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인간 외
성채 위, 난 가만히 능선 너머를 바라봤다.
올라오는 연기와 미약하게 들리는 북과 나팔 소리.
들어 본 적 없는 운율의 연주였으며 미약한 진동은 성벽 위에 있어도 들렸다.
“시야가 좁았군.”
“그에에.”
사람은 결국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고들 이야기한다.
보다 넓은 곳을 겪고 시야를 넓히라는 뜻도.
다른 대상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도.
모두 다양한 가능성을 보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내가 실수했군.’
미리 떠올리지 못한 변수다.
아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인류의 시선으로 98층을 바라봤으니까.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건 몬스터와 재앙, 혼돈의 파편이라 예측했다.
부랑자와 외부인들도 그 안에 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느끼기에, 파악하기에 98층에는 90층대까지 오른 NPC가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대장님, 야만인들이 몰려옵니다.”
적어도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인류의 영역에는 90층대 강자가 없다.
다만, 범위를 인류 밖까지 넓힌다면?
‘다른 종족 중에는 있는 줄 몰랐지.’
놀랍게도 90층대까지 오른 NPC가 존재한다.
야만인.
정식으로는 바바리안이라 불리는 아인종.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이유는 별거 없다.
본인들이 있던 곳이 살 수 없게 됐으니 이쪽을 차지하려는 것뿐.
바바리안뿐만이 아니다.
[냥냥펀치]: 여기 엘프도 있었냥? 강한 애도 섞여 있는 거 같은뎅
[마그마 요정]: 미친! 드워프들 화산 분출 타고 위로 올라오는 중! 다 무장했어!
[초코쪼코]: 여긴 흡혈귀 등장. 일단 자리 좀 피한다?
[정수리 핥짝]: 야! 스마일캡! 이종족 있다고는 안 했잖아!
[스마일캡]: 그야 나도 오늘 처음 봤으니까. 애초에 난 혼돈의 파편 만날 때까지 평균 일주일 걸렸어. 딴 데 볼 시간 없었다고
각 종족이 살 곳을 찾아 몰려오고 있었다.
스마일캡도 이종족의 침범은 예상하지 못했다.
말마따나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떻게 예상할까.
살짝 아쉽다.
주변 일대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정세를 살폈다면 알았을 수도 있는데.
“그에에.”
“알아. 결과론적인 이야기인 거.”
그래도 소득은 있다.
부랴부랴 성채에 있던 이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모았고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륙 전체를 봤을 때, 인류의 영역은 중앙.
그 너머에 이종족과 아인종의 영역이 존재한다.
바바리안은 북부.
드워프는 지하.
흡혈귀는 동부.
남부는 수인이 존재했고 서부는 마물의 땅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녀석들이 사는 영역은 멀리 떨어져 있단 말이지.’
며칠, 몇 주일 걸어서 도착하는 곳이 아니라는 거다.
대륙 횡단.
그 정도 규모의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다.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98층에 올라오기 전부터 이쪽으로 이동 중이었다는 말이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등반가가 없는 층은 시련이 시작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이들이 고향을 버리고 이동할 이유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멸망 초기 수준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없었다는 뜻.
한마디로.
[쁘띠공듀]: 시스템의 개☆입이군용!
[정수리 핥짝]: 아무래도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냥냥펀치]: 여기 우리가 느끼는 거랑 흘러가는 시간이 다른 거 같앙. 외부적인 사건이 빠름
[니머리 탈모]: 뭔가 어려운 소리 하는 거 같은데, 점점 98층이 어려워진다는 거지?
[정수리 핥짝]: 오. 드디어 너도 지능이 소폭 상승했구나. 축하해
[니머리 탈모]: 하하하! 번뜩이는 지략가! 전략의 정수! 그게 바로 나지!
[냥냥펀치]: 와! 번쩍이는 정수리!
[니머리 탈모]: ?? 단어 조합이 이상한데?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거다.
시스템이 개입해서 저 녀석들을 뚝 떨어트렸다.
멸망 후반부, 고향을 떠났다는 설정을 던진 채로.
멤버 전용 채팅방에서 떠드는 녀석을 뒤로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알겠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간단하다.
‘이곳으로 후보자들이 모이고 있으니까.’
속전속결.
