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35화 (735/740)

735화 발악

내게 도전장을 내민 발칸.

개념이란 해석되기 마련이었으며 혼돈의 파편은 얼마든지 자신에게 맞게 개념을 조종한다.

상대방이 ‘그건 아니지!’라고 외쳐 봤자 혼돈의 파편에게 옳은 해석이면 그렇게 되는 것.

그렇기에 녀석이 내게 도전한다는 것은.

[혼돈의 파편, 발칸이 도전자 상태가 됩니다!]

[당신은 주어진 도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전은 숭고한 법!]

[발칸은 당신을 꺾을 것입니다!]

-쿠오오오오!

기세가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까지의 기세가 장대비였다면 지금은 폭풍.

검을 움켜잡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조금씩 밀어낸다.

말 같지도 않은 괴력!

‘이거 뮬랑 카센이 사용하던 기사도랑 비슷한 거 같은데.’

난 이를 악물며 기회를 살폈다.

뮬랑 카센 또한 자신을 부르는 엘리니의 외침을 듣고 버프를 먹었었다.

특정 조건에서 한계를 깨 버리는 막강한 능력이었고.

그 대상자가 초월자인 혼돈의 파편이라면.

“잘 부탁하지, 후배!”

-콰아아아앙!

그 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하게 검을 떨치는 것과 동시에 누운 상태로 나를 걷어찬다.

“크흡!”

지근거리였음에도 충격량이 어마어마하다.

몸이 붕 뜨다 못해 하늘로 치솟았다.

발칸 또한 벌떡 일어나더니 땅을 박찼다.

-후웅!

땅이 조각나며 대포처럼 날아드는 녀석.

그대로 꿰뚫을 요량인지 주먹을 내밀고 있다.

-파아앙!

날개를 퍼덕여 방향을 급변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공격.

허공에서 움직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할 필요도 없다.

“날래군!”

“배 터져 죽는 건 사양이라.”

애써 입꼬리를 올렸지만 신경은 날카로웠다.

녀석은 강하다.

뮬랑 카센보다 강할까?

‘그 정도는 아니야.’

직접 마주해서 잘 안다.

물론 발칸은 강하다.

애초에 이루어진 개념 자체가 악몽과 도전이지 않은가.

어떤 삶을 살아야 자신의 인생을 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필시 자신의 세계에서는 절대자로 군림할 정도의 수준은 되겠지.

그러나.

“너한테는 간절함이 부족해.”

녀석에게 싸우는 것은 일종의 놀이.

투쟁하는 자에게 있어 즐기는 것 또한 중요한 요소였으나 날카로움은 죽는다.

파괴적이나 확정적이지 못한 일격들.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으나.

‘까다롭지는 않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

달리 말하면 그 이상의 힘과 끈질김이 있다면 이겨 낼 수 있다.

“간절하다라. 이 몸에게는 옛스러운 단어구나!”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이 허공을 박찬다.

경지에 오른 무투가.

어쩌면 야인.

난폭하게 공간을 흔들며 내게 발차기를 날린다.

다리가 휘어지는 듯싶더니.

-쩌어어어엉!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날아와 꽂혔다.

팔을 틀어막았지만 뼈까지 관통하는 충격.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대미지가 뚫고 들어온다.

-욱씬!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만큼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프다.

그 틈을 노린 걸까.

-콰광! 쾅!

-빠가아악!

연달아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허공을 도약하는 만큼 움직임이 직선적이었으나.

-파앙! 파바바방!

직선이어도 수없이 쪼개 밟으면 곡선에 가까워지는 법.

녀석의 보법은 기묘하면서도 빨랐다.

반응하지 못하게 제각기 다른 박자로 뻗어 오는 공격에 온몸이 울린다.

말 그대로 사람을 깎고 있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날카로운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맞고만 있다가는 부러질 거다, 후배여!”

“그런 거치고 공격이 말랑한데?”

“하하! 허세도 좋지!”

한껏 웃으며 뒤돌려차기를 날리는 녀석.

턱으로 날아오는 발을 피해 고개를 젖히며 검을 그었다.

[칭호, 발목 수확자가 번뜩입니다!]

-서걱.

“방금 건 좋았구나!”

정확히 아킬레스건을 끊으려 했지만 종아리만 살짝 긋고 끝났다.

아쉬운 결과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공격이 통한다는 거 아닌가.

