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20화 (720/740)

720화 완벽한 논리

무너진 왕성.

이걸 왕성이라 부르는 게 맞나 싶기는 하지만 본인들 말로는 그렇다고 한다.

“이제는 내 거지만.”

기존 세입자들을 모두 내보내려 했지만 일단 참았다.

결국에는 내보내기는 해야겠지만 당장은 쓸모가 있을지 몰라서.

내가 이쪽은 처음이라 주변 정세를 모른다.

이놈들은 어찌 됐든 간에 독립 세력을 만든 이들.

그 과정 중에서 다른 세력과 마찰이 있었고 당연히 일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있었다.

“주변에 성채가 5개 정도 있다는 거군.”

“주변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거리가 좀 있어서요. 다들 규모를 키우려 합니다.”

“사람들을 더 모으려 했다는 거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안전하니까요. 생활도 좀 나아지고.”

헥톤 포엔타가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이번에 무너진 도시로 약탈자들을 보낸 것도 비슷한 이유다.

비교적 쓸 만한 물건들을 가져오려는 것도 있었고.

혹시나 남은 생존자가 있으면 영입할 계획이었다.

근방에 몬스터나 다른 것들이 없으면 도시도 흡수할 예정이었다나.

‘강한 각성자들을 기준으로 세력이 분산되어 있다.’

이들도 알고 있다.

당장 몬스터와 재앙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전투 능력이 있는 이들만 모여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들도 사람이었고 정상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야생과 같은 환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인격은 깎이게 하니까.

나와 처음 마주쳤을 때 엘리니를 요구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냥 여자만 데리고 오면 사내놈들끼리 분란만 생기지만 아이면 이야기가 다르죠. 지킬 대상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이가 성채에 있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띠기 마련.

거기다 생존이 아닌 보호할 대상을 지킨다는 명분은 우울한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누구나 사명감이 있으면 강해지니까.

이 녀석.

‘생긴 건 멧돼지 같은데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이 정도 되니까 성채 하나를 차지할 수 있던 건가.

본신의 능력도 나쁘지 않다.

예상하건대 대략 70층대 중후반은 오른 거 같다.

다른 메인 전투원들은 50층대.

그 외에는 저층 아니면 일반인이다.

의외로 전력이 나쁘지 않다.

우리 세계랑 비교하자면 훨씬 낫지.

지금이야 90층대까지 오른 이들이 나가고 있지만 그래 봤자 소수다.

‘이런 곳도 망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려나.’

가만 생각해 보면 상위 층으로 갈수록 강한 세계가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멸망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던 곳은 아니었을까.

툭툭.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때, 살며시 눈치를 보던 헥톤 포엔타가 입을 열었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대장님은 몇 층까지 올랐습니까?”

-우뚝.

그의 질문에 손가락을 멈췄다.

번뜩 떠오르는 무언가.

‘이곳은 이미 혼돈의 파편이 나타난 곳이야.’

시간이 비틀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재앙과 게이트, 중위 층 이상을 오른 등반가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멸망한 세계를 나누는 기준은 간단했다.

멸망 초기.

대격변이라 불리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시기.

멸망 중기.

과도기라 불리며 재앙이 나타나는 시가.

멸망 말기.

혼돈의 파편이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멸망이 확정되는 시기.

그렇다면 지금 98층의 시점은 무엇인가.

‘멸망 말기야. 최근에 혼돈의 파편이 나타났으니까. 그렇다면 90층대까지 오른 NPC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단 한 명도 90층대에 오른 강자를 본 적이 없다.

서늘한 감각이 들었다.

98층. 이곳에서 90층대를 오른 NPC를 대신하는 것은.

‘우리다.’

의구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탑은 각 층마다 시련을 부여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종용하니까.

어떨 때는 등반가로서.

가끔은 해당 층에 맞는 역할을.

개인의 경향성과 목적에 맞춰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외부인, 고위 귀족, 샬롱의 일원, 마왕, 레지스탕스.

그렇다면 혼돈의 파편을 처치하려는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90층대를 올랐다.”

주먹을 쥐며 읊조렸다.

그의 눈이 커진다.

“과, 과연 90층대에 오르셨군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녀석이 적극적으로 변한다.

