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25화 (725/740)

725화 오필리아, 노블 나이트

성채의 꼭대기 성채 내성과 외성, 그 일대까지 붉은 마법진으로 가득 찼다.

바닥과 성벽, 위력은 줄겠지만 주변에 널린 나무와 바위에도 시한폭탄을 새겼다.

땅굴 이동을 사용해 지하 통로를 만들었고 그 내부까지 꽉 채웠으니.

“불꽃놀이 준비는 다 됐네.”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이곳은 초토화된다.

이 정도 수준이면.

‘나도 위험하겠는데.’

그만큼 공을 들였다.

약탈자와 마을 주민, 잠들어 있던 엘리니까지 맥을 통해 밖으로 내보낸 후 이 작업에 집중한 결과.

딱 한 번.

혼돈의 파편을 묶어 둘 수 있다면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변칙적으로 구분 폭발을 일으켜도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여기까지.

남은 건 다른 등반가들이 이곳으로 오는 걸 기다리는 것뿐이다.

원래라면 나도 엘리니를 데리고 있어야 했겠지만.

“괜찮겠지.”

“그에에.”

나는 그걸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일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다.

후보자들은 헤어지면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동안 후보자를 잃은 이들 모두 그러했으니.

시스템적으로 사라지는 건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건지 알아서 살아가는 건지는 모른다.

다만 엘리니와 함께 이동한 맥은 바바리안을 상대로도 싸울 수 있는 강자였으며.

‘약탈자 놈들도 약하지는 않아.’

기본적으로 탑의 중반 층까지 올랐던 놈들이 여럿 있으니까.

망해 버린 세상에서 이 정도 전력이면 상당한 가치를 가진다.

아무튼.

여기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적어도 혼돈의 파편의 타깃이 되지는 않을 테니.

슬슬 움직일 때다.

후보자가 없는 만큼 이곳으로 혼돈의 파편이 등장하지는 않을 거다.

지금 녀석은 후보자 사냥을 하고 있었으니까.

-파앗!

성채를 박찼다.

이곳은 함정이다.

녀석이 출현하면 끌어들일 장소지, 아무 생각 없이 죽치고 있을 곳이 아니다.

‘뮬랑 카센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지.’

그렇다면 후보자가 없는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다른 후보자가 있는 곳이 가능성이 크다.

[화무선]: 그자가 나타났소!

[마그마 요정]: 도망친다아아아!

[탈모맨]: 으잉? 방금 내 쪽에 모습 보였었는데?

[마그마 요정]: 어. 사라졌네

[냥냥펀치]: 님들도?

[정수리 핥짝]: 근데 잠깐 봤는데도 엄청 강해 보이더라

놀랍게도 놈은 주기적으로 위치를 바꾸며 모습을 노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행동.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가까이 왔다!’

녀석이 본격적으로 행동한다는 게 중요하다.

이미 마주친 이들이 있다.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남은 후보자는 다섯.

원래는 여섯이었으나 내가 엘리니를 보내면서 5명이 되었다.

후보자를 지키고 있는 인원들을 떠올렸다.

‘후보자 1번은 마그마 요정과 화무선.’

둘이 붙어 있으니 잠깐이나마 시간을 버는 건 가능하다.

‘후보자 2번은 스마일캡. 여긴 걱정 없겠군.’

녀석은 이미 뮬랑 카센과 1대1로 싸운 전적이 있다.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후보 3번은 냥펀과 핥짝이.

둘 다 후보자를 데리고 있었으나 합류하기 직전, 한 명이 증발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증발.

뒤따라오던 후보자 한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시스템의 개입이 강하게 들어갔다는 추측만 할 뿐이다.

어쨌든 여기도 일이 터지면 어떻게든 해결할 거다.

4번째 후보는.

[갓블레스]: 여기는 아직 문제없어요. 후보자를 보호하면서 가고 있어요.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

가장 많은 집단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다.

마지막 남은 후보자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

[니머리 탈모]: 도움! 도우우움!

“탈모맨이지. 역시.”

현재 스마일캡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홀로 보호자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이 녀석이었으니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섹시가이]: 탈모 형니이임! 제가 갑니다!

[마지막잎새]: 다 왔어요!

내 쪽으로 향하던 연합 사람들도 탈모맨을 향했다.

