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24화 (724/740)

724화 떠나다

바바리안을 해치운 후, 성채로 돌아와 엘리니를 가르치는 나날을 이어 갔다.

전에도 잠깐 느꼈지만 천부적인 재능이다.

‘이 정도면 놔둬도 알아서 배우겠는데.’

자신 키만 한 검을 붕붕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바바리안의 수장, 갈란을 상대하며 습득한 기술과 기본기를 바탕으로 알려 주기는 했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교보재로 사용한 녀석과 엘리니의 신체적인 차이 때문이다.

‘체급 차이가 너무 나지.’

바바리안의 평균 키가 2.5m다.

갈란은 그보다 더 컸고.

심지어 90층대까지 오르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녀석이다.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

그렇기에 나 또한 가능한 간단하고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 줬다.

“무릎 좀 더 굽히는 게 좋겠죠? 무게중심이 흔들리는데.”

“좋은 생각이야. 그렇다고 너무 그 자세에 습관 들지는 말고. 완력이 강해지면 저절로 감당될 테니까.”

“네! 아저씨!”

그걸 보고 그냥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조절하는 걸 보니 천재는 천재다 싶다.

특히나 이번에 내가 바바리안을 무찌르고 왔다는 소식을 듣더니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참고로 바바리안은 모두 흩어졌다.

갈란이 죽으면서 내게 수장 자리가 왔지만 당연하게도 거부했다.

위험부담은 성채 안에 있는 약탈자들로 충분하다.

괜히 이것저것 잡다하게 모아 두고 싶지 않았다.

“뒤는 맡기겠습니다, 맥 경.”

“물론이네! 이런 천재를 만날 줄이야.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내가 보기에는 엘리니가 그러하네!”

내 검은 지나치게 실전적이고 내 취향에 맞게 길들여졌다.

기본기를 다질 거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맥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낫다.

본인도 엘리니의 재능을 본 후로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었고.

-타앗.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채 꼭대기에 올랐다.

가장 높은 곳인 만큼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커뮤니티를 할 때는 이곳을 찾는다.

겸사겸사 주변 경계도 하고.

슬쩍, 근방을 주시한 후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네 개의 재해 중 하나를 해치우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바바리안을 포함해 2개의 재해가 더 사라졌다.

남부의 수인 무리와 화산을 타고 올라온 드워프.

화무선과 마그마 요정이 활약한 덕분이었는데.

‘그 과정에 휩쓸려 죽은 등반가가 몇 있어.’

운 나쁘게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가 당한 케이스였다.

몇 명 팀을 짰다면 모를까, 개인으로 움직이다가 재수 없게 걸리면 당하기 딱 좋았다.

특히나 흡혈귀 쪽은 더 그렇지.

비교적 직관적인 힘을 쓰는 수인이나 바바리안과 달리 그놈들은 온갖 해괴한 능력을 쓰니까.

나도 처음 상대했을 때는 짜증 났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초코쪼코가 당할 줄이야.”

98층에 오른 등반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실력자다.

나도 함께 등반을 해 봤으니 그 사실을 잘 안다.

반드시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혼돈의 파편도 잡을 힘이 있다.

“이번에 상대할 녀석이 확실히 강하군.”

“그에에.”

덕춘이도 동의한다.

그래. 스마일캡도 2번을 진 상대다.

탑의 꼭대기 부근에 있는 놈들이 보통 놈일 리 없지.

다만, 피해가 크다는 점이 걸렸다.

‘초코쪼코를 포함해 4명.’

혼돈의 파편에 당한 사람의 숫자다.

뮬랑 카센의 활동이 늘어난 결과.

이전보다 출몰 빈도가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그 과정에 후보자도 여럿 잃었다.

의외의 결과였다.

무려.

‘후보자와 헤어지기도 전에 등장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자체가 깨졌다.

그동안 스마일캡이 겪은 뮬랑 카센은 후보자와 헤어졌을 때만 등장했으니까.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위로 올라온 등반가가 많아서?

단순히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트리거가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한들 작전은 바뀌지 않지만.

“결국 후보자가 있는 곳으로 온다는 건 같아.”

나타나는 동선도 눈여겨볼 만하다.

[냥냥펀치]: 지도로 혼돈의 파편의 동선 찍어 봄 (사진)

[정수리 핥짝]: 규칙성은 없는데 점점 한 곳으로 다가가는 거 같다?

[니머리 탈모]: 여기 내 주변인데?

[냥냥펀치]: ㄴㄴ 탈모맨 방향인 것도 맞는데 공블아이 있는 쪽에 가까움

[정수리 핥짝]: 내가 봐도 그래. 탈모맨이랑 몇 명은 계속 자리 옮기잖아. 이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지점으로 이동했어

[냥냥펀치]: 물론 우연일 수도 있고, 언제 다른 쪽으로 바뀔지 몰라!