눈빛이 반짝이는 게 심히 보기 부담스럽다.

“아, 그리고 저희 소속은 아니지만 피난민들과 기타 떨거지들이 살아가는 마을도 몇 있습니다.”

“그들과 접촉은 했나?”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필요한 것만 주고받고 있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흡수될 테니까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일종의 거래 관계.

그들은 생필품과 식량 등을 제공하고 이들은 무력을 제공하고.

무작정 흡수시켰다면 내부적인 반발이 있는 건 물론이고 여러 부담이 생겨난다.

거래가 의무가 되는 순간 책임감이 커지니까.

‘일반인은 빼 놔야겠군.’

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모두 내보낼 생각이다.

오래지 않아 이곳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

그 편이 이들에게도 더 좋을 거다.

더불어.

‘혹시라도 이 녀석들과 근처 사람들이 폭도로 변해서 덤빌 수도 있고.’

98층은 후보자끼리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걸 강제할 생각이고.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시스템의 방해가 들어온다.

갑자기 사람들이 미쳐서 칼부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신나서 뭐라 뭐라 떠드는 헥톤 포엔타를 바라봤다.

이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쫓아내는 것으로 충분할까.’

마을 사람이든 약탈자든 쫓아내 봐야 다시 돌아오면 그만 아닌가.

그냥 돌아오면 오히려 다행이지.

손에 듬직한 무기 하나씩 들고 오면 골치 아프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세력을 미리 지워 버려야 하나?

“마을에 가 봐야겠다. 위치만 말해. 여기 청소 좀 하고. 먼지 많더라.”

“그럼요! 깨끗하게 치워 두겠습니다!”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기, 수첩을 들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엘리니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있었고.

“바람 쐬러 가자, 엘리니.”

“네, 아저씨.”

난 망한 세계에서 자라나는 이들이 학살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엘리니와 나는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 * *

새로운 곳에 이사를 왔으면 주변에 누가 사는지, 동네 분위기는 어떤지 살펴봐야 하는 법.

헥톤의 말대로였다.

성채 주변에는 마을이 존재했다.

맨 처음 도착했던 달 호수 마을보다도 작은 곳.

산을 깎아서 밭을 만들었는지 계단처럼 재단된 산이 인상적이다.

망해 가는 세상 속 구석진 마을이 대게 그러하듯 대부분 거칠었다.

“어디서 온 사람이오? 여기 먹을 거 없으니 썩 꺼지쇼.”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험한 꼴 보지 말고.”

나름의 친절이다.

적어도 말로 하지 않는가.

진짜 성질이 더러웠으면 돌부터 던졌다.

묘하게 여유가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길거리에는 마땅한 일 없이 불량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놈들도 있었다.

-찍.

침을 뱉는 녀석이 위협이라도 하고 싶은지 단검을 돌린다.

“아저씨, 저 못생긴 아저씨 침 뱉어요.”

“사람이 생긴 대로 논다고, 못생겨서 못난 짓 하는 거야. 엘리니는 예쁘니까 그러면 안 돼, 알았지?”

“그럼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

아이면 오죽할까.

“제가 가서 혼내 주고 올까요?”

“참아. 지지야, 지지.”

뭐, 살짝 과하게 신난 거 같기도 하고.

딱히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었기에 우리의 대화는 양아치의 귀에 들어갔다.

얼굴이 시뻘게진 것이 당장이라도 터질 거 같다.

성질 못 참고 덤비면 내 손에 진짜 터질 거고.

상식적으로 이런 세상에 애 데리고 단둘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면 자신보다 강할 거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뭐라 하면서도 우리를 건들지 않는 이유도 비슷할 거다.

개인 혹은 소규모로 돌아다니는 외부인은 그만한 힘이 있다는 반증이니까.

안타깝게도 얼굴처럼 뇌가 찌그러졌는지 양아치는 그만한 판단력이 없었다.

“거기 둘! 듣자 듣자 하니까, 사이좋게 구멍 바람을, 케엑!”

씩씩거리며 단검을 쥐고 나서던 녀석이 목 졸린 소리를 낸다.

내가 나선 게 아니다.

“토미, 내가 아무한테나 시비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숨 막힙니다, 나으리!”

골목을 사이로 등장한 한 인물.