나 역시 그쪽으로 발을 박차려는 순간.

-움찔.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탈모맨에게 향하는 게 맞았다.

섹시가이와 마지막잎새가 합류하더라도 녀석은 강하니까.

나 역시 가세하는 편이 맞았으나.

“아니야.”

빠가각.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금의 혼돈의 파편은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다.

마치 후보자들을 한 번씩 봐 보겠다는 것처럼 모습만 잠깐 내비쳤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어디인가.

[쁘띠공듀]: 노블 나이트 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전해 줘용!

[냥냥펀치]: 아하! 뭔지 알겠다. 알았어!

[정수리 핥짝]: …너 그냥 정체 밝히고 직접 말하는 게 편하지 않냐?

[쁘띠공듀]: 공듀는… 환상의 존☆재에오… 당당히 나서면 신비로움이 떨어진다구여

[정수리 핥짝]: 너 이 새끼. 그래서 요즘 커뮤니티에서 조용히 있는 거지? 이제 탑에 남은 사람 몇 명 없잖아

[냥냥펀치]: 말하는 순간 특정되어버리는 공듀!

[니머리 탈모]: 근데 이쯤 되면 알 사람은 다 알 거 같…

[쁘띠공듀]: 닥쳐

[니머리 탈모]: ??

[정수리 핥짝]: ㅋㅋㅋㅋㅋㅋㅋ

[냥냥펀치]: 아 컨셉 지키라구~~

[쁘띠공듀]: 닥↗쳐↘욧!

순간 울컥했지만 일단 넘어갔다.

지금 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진짜 혼돈의 파편이 작정하고 날뛰면 저렇게 커뮤니티를 할 여유 자체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쿠우우우우웅!

숲 어딘가에서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리가 있음에도 느껴지는 저릿한 살기.

한없이 날카로우면서도 역설적으로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기운이다.

오필리아?

아니다.

그녀 역시 구원자라 불릴 만큼 선한 존재임은 분명했지만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신성력.

-우우우우우웅!

적의 공격에 화답하듯 피어오르는 선명한 신성력이 오필리아의 것이다.

저만큼의 힘을 끌어올렸다는 것은.

“마주쳤다는 거지.”

오필리아.

그녀와 직접 싸운 적이 있다.

대련에 가까웠지만 강한 건 확실했지.

당장 98층까지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이끌고 왔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혼돈의 파편을 잡아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나선다.

가능성이 있을 때 확실히 결착을 짓는 게 좋으니.

-콰아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리며 앞으로 날아갔고.

곧 노블 나이트와 대립 중인 뮬랑 카센을 볼 수 있었다.

-구우우우우.

일대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존재감.

허공에 떠오른 뮬랑 카센은 날렵하면서도 날카로운 갑옷이 가득했고 등 뒤로는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발키리.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그것이었으며 그 앞에 선 노블 나이트는.

‘수호자.’

오필리아를 지키며 거대한 방패를 든 이들은 팔라딘 그 자체였다.

온갖 성물을 몸에 두르고 축복으로 감싸져 환하게 빛나는 이들.

개개인의 개성을 포기하고 집단으로 하나가 된 이들의 움직임은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것이었다.

그 중앙에 선 오필리아 역시 막대한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SSS급 권능, 구원자가 빛납니다!]

[SSS급 권능, 기적의 파편이 짝을 찾아 나섭니다!]

[SS급 권능, 속삭이는 작은 빛이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

.

.

모든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자.

수많은 NPC들의 소망을 짊어진 계승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빛이 더욱 거세진다.

[칭호, 대천사의 후계자가 번뜩입니다!]

[칭호, 천황의 인도가 발동합니다!]

[칭호, 수호천사가 발휘됩니다.]

[칭호, 하나의 빛이 모든 효과를 강화합니다!]

그녀가 쌓아 온 칭호가 힘을 발휘한다.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탑을 오르는 이에게 내려진 권능과 쌓아 온 업적.

-파스스.

오필리아의 머리 위로 천사 링이 떠오른다.

내가 망구와 융합해 악마화를 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스스로를 천사화시키는 과정.

해양 생물은 오히려 물을 느끼지 못한다 하던가.

일대가 완전히 신성력에 잠기자 저릿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되레 온화하게 느껴진다.

