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나
98층, 대평원.
그곳을 가로지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나이와 성별, 행색은 가지각색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조금만 더 힘냅시다.”
“저쪽에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힘든 사람은 잠깐 수레에 오르시오! 내가 끌겠소!”
꾀죄죄한 몰골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거였다.
피난민.
이블아이가 차지했던 성채의 약탈자들과 맥이 있던 비탈길 마을에서 온 주민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일반인이 섞여 있었으나 절반이 넘는 인원이 등반가 출신.
설사 탑에 오른 적이 없더라도 수련을 통해 경지에 이른 이들이 여럿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라는 말에 서둘러 움직인 이들.
-구구구구궁.
그 발걸음은 조금 전 울린 굉음에 더욱 빨라졌다.
자신들이 떠나온 곳에서 들리는 진동과 소음은 한참이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을 때는 모두가 두려움에 질릴 정도.
그럼에도 패닉에 빠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던 이유는.
“이블아이 경의 말이 사실이었소. 그가 버티고 있을 때 더 가야 하오.”
“들었지? 녀석들아! 빨리빨리 움직여!”
기사인 맥과 약탈자들의 우두머리인 헥톤이 이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덤벼드는 몬스터와 강도 무리가 종종 나타났으나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헥톤이 고개를 돌렸다.
‘진짜 괴물이었군.’
자신을 손도 쓰지 않고 제압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블아이는 강했다.
살면서 본 어떤 이보다 강했다.
내심 아무리 그래도 혼돈의 파편에게는 안 될 거라 생각했지만.
‘저게 진짜 사람이 해낸 건가.’
굉음이 울린 하늘이 뻥 뚫려 있는 걸 보니 약간의 기대가 섞이기도 했다.
그 기대감과 알게 모르게 쌓인 유대감이 그를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게 만들었다.
약탈자 무리를 이끌었던 만큼 난폭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었기에 특별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이블아이 경의 희생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소. 다들 더 힘내시오. 헥톤, 그대도 도와주시오.”
“떨어질 놈들은 떨어져야지. 살 사람은 살아야 맞는 거 아닌가?”
“살 기회를 준 게 이블아이 경이라는 것이오. 그는 우리 모두가 살길 바랐소.”
“됐다. 쫑알쫑알 기사 놈들은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건지. 검보다 혓바닥을 더 잘 놀리는 거 같군.”
-따악!
“악! 이 꼬맹이가!”
“아니거든요.”
냉큼 몸집만 한 검으로 헥톤의 머리를 때린 엘리니가 인상을 썼다.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느낌.
“아니, 이 꼬맹이는 지켜 줄 사람도 없으면서 왜 자꾸!”
“어허. 진정하게. 애한테 왜 그러나?”
“내 말이 틀렸나? 그 이블아이도 지금쯤이면 죽었을 건데!”
“아저씨 안 죽었어요!”
헥톤의 말에 엘리니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 또한 욱해서 말한 거기는 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이블아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굳이 죽었을지 모른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싸늘한 시선에 그도 멋쩍게 헛기침을 한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보호자가 왜 없소. 내 제자인데.”
맥이 엘리니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탁.
중간에 엘리니가 손을 쳐 내기는 했지만 못 본 척했다.
“아무튼 서두릅시다.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벌어진 거 같으니.”
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일정 수준이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재해인 전투.
가능한 한 멀리.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멀리 가는 게 사는 길이었다.
떠들 체력까지 아끼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
“뭔데? 저기 뭐, 어어!”
“온다! 뭔가 온다!”
부르르.
몸이 떨리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이상을 감지한 이가 하늘을 가리켰고.
“뮤, 뮬랑 카센이다!”
기다란 빛을 뿌리며 빠르게 가까워지는 인형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경악하며 대형을 갖춘다.
노약자들이 물자를 지키며 한곳에 뭉쳤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상대조차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긴장한 이들 속, 엘리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엄청난 속도.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부담감을 주었다.
공기의 저항과 가중되는 압력.
피가 쏠려 온몸이 저릿하다.
숨도 잘 안 쉬어지고.
“그, 그에에.”
“조금만 버티자, 덕춘아.”
운이 좋았다.
막대한 대미지를 입고 다 죽어 가던 뮬랑 카센의 날개가 진동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후보자가 죽었다!’
푸른 불꽃.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으니까.
