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32화 (732/740)

732화 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더라.

모르겠다.

그럴 여유가 있던 적이 별로 없어서.

바닥에 박힌 돌멩이 때문에 허리가 쑤셨지만 뒤척일 수도 없다.

조금만 움찔거려도 엄청난 통증이 일어났으니까.

회복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아, 죽겠네.”

아니군.

정정한다.

한 번 죽었다.

구사일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96층 안전지대에 있었을 거다.

그만큼 강력한 폭발이었다.

며칠 동안 박아 넣은 시한폭탄을 일제히 터트렸으니.

눈알만 간신히 굴려 주변을 살폈으나 보이는 건 뒤집힌 땅이 전부.

간혹 운 좋게 흔적이 남은 성채의 파편이 데코처럼 박혀 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죽었냐?”

【…조만간.】

뮬랑 카센이 있었다.

이전에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죽었다 보는 게 맞을 정도의 상태다.

실제로도 죽어 가고 있다.

천천히 부서져 내리는 육신.

거대해졌던 영혼마저 빛이 되어 산화하고 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어떻게든 영역을 부풀려 방어를 하려 했지만.

‘나한테 막혔지.’

새롭게 생겨난 스킬, 절대 영역.

그 범위만큼은 혼돈의 파편이라도 자신의 힘을 부릴 수 없으니까.

한마디로 직격당했다.

말 같지도 않은 폭발은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끄으으읍.”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이 박살 난 느낌이지만 어떻게든 움직였다.

내성 스킬 중에 고통 내성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상체만 간신히 세운 채 뮬랑 카센을 바라봤다.

바닥에 처박힌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하얗다 못해 눈부실 때까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은 밝았다.

나라면 죽기 직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이 결말을 만족스러워한다는 건 알겠다.

뮬랑 카센은 패배했고 엘리니는 살아남았다.

그 과정이 어떻든 그녀를 막아 냈다는 건 사실이다.

-띠링.

[갓블레스]: 여기 무슨 일이 있던 거죠?

[갓블레스]: 스마일캡 쪽에도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후보자를 보호하고 있을게요

오필리아와 노블 나이트 역시 엘리니와 합류했다.

한발 늦었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나와 뮬랑 카센이 이곳으로 온 이상 그곳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는데.

‘한시름 놨군.’

혹시 아는가.

갑자기 등장한 숭배자 녀석이 엘리니를 노릴지.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이 놔줄 거 같지는 않다만.

‘이 부분도 신경 쓰이는데.’

미간을 찌푸렸다.

숭배자가 공격해 온 건 확인했다.

그 과정 중에 그들이 데리고 있던 후보자가 당한 것도 알겠고.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왜 소식이 없는 거지?’

숭배자가 그렇게나 강한 건가.

아니면 다른 일이 생긴 걸 수도 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강했으니 어떻게든 잘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

지금은.

“만족하나?”

이 녀석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마지막 순간, 잠깐의 순간은 내줄 수 있다.

어쩌면 미련일지도 모른다.

받는 입장에서는 값싼 동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고.

【가질 수 없었던 과거를 얻었다. 그거면 족하다. 엘리니는 내 영혼의 일부이니.】

후련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그녀였으나 알 수 있었다.

‘거짓말.’

엘리니는 그녀의 과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래.

만들어졌다.

결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알고 있을 거다.

98층의 진명은 다른 세계선의 나.

탑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꾸며 낸 연극.

“다시 한번 묻지.”

그녀는 혼돈의 파편.

시스템조차 어쩌지 못하는 탑의 괴물이었으며 이곳에서 죽더라도 어디선가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

애초에 혼돈의 파편이란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인과관계도, 존재의 명확성도 비현실적인 경계에 걸쳐 있다.

델버튼 또한 나와의 내기에 패배하고 죽었으나 등반을 하며 다시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마도 뮬랑 카센 역시 탑 어디에선가, 혹은 멸망하고 있는 어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의 미련은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죽음도 온전한 결말을 내지 못하니까.

한순간의 자기만족.

짧은 순간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추억 정도로 끝나겠지.

“그걸로 충분한가?”

그녀에게, 동시에 내게 묻는 질문이었다.

98층에서 보고 싶었던 걸 보았으니 이걸로 충분하냐는 말.

시스템마저 선업을 쌓았다고 공표한 과거의 영웅이 이대로 끝나는 게 옳냐는 물음.

그녀는 다른 혼돈의 파편과 다르다.

혼돈에 집어삼켜졌음에도 인격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델버튼도 혼돈의 파편이 되며 인격이 바뀌었다.

다른 혼돈의 파편도 괴팍하기는 마찬가지.

인간으로서 혼돈의 파편이 된 자 중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이들 중에는 그렇지.’

선업으로 쌓아 올린 영혼의 격.

그것이 그녀의 인격이 타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존재가 진짜 멸망을 가져올까.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생명을 불 싸지르는 재앙이 될까.

확답은 할 수 없다.

다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은 있어.’

어디까지나 가능성.

혼돈의 파편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자신의 판단을 기반으로 한다.

언젠가 우리 세계에 나타날지 모르는 그녀에게 딜을 걸 생각이다.

그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과거라며. 그럼 미래도 있어야지.”

【그게 무슨?】

“먼저 이것부터. 네가 죽으면 98층이 클리어되겠지. 이후 넌 다시 살아나나?”