냥펀의 말대로다.

내 쪽으로 오는 거 같기는 하지만 이건 필연적인 결과다.

후보자들을 한곳으로 모으자는 게 내 아이디어였고 실제로 모이고 있었으니까.

후보자를 쫓아다니는 혼돈의 파편의 움직임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멤버들 말고 다른 이들의 생각도 비슷한 거 같다.

[스마일캡]: 상황이 바뀌었어. 녀석이 후보자 사냥을 시작했다. 계획을 앞당겨야 해. 이블아이 쪽으로 간다

[찌리리 요정]: 초코쪼코 일은 유감이에요

[화무선]: 염려치 마시오. 초코쪼코의 활약은 탑 밖에서도 이어질 테니

[송곳 요정]: 우리도 비슷한 결과 나올지 모르니까 방심 말자고

모이는 속도를 올리고.

[섹시가이]: 그럼 저희 먼저 형님한테 출발하겠슴다! 후보자가 목적이면 우린 상관없겠죠!

섹시가이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녀석의 목적이 바뀌었으니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건 후보자를 잃은 이들.

원래라면 가장 먼저 뮬랑 카센의 타깃이 돼야 했었을 사람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가장 안전한 입장이니.

만약 쉽게 업혀 가려 했다면 잠적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마지막잎새]: 서두르면 이틀 안으로 도착할 수 있어요!

우리의 쁘찡연합 중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남은 인원을 살폈다.

나를 포함한 멤버들 총 4명.

루키 그룹 2명.

요정 클럽 3명.

오필리아를 포함해 노블 나이트 5명.

연합 사람들 2명.

종합 16명.

사실 이 정도도 많이 살아남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충분한 숫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군.’

다른 멸망한 세상 중에 99층까지 오른 이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 많을 거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등반을 하면서 99층까지 오른 NPC들은 소수였으니.

달리 말하면.

“모두 98층을 기점으로 갈려 나갔다는 뜻이지.”

-타앗.

커뮤니티를 끄고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이 망하면서 정보 교류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조금씩 살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오는 이들도 있었으며.

“내 사촌이 저기 산맥 너머에 사는데 글쎄, 하늘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졌다는군.”

“뮬랑 카센이라는 이름을 아나?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던데.”

“아아. 이야기 들어 봤지. 남쪽 왕국을 무너트린 존재 아니던가.”

아름아름 여러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중에는 모호한 것도 있고 과장되거나 와전된 것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수많은 재앙과 재해.

그것들을 제치고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뮬랑 카센.

‘이젠 숨기지도 않는 건가.’

뭐, 이상할 것도 없지.

스스로를 숨길 이유가 전혀 없으니.

“대장님, 저희는 괜찮을까요? 종종 서신을 주고받던 성채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단순 소문만 퍼진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연락을 하던 곳에서도 신호가 왔지.

동쪽에 위치한 산채와 도적들로 이루어진 약탈단 3곳이 증발했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소규모로 버티던 이들도 무너져 내렸고 그나마 왕국 행세를 유지하던 남쪽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진정 멸망을 피할 방법은 없는가!”

“자네 그 소식 들었나? 틸리반 왕국의 영웅도 죽었다더군.”

“마굴에서 살아온 용병왕도 시체 하나 남기지 못했다고 하니 말할 것도 없지.”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소문은 말보다 빠르다고 숨기려야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며칠 안에 전장이 된다.

일반인은 살 수 없다.

아니. 등반가 출신이더라도 태반이 죽을 것이며.

‘이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살려고 온 사람들이지.’

내가 오기 전 성채를 차지하고 있던 약탈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며칠째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비교적 성채 내부 쪽에 머물고 있던 엘리니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내게 찰싹 붙으며 위를 올려다보는데 얼굴이 창백하다.

“아저씨…….”

평소에는 대담한 녀석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하나.

엘리니 또한 멸망을 피해 도망치던 외부인 중 하나였으며.

‘최근 사라진 왕국이 엘리니의 고향이야.’

엘리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알게 된 사실.

남부에 있던 왕국에 엘리니의 고향이 있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작은 마을.

실제로는 부속 마을이라 보는 게 맞았다.

영지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개척지였으니까.

한번 당한 자는 자기 것을 빼앗은 자에게 두려움을 가진다.

그게 누구든.

객관적인 힘의 격차가 어떻든 그때의 경험이 발목을 붙잡는다.

이 시대에는 그래.

‘멸망의 흐름 자체가 그렇겠지.’