“직접 찾아와 주어 고맙군요.”

그녀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이미 봤던 검이다.

오필리아를 대표하는 무구이자 멸망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상징.

[멸악의 신성검(SSS)]

-제6 천계의 대천사, 벨루악이 사용하던 성물.

-대악을 처단한 영웅의 검!

-멸망을 극복한 세계의 흔적이라 전해집니다.

그 엄청난 위용에도 뮬랑 카센의 눈빛은 차분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깊게 눌러쓴 투구에 보이는 거라고는 굳게 닫은 입술과 눈뿐이었으니.

뮬랑 카센의 시선은 여전히 고정되어 있다.

오필리아를 보고 있는 듯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 뒤를 보고 있다.

벌벌 떨며 오필리아 뒤에 있는 소녀.

엘리니보다 한두 살 많을까.

녀석과 많이 닮은 아이가 양손을 붙잡고 있다.

그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성물.

혹시 모를 상황에 있어 생명을 지켜 줄 안전띠였다.

후보자의 시선이 흩어진다.

등장한 혼돈의 파편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기댈 곳 없이 고립된 자의 불안인가.

그 감정의 동요가 어째서인지 느껴졌다.

-스스스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뮬랑 카센이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결의가 느껴지는구나.】

음성이 아닌 뇌리에 박히는 목소리.

이미 몇 번 겪은 적 있다.

킬더레스.

세계수이자 눈의 정령 여왕이었던 하이누.

혼돈의 파편, 하이덴과.

숭배자였던 유헤다와 데이본드.

그리고 하나 더.

‘탑.’

그것을 응시했을 때도 같은 경험을 했다.

종족도, 소속된 세력도 다른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그거 하나뿐이다.

탑에 종속된 무언가라는 것.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들이 그들이다.

존재의 격이 다르거나.

모종의 비밀에 다가선 이들.

뮬랑 카센의 검이 오필리아를 가리켰다.

【멸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오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툭 치면 터질 듯한 긴장감.

투구 속, 뮬랑 카센의 안광이 번뜩인다.

【가증스럽다, 붉은 불꽃을 가진 자여.】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하늘로 치켜든 클레이모어가 떨어진다.

심판하듯 간결하게.

검 끝이 오필리아를 겨누었고.

-구구구구.

-콰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졌다.

공간이 깨지며 닿을 리 없는 검이 노블 나이트를 강타한다.

솟아오른 바람에 찢어진 구름이 길게 이어졌고 목적지였던 대지는.

-쿠아아아아앙!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말 그대로 징벌.

없어져야 할 대상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충격에 일대가 초토화된다.

충격파만으로 산이 허물어지며 태풍과 같은 바람이 칼날처럼 휘몰아친다.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

[마왕의 오른쪽 날개(SSS)]

거세게 몸을 밀어내는 바람을 무시하며 날아올랐다.

전투가 시작됐다.

노블 나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한 일격이다.

그러나.

-파아아앗!

고작 일격에 당할 만큼 노블 나이트는 약하지 않다.

먼지가 걷힌 공간, 수십 미터가 넘는 6개의 천사 형상이 그들을 보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각기 다른 무기를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사들이 고개를 든다.

[묵시록의 파발(SSS) Lv.10]

유령 같으나 분명한 형체를 갖춘 거인들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른다.

그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칭호, 면죄부가 죄가 없음을 선포합니다!]

[혼돈이 징벌 대상으로 선정된 것을 거부합니다!]

오필리아 또한 혼돈을 사용한다.

칭호의 효과와 더불어 뮬랑 카센의 징벌을 무시한 것.

그뿐일까.

지상에 모인 노블 나이트가 진을 쳤으니.

[집단 스킬, 멸악 선포(SSS) Lv.9]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려와 뮬랑 카센을 비추었다.

마치 신의 부름을 받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으니.

[모든 공격이 지정 대상에게 향합니다.]

그것은 좌표이자 벗어날 수 없는 낙인이었다.

오필리아의 검이 움직인다.

형형한 빛을 내뿜으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참마의 일격(SSS) Lv.10+]

너무나 찬란해 낮임에도 세상이 어두워 보이게 만드는 일격이 나아갔고.

그 순간.

난 오필리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