한 번에 모두 모인다.
그게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고, 탈모맨을 비롯해 인접해 있는 후보자를 데리고 있는 이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돌아다니고 있다.
괜히 근처까지 다가왔다가 강제적인 사고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우리의 의도를 파악한 시스템이 움직인 거다.
어쩌면 혼돈의 파편의 의지일 수도 있겠지.
이곳의 지배자는 녀석이니까.
“꼼수는 안 통한다는 거군.”
됐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행동에 신경이 쓰인다는 거니까.
일단은 저것 먼저.
“바바리안. 저 녀석들이 어디로 향하려나.”
나한테 오는 걸까.
탈모맨이나 다른 사람한테?
아직 거리가 있어 쉬이 속단하기 어렵다.
고민에 잠긴 사이, 약탈자 한 명이 달려왔다.
“헉! 헉! 대장님! 비탈길 마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비탈길 마을이라고 하면.
‘저번에 엘리니랑 같이 갔던 마을이군.’
맥이라는 기사를 만났었지.
“야만인들이 침공했답니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쪽으로 직진하려는 모양입니다!”
“선발대와 마주쳤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만, 놈들의 실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맥 경이 막고는 있지만 언제 뚫릴지 알 수 없습니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어디로 향하겠나. 이쪽으로 향하지.
굳이 마을까지 가서 난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인도적인 차원으로 마을 사람들만 이쪽으로 피신시켜도 충분하다.
여기는 성벽이 있으니 이걸 이용해 막으면…….
“아저씨!”
작은 손이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엘리니가 흥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손짓으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뭘까 저게.
잠시 엘리니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를 기웃했고.
“갑옷! 반짝반짝! 얼른!”
“헥헥. 엘리니 아씨, 말씀하신 거 가져왔습니다.”
냉큼 성채 부하 놈이 가져온 보따리에서 물건을 빼더니 몸에 둘렀다.
갑옷.
진짜 갑옷은 아니지만 나름 구색은 갖추었다.
심지어 투구랑 검도 있다.
검은 또 왜 저렇게 큰 거야.
그 와중에 갑옷 색깔이 좀 알록달록했다.
아무래도 펠라인 세트를 따라 한 거 같은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펠라인 세트를 장착합니다.]
-촤자자작.
“오. 오오. 저게 뭔, 씹.”
“대장님?”
“아저씨 멋있어요!”
극과 극을 달리는 반응을 보며 검을 뽑았다.
엘리니가 원한 게 뭔지 알겠다.
그래.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맥 경을 도우러 간다. 헥톤은 성채를 지키고 민간 대피 유도를 위해 20명만 함께한다. 마차든 수레든 들고 와, 환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까짓것 가서 싸우자.
매도 처음 맞는 게 좋다고.
어차피 부딪칠 거라면 미리 가서 부수는 게 낫다.
성채는 뭐, 나중에 혼돈의 파편이 등장하면 쓰면 되지.
스윽, 허리를 숙여 엘리니와 눈높이를 맞췄다.
“가자, 엘리니 경. 마을을 구하러.”
“오오! 네!”
엘리니 경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검을 붕붕 휘두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울려 줄 생각이다.
망할 혼돈의 파편의 의지든 엘리니든.
전장으로 가는데 이렇게 신나도 되나 싶긴 하다만 본인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망한 세상을 탓해야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이제야 좀 애 같네.’
만연한 죽음과 망조가 든 세상은 어린 시절을 빼앗아 간다.
강제로 어른이 된다.
살아남는 건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니까.
보호자가 있으면 좀 다르겠지만.
“먼저 갈 테니 준비가 되는 대로 움직이도록.”
“네! 알겠습니다!”
약탈자 놈들의 대답을 들으며 엘리니를 어깨에 올렸다.
그대로 점프.
-두웅.
부드럽게 성채 아래로 착지한 후 앞으로 달렸다.
“와아! 엄청 빨라!”
담이 큰 건지, 타고난 천성이 겁이 없는 건지 바람을 맞으며 엘리니가 웃었다.
자. 그럼 봐 보자.
‘90층대까지 오른 NPC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개인에 따라 혼돈의 파편도 잡는 게 90층대 등반자다.
그런 존재가 적이 됐을 때를 지금 아니면 언제 겪어 보겠는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든지 덤비라지.”