뮬랑 카센이 날아오르기 직전, 덕춘이가 녀석을 붙잡았고 나 역시 덕춘이를 안고 녀석을 따라 날아갈 수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스마일캡과 함께 있던 후보자가 죽었다.
이유는 모른다.
숭배자한테 당한 걸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그건 상관없다.
그곳에 있는 후보자가 죽었다면 뮬랑 카센이 향할 곳은 확정된다.
‘엘리니.’
남쪽으로 대피하고 있는 엘리니를 향할 게 분명했다.
이를 악물었다.
여기부터는 혼자다.
멤버들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너무 멀어.’
이미 며칠 전에 출발한 피난민 무리다.
일반인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이 등반가 출신이었으며 뮬랑 카센을 피해 이동하는 만큼 서둘렀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내 부탁으로 이곳으로 향한 오필리아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거 같고.
이 상황에서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이곳으로 온다?
그건 지나친 욕심이다.
그러니.
‘여긴 내가 끝을 내야 한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뮬랑 카센 역시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도 의문일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본신의 힘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나 역시 아스트랄 레인보우의 반작용으로 주력 스킬 대부분을 못 쓸 지경이지만 할 만했다.
특히나 가장 거슬렸던 저거.
-파스스스.
뮬랑 카센의 빛의 날개가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다.
지금도 억지로 힘을 쓰는 게 느껴진다.
속도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역시 그렇고.
그럼에도 아찔할 정도의 속도인 건 변함이 없지만 이 정도면 상대할 만하다.
순간이동급은 아니니까.
-꾸우우욱!
전신에 힘을 줬다.
저 멀리 작게 보였던 점들이 커진다.
익숙한 얼굴들.
예상이 맞았다.
뮬랑 카센이 향한 곳은 엘리니가 있는 피난민 무리.
혼돈의 파편을 보고 경악한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도망쳤음에도 기어코 따라붙은 멸망의 확정자는 공포의 상징이나 다를 바 없으니.
상대조차 되지 않을 텐데도 무기를 겨누는 맥과 헥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뒤에 있는 엘리니마저 목검을 들고 있다.
“멈, 춰어!”
[오로라 빔(SSS) Lv.8]
[오로라 빔(SSS) Lv.8]
[오로라 빔(SSS) Lv.8]
-찌유우우웅!
뮬랑 카센이 날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오로라 빔을 쏘아 댔다.
파이어 밤만큼의 반발력은 나오지 않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폭발 계열 스킬이 봉인되다시피 한 상황.
녀석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거라도 쏴야 했으니까.
거기에 더불어.
[어스 월(S) Lv.MAX]
-콰과과과광!
연달아 벽을 세워 뮬랑 카센의 앞을 막았다.
격돌하는 순간 벽이 무너졌지만 약간의 저지력은 가질 수 있었고.
“이만 꺼져!”
녀석의 몸에 매달린 상태로 니킥을 날렸다.
정확히 복부에 박힌 공격.
그대로 나무를 타듯 다리를 녀석의 목과 몸통에 감고 회전했다.
고속으로 날아가는 속도 그대로 균형이 엉킨다.
관성은 그대로.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콰아아아앙!
추락.
“크하악!”
운석이 떨어지듯 땅에 처박힌 나와 뮬랑 카센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른다.
파스스슷.
한계까지 사용한 빛의 날개가 끄트머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온몸이 부서지는 와중 여기까지 날아온 건 녀석에게도 모험이었다는 거겠지.
“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강체와 강철의 의지, 물리 공격 내성 등의 보호 스킬이 발동됐음에도 속이 진탕 났다.
떨어지는 충격에 장기의 위치가 뒤바뀐 듯한 통증과 구역질이 올라온다.
뇌진탕도 살짝 왔나.
시야가 한순간 노래졌다 돌아왔으나 움직일 수는 있었다.
“아저씨!”
휘몰아치는 먼지구름 너머, 엘리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때였다.
-콰앙!
뮬랑 카센이 번개처럼 덤빈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나를 공격한 게 아니다.
엘리니를 노린 것이었지.
그걸 구경만 하고 있을 내가 아니었고.
-카가가가각!
녀석의 클레이모어와 혼돈검이 격돌했다.
불똥이 튀어 오르며 공기가 터진다.
“왜 애를 못 죽여서 안달이냐.”
입가를 비틀었다.
이거 가만 보니 악질이다.