【아마도. 혼돈의 파편은 탑에 귀속된 존재. 탑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소멸하지 않는다.】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이러니 멸망의 파발이라 불리지.

“엘리니도 사라지겠군. 98층의 시련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뮬랑 카센의 기운이 날카로워진다.

온몸이 무너지고 있음에도 놀랄 만큼의 박력이 느껴진다.

기껏 만든 추억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니 거슬리는 게 당연하다.

“엘리니. 계속 살아갈 방법이 있어. 네가 가서 보살펴 줘. 너처럼 되지 않게.”

해답은 간단하다.

결국 엘리니가 계속 살아갈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뮬랑 카센 역시 엘리니에게 집중할 수 있으면 98층에 머무를 필요가 없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이 98층을 깰 수 있을 거 같지는 않거든.’

탑은 생성될 때마다 다른 형태를 띤다.

과거에 98층을 차지했던 존재는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뮬랑 카센이 지배자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 올라왔고 협공을 통해 뮬랑 카센을 빈사 상태로 몰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는?

나와 멤버들도, 노블 나이트와 루키 그룹, 요정 클럽도 없이 위로 올라오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뮬랑 카센을 98층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이다.

더불어 바깥세상을 위한 안전장치도.

“나도 엘리니가 이렇게 사라지는 건 원치 않아. 도와줄게. 그러니까 너도 나 좀 도와주라.”

아공간 아이템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 내용은 단 하나.

-이블아이(본명: 조현수)의 세계를 공격하지 말 것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은 혼돈의 파편.

뮬랑 카센 한 명이라도 막을 수 있으면 멸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지 않을까.

계산적이라며 욕해도 상관없다.

그래야 멸망을 이겨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생각이다.

명성, 양심, 자존심.

그런 것들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을 얻어야 한다면 말이다.

[계약서에 서명을 완료했습니다.]

[계약 당사자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펄럭.

계약서를 녀석에게 날렸다.

“계약은 네가 직접 확인하고 결정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 있던가?”

말문이 막힌 듯 그녀가 침묵한다.

적어도 난 엘리니와 뮬랑 카센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95층으로 가서 기다려.”

-파스스스.

절반이 넘게 가루가 되어 사라져 가는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말을 끝으로 뮬랑 카센의 몸이 흩날렸고.

【그때는 그대를 친우로 맞이하겠다.】

마지막 말을 남기며 완전히 사라졌다.

여전히 삭신이 쑤셨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엘리니를 살아가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

“뒤는 존 트레일러에게 맡겨야겠군.”

95층의 지배자로 앉혀 놓은 현자가 호문쿨루스로 되살리는 방법뿐이다.

탑에서 살아갈 권한을 얻으려면 NPC가 되어야 하니까.

알리오스의 연인인 페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혼석은 이미 있으니 영혼을 확보한 후, 갈매기를 통해 보내면 될 거다.

뮬랑 카센 또한 다시 등장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테니 시간은 얼추 맞겠지.

이제 내가 해야 할 건.

‘엘리니의 동의를 받아야지.’

영혼석이란 게 멋대로 남의 영혼을 뽑아다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설득이 필요하다.

* * *

의외로 설득은 쉽게 끝났다.

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뮬랑 카센의 말대로 엘리니가 그녀의 영혼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스스로가 엘리니가 살아가길 원하는 만큼 그에 반응한 걸지도.

“갈매기. 95층, 존 트레일러한테 편지랑 같이 전해 줘.”

“그럼요! 언제나 갈매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갈매기의 갈매기한테 영혼석과 간단한 상황이 적힌 편지도 넘겼으니 여기서 해야 할 건 끝났다.

오필리아의 노블 나이트와 합류해 멤버들과 스마일캡 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일이 벌어졌다.’

아직도 연락이 없다.

적어도 한 명은 커뮤니티를 통해 연락했어야 정상이다.

가뜩이나 불안감이 올라가는 와중.

-파지지지직!

[시스템이 98층의 클리어를 보류합니다!]

[막대한 혼돈이 결과를 뒤집습니다!]

[98층의 지배자의 부재를 확인.]

[탑과 함께하는 자의 건의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98층 클리어 알람이 깨지며 버그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불길하게 깨지고 흔들리는 홀로그램.

저게 뜻하는 바가 뭔지는 내가 잘 안다.

이미 여러 차례 버그 메시지를 봐 왔으니까.

‘강력한 혼돈의 개입.’

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언가가 98층을 건드리고 있다.

그 대상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플래티넘 숭배자.

그 녀석이 어떻게 저런 짓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건.

“이게 대체 무슨.”

“…조심하세요. 뮬랑 카센이 끝이 아닌 거 같아요.”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필드와 바닥을 나뒹구는 장비들.

누군가의 혈흔과 익숙한 물건들까지.

화무선의 부채.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탈모맨의 보타이.

마그마 요정이 쏟아 낸 게 분명한 용암과 수많은 검흔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그 중앙에 찌그러진 시체 하나.

[루녹 플라나]

-플래티넘 등급 숭배자!

-의 시체입니다!

여전히 요동치는 홀로그램에 떠오르는 메시지.

[혼돈의 파편, 악몽과 도전의 발칸이 98층의 지배자를 자처합니다!]

빌어먹을 숭배자가 혼돈의 파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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