말을 탄 채 은빛 갑주를 입은 이가 한 손으로 양아치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탓이다.

투구까지 제대로 착용했다.

말도 그냥 말이 아니고 군마고.

구만의 머리에 마갑까지 착용해 놨다.

‘제대로 된 기사군.’

갑옷의 문양이 낯익다.

헥톤이 차지한 왕성에 있던 문양.

아마 정부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정규 기사였을 거다.

먼저 무기를 살폈다.

마상 전투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큼지막한 검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검.

두 개를 착용하고 있다.

일반 장검이 더 낡은 걸 보니 그쪽을 많이 사용한 모양.

하긴 그럴 거다.

각성자와 몬스터가 날뛰는 곳에서는 훈련된 군마라 할지라도 먹잇감에 불과하니.

그럼에도 타고 다니는 건 그동안 쌓아 온 애착이 크기 때문일 거다.

기사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 달려 있고.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다 걸리면 얻어맞을 줄 알거라.”

“예, 예히! 물론입죠!”

이미 몇 번 맞은 전적이 있는지 기사의 손에서 풀려나자마자 양아치가 도망친다.

달리기 하나는 빠른 놈이었다.

-타박.

군마에서 내린 기사가 투구의 안면부를 올린다.

큰 코와 쌍꺼풀이 진한 눈이 드러났다.

“마을에 온 손님에게 실례가 많았군. 용서하시오. 맥 일러라고 하오.”

“실례일 거까지야. 중간에 나서 줘서 고맙습니다. 이블아이입니다.”

“안녕하세요. 엘리니입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엘리니를 본 맥이 미소 지었다.

“보아하니 안전한 곳을 찾아온 듯한데.”

슬며시 엘리니에게 눈길을 준 그가 마을을 가리켰다.

“크지 않은 마을이나 사는데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오. 근방에 있는 몬스터는 이미 토벌해 둔 상태고. 원한다면 살 곳을 알아봐 줄 수 있소. 이래 봬도 이곳이 내 고향이거든.”

어째서 생뚱맞게 기사가 외딴 마을에 있나 했더니 이곳 출신인 모양.

세상도 망했겠다, 정부도 무너졌겠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친절하시군요.”

“기사로서의 도리를 다할 뿐이지. 약자는 보호해야 하지 않겠소.”

마을 주민, 엘리니.

어쩌면 나까지 그의 눈에는 약자로 보일지도 몰랐다.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자에게 까칠하게 굴 생각은 없었으니.

“고마운 말씀이지만 아직 정한 게 없어서요.”

“허어. 딸과 함께 다니는 듯한데 위험하게…….”

“아저씨도 기사예요!”

엘리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맥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기사라는 말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아저씨라는 호칭에 반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강한 기사예요. 그러니 괜찮아요. 저도 지켜 줘요. 전 아직 약하거든요.”

“흐음. 그렇군. 멋진 기사님을 못 알아봐서 미안하오, 아가씨.”

아가씨라는 단어가 마음에 드는지 엘리니의 콧구멍이 커졌다.

기사라.

가만 생각해 보니 맨 처음 엘리니와 만났을 때 그랬었지.

지금은 워낙 갑옷이 눈에 띄어서 안 입고 있지만.

“각자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지.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시오. 내 환영하리다. 기사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소. 세상이 이 모양이라면 더욱더.”

“그러겠습니다. 오늘 베푼 친절은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다음에는 술이라도 한잔하지! 그럼 아직 순찰 중이라 가 보겠소.”

쿨하게 퇴장하는 맥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에서 볼 건 다 봤다.

유의미한 전력은 저 기사 한 명뿐.

성채로 돌아갈 시간이다.

-꼬옥.

가는 길, 엘리니가 소매를 잡아당긴다.

“아저씨, 아저씨가 저 기사님보다 강해요?”

“그렇지?”

“그럼 기사님이 위험하면 아저씨가 지켜 줘요?”

“어…….”

그런가?

귀찮게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속마음을 삼켰다.

“그럼. 그래야지.”

“와! 그럼 아저씨가 기사 중의 기사네요? 기사님을 지키니까요?”

완벽한 논리에 할 말이 없었지만 이렇게 된 거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그 말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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