굳이 몬스터니 재앙이니 가를 필요 없다.

그것 모두 멸망의 전조일 뿐이니.

그런 의미에서 혼돈의 파편은.

‘멸망을 대표하는 존재.’

엘리니가 겁을 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근래에 들어 유독 강해지는 것에 관심을 보이더니 마음속 불안감 때문이었나.

가볍게 엘리니의 머리를 누르며 사람들을 불렀다.

결정을 내렸다.

-웅성웅성.

내 지시에 따라 성채에 모인 이들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온 외부인들과 바바리안에 마을이 파괴된 주민들까지 모여 근 400명이 이곳에 있다.

‘앞으로 최대 5일. 98층에 올라온 모든 등반가가 모인다.’

확정적으로 이곳에 혼돈의 파편이 온다는 뜻이었고.

“5일 내로 이곳에 혼돈의 파편, 뮬랑 카센이 출현한다. 미리 말한다. 떠날 사람은 떠나라.”

난 그 사실을 알렸다.

너무나 간결해 이해가 늦어지는 문장.

눈을 꿈뻑이던 이들이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갑자기 떠나라니요!”

“여기 아니면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사람들이 아우성친다.

예상은 했다.

말 한마디 했다고 얼씨구나 하면서 터전을 버릴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이미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고향을 버리고 온 외부인이었지만 여전히 살아갈 곳을 찾는다.

다시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잃었던 것을 또 잃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계속해서 줄어드는 인류의 영역을 따라 구석의 구석까지.

더 이상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안다.

하루하루 잘 곳을 찾아,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삶이 얼마나 구차하고 힘겨운 것인지.

나 또한 대격변의 시대 때 겪어 봤으니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그랬을 것이니까.

그게 비록 시스템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강제할 생각은 없다.

그저 사실만을 전달할 뿐.

“다시 한번 말한다. 며칠 내로 이곳에는 혼돈의 파편이 등장한다.”

확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껏 모아 온 식량, 물품, 약재와 생활 용품 모두 가지고 떠나라. 가능하면 남부로 떠나라.”

“하지만 남부는 왕국이 무너진 곳 아닙니까!”

“그곳에 가는 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렇겠지.

그리 느껴지겠지.

이들은 모르고 있을 테니까.

뒤늦게 들은 소식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왕국을 무너트린 혼돈의 파편은 이쪽으로 방향을 틀고 수인들은 이미 무찔렀다는 사실을.

정보의 부재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활로마저도 죽음으로 향하는 통로로 보이게 만든다는 것을.

“대장님, 같이 떠나지 않으시고요?”

헥톤이 슬며시 내게 물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내가 다가오는 위협을 막아 줄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머무는 것이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민.

나는 이곳을 떠나기 위해 머무는 등반가.

그 간극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격차가 있었고, 그건 설명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나는 떠나지 않는다. 혼돈의 파편을 막는다.”

사실을 말하되 그들의 마음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떠나라고.

그게 가장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사람들의 눈에 동요가 깃든다.

동시에 의심도.

생각이 많을 거다.

모든 물자를 가지고 떠나는 것. 확실히 솔깃하다.

내가 혼돈의 파편을 막는다면 생존 확률도 올라간다.

다만.

‘내가 이들을 미끼로 쓰려는 건 아닌가 의심하겠지.’

물자까지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구태여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건 그냥.

“선택지는 줬다. 선택은 각자의 몫.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은 각자의 결단이다.”

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하기 위한 변명이자.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를 방해한다면 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혹시 모를 변수를 제거하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다.

생각해 봤다.

최근 느낀다.

난 수많은 사람을 통솔할 재목은 아니다.

나 자신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무리 전체보다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우선으로 챙기는 성향이 강하다.

소규모, 가끔은 덩치가 꽤 큰 무리를 이끌고 돌아다닌 적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으며 명확한 적을 치기 위한 전투 집단이었다.

일반인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결집체가 아니라.

98층에 올라오고 느꼈다.

‘밖에 나가면 정부는 안 무너지게 해야지.’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무너트리면 정부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일상이 무너진다.

내가 전부 수습할 게 아니라면 구색은 남겨 놔야 한다.

뒤에서 협박하든 보복을 하든 하면서 뻘짓 못 하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여기서도 그러고 싶다만 아쉽게도 그럴 기관도 인력도 없다.

“이틀 주겠다. 떠날 사람은 떠나라.”

그 말을 끝으로 난 등을 돌렸다.

이틀이 지난 아침.

성채에 남아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모두 떠났다.

엘리니까지도.

아니.

맥에게 부탁해 떠나보냈다.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정을 너무 많이 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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