결국 꺾어야 할 대상일 뿐이니까.
* * *
야만인.
바바리안.
겉모습만 보면 덩치 큰 사람으로 보였으나 엄연히 종이 다른 존재였다.
강력한 육체는 거인과 비견되고 단단하기로는 마수 못지않다.
다만, 마법과 정령을 쓸 수 없을 뿐.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고대부터 전해 오는 신비의 힘을 사용할 권리가 있었으니.
“번개여!”
한 손 해머를 쥔 자가 외치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진다.
번개에 적중당한 바바리안의 몸에 전류가 흐른다.
몸을 관통하지 않고 그대로 묶어 두는 신비.
원시적이지만 그렇기에 강력한 힘이었으며.
-콰아아앙!
그가 휘두른 망치질 한 번에 대지가 조각나 뒤집혔다.
공격을 피해 훌쩍 물러선 맥이 검을 휘둘렀다.
절묘하게 꺾인 검이 파고들어 바바리안의 손목을 그었다.
“크하아아!”
손목이 잘리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바바리안의 외침에 반탈력이 생기며 검이 튕겨 나간다.
기껏해야 피부와 근육 일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릴 뿐.
“북방의 야만인들이 괴물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겪어 보니 더하군.”
심지어 이들은 본대가 아니다.
혹시 모를 적을 제거하고 지형을 살피는 선발대였지.
강력하나 최고 전력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맥의 시선이 주변을 훑는다.
바바리안과 마을 주민의 시체가 뒤엉켜 있다.
가장 발이 빠른 사람을 성채로 보낸 지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파발로 보낸 자가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왔지만 맥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간을 번다.’
고향 사람들이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이들이었다.
왕국은 지키지 못했으나 고향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사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리 대단한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으아아아아아아!
“너희는 나를 뚫지 못한다!”
함성을 지르며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게 고작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바바리안은 전사였으며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였다.
“위대한 전사에게 영광을!”
강대한 전사의 투지에 반응하며 존중해 준다.
그것이 설사 적이라 하더라도.
십여 명의 바바리안이 마을 사람들이 떠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맥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기에.
홀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사아아아악!
맥의 검을 푸른 기운이 덮는다.
경지에 오른 기사의 전유물, 오러.
알고 있다.
‘난 여기서 죽는다.’
앞에 있는 놈을 죽여 봤자 다른 바바리안이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 놈들은 체력을 아껴 가며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몸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움직이는 것.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었다.
“우아아아아!”
괴성과 함성.
그 사이 어딘가.
투기를 내뿜는 전사와 기사가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고.
“거기. 바쁜 와중에 미안한데, 선수 교체 되나?”
-콰직.
-꾸드득.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 양쪽의 손목을 붙잡았다.
일곱 빛깔로 번쩍이는 외형.
“…이블아이?”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하도 투덕거리기에 도우러 왔습니다.”
꾸우욱.
힘으로 두 사람을 떨어트린 이블아이가 맥을 뒤로 물렸다.
이미 체력의 한계까지 도달한 상황, 힘없이 뒷걸음질 친 맥의 다리를 엘리니가 받쳤다.
“기사 아저씨는 쉬고 있어요.”
맥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하다.
그것도 잠시, 얼굴이 붉어지더니.
“당신, 미쳤소! 이런 곳에 애를 데리고 오다니. 진심이오!”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이블아이는 평온했다.
그 진중한 모습에 맥이 움찔한다.
“엘리니는 그냥 애가 아니다. 단장이지.”
이블아이가 뱉은 단어에 맥이 긴장한다.
범상치 않은 기세와 갑옷.
막강한 완력과 바바리안 앞에서도 굳건한 강단.
그와 함께 온 소녀 또한 범상치 않은 존재일 터.
‘단장? 기사단장은 당연히 아닐 거고. 혹시 마법을?’
마법사의 종류는 다양했고 지고한 마법사 중에는 특수한 비법과 마법의 부작용으로 신체가 어려지는 등의 변화가 있기도 했다.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최소 마도사급!’
맥이 경악했다.
그런 맥을 보며 이블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원 단장.”
“야.”
정색하는 맥을 뒤로한 채 이블아이가 바바리안에게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