펀치]: 너희도 올라가라구!

이블아이의 동료들이 위로 올라가라고 하고 있다.

분명 따로 연락이 있었을 터.

잠시 눈을 감았던 오필리아가 노블 나이트를 이끈다.

“위로 올라갑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라면 괜찮을 거예요.”

자신만큼이나 NPC의 사랑을 받으며 탑에 대한 것들도 많이 알고 있는 등반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블아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오필리아의 의지에 노블 나이트도 포탈 안으로 진입했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 * *

99층.

깊숙한 동굴 안.

수많은 보물과 뼈가 뒤섞인 공동에 앉아 있는 존재가 입가를 비틀었다.

“하이덴. 녀석이 움직였군.”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모든 숭배자들의 왕.

베드록 바알루제가 턱을 괸다.

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쿠구구구궁.

그것만으로도 동굴이 울렸다.

동굴 입구, 자리를 잡고 있던 숭배자들이 놀라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그의 존재감에 뚫려 있던 하늘이 요동쳤다.

“선수를 치시겠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쯧. 혀를 찬 그가 손에 잡힌 구슬들을 굴렸다.

무엇을 선물로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거 욕심을 부려도 되겠군.”

가장 어울리는 걸 골라 줄 필요가 사라졌다.

좀 더 자신의 취향이 가미된, 위험하고도 강력한 선물을 줘도 될 거 같다.

마음 같아서는 불쾌감을 준 대상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싶었으나.

“나가지 않은 자도 관심을 보인다라. 재미있군.”

탑에 존재하는 혼돈의 파편.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들이 있었으니.

베드록 바알루제.

그는 탑으로 되돌아온 자였고.

하이덴.

그는 탑에서 나가지 않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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