볼일 있으면 나한테 보지.
-콰앙!
긁듯이 검을 당겨 클레이모어를 끌었다.
옆으로 밀려난 틈을 노리고 프론트킥.
뒤로 주륵 밀려난 녀석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정형적이지만 강력한 일격.
물 흐르듯 뮬랑 카센이 클레이모어로 쳐 내려 했으나.
-촤아악!
앞으로 전진하는 것과 동시에 흙을 발로 찼다.
비겁하다면 비겁하고 얕은 수라면 부정할 수 없었으나 뭐 어떤가.
눈앞에 있는 적을 없앨 수 있으면 된 거지.
한 가지 내가 얕본 게 있다면.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법이지.】
마치 이럴 걸 알았다는 듯 녀석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고 감각으로 나의 검을 막아 내는 묘기를 보여 주는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겠지.
쉽게 갈 생각도 없었다.
어렵게 가도 된다.
이길 수만 있으면.
그리고 난.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이길 생각이다.
-쑤욱!
목을 노리고 찌르기.
클레이모어를 바짝 당긴 뮬랑 카센이 몸을 기울인다.
검의 가드로 찌르기를 넘기며 어깨로 몸통 박치기.
강력한 돌격에 충격이 들어온다.
단순히 검만 쓰는 게 아니라 이거겠지.
-촤악.
뒤로 미끄러지며 충격을 분산했다.
혼돈검을 한 손으로 쥐며 다른 손으로 녀석의 팔목을 잡았다.
그와 함께 녀석의 반대 팔을 발로 밀어냈으니.
【흐음!】
아무리 힘이 강한 녀석이라도 양팔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저 무식하게 큰 검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건 어이없지만 그 정도야 뭐.
“깎다 보면 떨구겠지.”
혼돈검으로 녀석의 팔뚝을 그었다.
와작!
그나마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완갑이 쪼개지며 팔뚝에 붉은 선이 생긴다.
여전히 단단하다.
하지만 베이지 않는 건 아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으면 끝날 때까지.
검강과 절삭, 영혼 찢기.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어 넣었고 거기에.
[홍예참(SS)]
-촤자자자작!
펠라인 스킬을 발동.
일곱 빛깔 잔상이 이어지며 힘을 더한다.
그에 질세라 그녀 역시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징벌]
-콰르르르릉!
확정된 일격!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찌르고 베고 휘두른다!
한 호흡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가고 내가 날린 광선과 그녀가 내린 징벌이 세상을 밝혔다.
빗나간 검이 땅을 때려 부수고 위로 튕겨 낸 일격이 구름을 조각낸다.
-쾅! 콰앙! 콰앙!
검이 튕겨지면 주먹을.
주먹도 통하지 않으면 멱살을 잡고 박치기를 날린다.
뮬랑 카센의 발끝이 내 발목을 때리고 날카롭게 들어온 팔꿈치가 턱을 노린다.
-찌유우우웅!
눈을 노리고 쏘는 오로라 빔.
허리를 내주고 내 어깨를 찍어 버리는 일격.
태산조차 부술 위력의 일 검이 내려꽂히며 토사가 파도처럼 솟아오른다.
그 공간을 넘어 수평 베기.
[검강]
[절삭(SSS) Lv.7]
[영혼 찢기(SSS) Lv.7]
-카앙!
뮬랑 카센의 영역을 찢으며 들어간 일격.
투구에 막혔으나 그녀의 머리가 크게 뒤로 넘어간다.
그러다 우뚝.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오는 그녀와 눈이 내 뒤를 향했다 내게 꽂힌다.
이미 일대는 초토화.
감히 이곳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는 엘리니의 시선과 호흡이 느껴진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쟤 보호자거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 역시 미소 지었다.
-쩌적.
내 검에 닿은 투구가 쪼개진다.
그와 함께 흘러내리는 푸른 머리카락.
얼굴에 난 상처.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릴 적의 모습.
엘리니와 몹시도 닮았다.
아니. 엘리니 본인이었다.
【그 말을 지켜라.】
[수많은 목숨을 구원한 최강의 기사!]
[그런 그녀도 더럽혀진 과거의 자신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꺾어라.】
[98층, 다른 세계선의 나]
【정점을 꺾은 자, 능히 자신의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고치고자 하는 괴물.
감히 스스로를 정점이라 부르는 존재.
뮬랑 카센이 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