늘 그러했듯 될 때까지 하면 그만이다.

다만.

‘안 좋은데, 이거.’

상태가 좋지 않다.

뮬랑 카센과 치른 일전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

체력과 마력이 바닥을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부상이 너무 커.’

덕춘이와 오필리아에게 치유받기는 했으나 완전히 회복되려면 멀었다.

신경에 쌓인 피로는 여전했으며 상처가 봉합되고 어긋난 뼈과 근육이 제자리로 찾아갔을 뿐 안정화되지는 않았으니.

그만큼 혼돈이 섞인 공격은 지독하고 오래갔다.

아스트랄 레인보우를 쓴 대가로 주요 스킬들이 약해진 것도 문제.

“숭배자고 혼돈의 파편이고 싸그리 없애 버려야지.”

항상 이놈들이 문제다.

안면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붙잡았다.

흘리듯 휘감으며 업어치기.

뒤집혀진 녀석에게 오로라 빔을 쏘았고.

-쿠구구구궁!

그대로 녀석이 땅으로 꽂힌다.

따라 내려가면 만근추환을 활성화했으니.

-콰과과광!

놈을 깔판 삼아 땅으로 파고들었다.

물리력으로 이루어진 굴파 작업.

거대한 송곳으로 땅을 내려찍으면 이럴까.

“크하아아압!”

발칸을 기점으로 삼각뿔 형태의 지형이 만들어진다.

아무리 단단해도 대미지가 없을 리가.

눈을 부릅뜨며 침을 튀긴다.

땅에서 발붙이고 싸우는 거?

놈이 바라는 바다.

허공에서 벌어지는 전투?

놈의 이동에 일부 제약을 주지만 유의미하지 않다.

그러니.

“지하까지 내려가 보자고.”

-콰아아앙!

빠져나갈 수 없게 아래로.

지하로 파고든다.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리쳤다.

놈을 깔아뭉갠 자세, 아래로 파고들 거면 검보다는 주먹이 나았으니까.

탈모맨처럼 타격계 스킬이나 권능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사는 거지!”

-콰르르릉!

주먹을 망치 삼아 때리고 두드린다.

무식하지만 그만큼 전달되는 파워는 강했으며.

“고작 그 정도로 되겠느냐!”

“코피나 닦고 말하시지.”

놈이라고 무한정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뇌진탕이 오든, 얼굴이 뭉개지든 어떻게든 치명상을 입혀야 했는데.

‘몸이 뭘로 만들어진 거야!’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단하다.

오히려 내려치고 있는 건틀릿이 찌그러지고 있다.

내 주먹도 벗겨지고 갈라지는 중.

손가락뼈가 어긋났는지 아찔한 통증이 올라온다.

부들거리는 손을 강하게 움켜잡아 강제로 고정시켰으나 이걸로는 부족했고.

“사람은 도구를 쓸 줄 알아야지!”

단단한 게 문제다?

갑옷과 주먹보다 튼튼하다?

그럼 더 딱딱한 것으로 치면 그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콰드드득!

“끄아압!”

혼돈검만 한 것이 없다.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뒤 손잡이로 찍었다.

혼돈이 담긴 물건인 만큼 녀석의 능력도 소용없다.

정정당당하게 얼굴로 검을 막아라!

“크학! 칵! 빌어먹을 녀석이!”

놈도 이건 무시할 수 없는지 얼굴을 구기며 몸을 비튼다.

힘이 워낙 강해 잠깐이라도 힘이 빠지면 풀려날 거 같았으나 악으로 버텼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던 놈이 훽, 고개를 비튼다.

-빠드드득!

“…미친놈.”

“흐흐. 으흐흐흐.”

놈이 손잡이를 물어서 막았다.

치아에서 불똥이 튀는 모습이라.

이가 모조리 뽑혀도 이상하지 않건만 놈은 그걸 해냈다.

그 결과 잇몸에서 피가 올라오고 얼굴은 흉악하게 일그러졌지만 놈은 대수롭지 않은지 검을 문 채로 몸을 회전시켰다.

강제로 검을 빼앗겠다는 몸부림.

다른 사람이 했다면 헛짓거리라고 했겠지만 놈이 하면 말이 다르다.

-파앙!

힘껏 검을 잡아당기는 타이밍, 녀석이 입을 벌렸다.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나는 찰나.

“재밌군! 재밌어!”

반동을 주며 날 떨쳐 낸 녀석이 내 멱살을 잡고 복부에 니킥을 꽂았다.

가뜩이나 진창이었던 속이 한 번 더 꼬인다.

눈이 붉어지도록 힘을 줘 버텼으나.

“이제는 내 차례인 거 같군? 동의하나?”

“아니.”

“그거 안됐군.”

[도전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내가 회복하는 것보다 녀석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놈의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더니.

-빠아아악!

웅크렸던 몸이 솟구치며 어퍼컷을 날렸다.

전력을 다한 일격에 머리가 핑 하고 돈다.

잠깐이지만 시야가 하얘졌다.

지금까지 파고들었던 땅 구덩이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건 고작해야 1초면 충분했다.

‘빌어먹을, 몸이 말을 안 듣네.’

제대로 한 방 먹어서 그런가.

움직여야 한다 생각함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맞을 때 척추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한계에 다다른 몸이 퍼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에에엑!”

저 멀리, 섹시가이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갔던 덕춘이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것을 끝으로 기억을 잃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쿠궁.

-쿠구구구궁.

몸을 울리는 진동과 함성, 나를 간지럽히는 덕춘이의 혓바닥의 감촉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엄습해 오는 통증과 어지러움.

‘젠장. 얼마나 기절했던 거지?’

체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단 10초만 주어져도 수많은 일이 벌어지는 게 전투다.

아예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최상위급 혼돈의 파편과 연달아 싸우는 건 몸에 엄청난 부담감을 주었다.

98층까지 오른 등반가들도 쓸어버리는 놈들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강해져야 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잘했다.

이딴 위로는 필요 없다.

그걸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꿈틀.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

혹시나 죽어서 안전지대에 떨어진 게 아닐까 의심도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다행이다.

이미 구사일생을 한 번 사용해서 부활할 방법이 없었는데.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역시.

“전방을 견고히 하세요!”

“알겠습니다!”

“버텨라! 부상자는 뒤로 빠져!”

오필리아가 왔다는 뜻이었다.

태그 매치.

시간을 끈 보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냥냥펀치]: 스마일캡이랑 마그마 요정도 찾음!

[냥냥펀치]: 애들 상태가 말이 아닌뎅?

[정수리 핥짝]: 지금 오필리아지? 딱 기다려라, 도우러 간

[냥냥펀치]: 핥짝이도 마취(물리) 완료!

다행히 냥펀이 구조에 성공한 모양.

다만, 전투 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저 자식, 스마일캡이랑 마그마 요정을 공격하고 이쪽으로 왔었군.’

사방으로 흩어졌길래 누구 한 명은 멀쩡할 줄 알았더니만.

오필리아는 싸우는 소리를 듣고 바로 합류해 온 모양이고.

나도 움직이기는 해야 하는데.

“그에에.”

“어어. 못 움직이겠다. 이렇게 갈린 게 얼마 만이야.”

몸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뒤집는 것도 못 하겠다.

그만큼 누적된 피로와 대미지가 컸다.

오필리아가 끝을 내 주면 좋겠는데.

[발칸이 노블 나이트를 신념의 악몽에 가둡니다.]

[신념이 강할수록 악몽이 거세집니다!]

[현실과 악몽이 격리됩니다!]

보니까 그러기는 힘들 거 같았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큐브.

그 안에 노블 나이트가 갇혔다.

유일하게 오필리아가 신성의 영역을 만들어 저항하고 있었으나.

“그대는 다음 차례이니 기다리거라.”

바로 빠져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로 발칸 역시 악몽에 진입하지는 못하는 거 같지만.

“훌륭하다. 이만큼이나 버티다니. 그 정도 발악이면 충분하다.”

내게로 다가오는 녀석.

더 이상 놈을 막아설 사람이 없다.

하지만.

“뭐래. 아직 안 끝났는데.”

고작해야 팔을 허우적거릴 정도의 체력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인벤토리를 엽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남겨 두었던 아이템.

난 그것을 집어 던졌다.

녀석만큼이나 진한 혼돈을 내뿜는 그것을.

-후웅.

허공으로 날아가는 큐브.

때로는 재앙을 불러오고 때로는 혼돈의 파편조차 없애 버리는 도박성 아이템이 열렸다.

[카오스 박스(???)가 오픈됩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상자깡이다, 망할 녀석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