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화 내 집 마련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탑을 오른다는 건 어떻게 보면 멸망한 세상을 가장 많이 접하는 일이기도 했다.
세계마다 다른 환경도 다르고 종족도 다르며 문화와 구조도 다르기는 하다.
다만 그곳을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사람과 같은 존재들.
그 안에서 생겨나는 사건 사고는 인간적이다.
복수를 위해, 생존을 위해, 다른 이해관계가 맞아서 뭔가를 하고.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려 움직이니까.
개인의 강함은 상관이 없다.
그저 선택지가 줄어들 뿐.
그런 자들을 위해서.
“책 같은 걸 써 볼까?”
으음. 아니다.
책이라고 말하니 너무 거창하다.
나랑 멤버들, 다른 이들의 조언을 구해서 망한 세상 가이드북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한 팁은 줄 수 있을 거다.
헌터야 알아서 하겠다만 절대다수는 일반인이니까.
따라 하기 쉬운 흔적 지우기나 간이 숙소 만들기.
상대의 의중을 살피는 대화법과 적은 힘으로 머리 깨는 방법 등등.
일반인들은 몬스터나 헌터랑 싸울 일보다는 비슷한 사람끼리 뒤엉키는 일이 더 많으니 이런 게 더 필요할 거다.
“아저씨, 이거 먹는 거예요?”
“줘 봐.”
엘리니가 건넨 버섯을 입에 넣었다.
생긴 것부터가 아주 화려한 게 독버섯 같기는 하다만 자고로 외형으로 모든 걸 파악해서는 안 되는 법.
[독 내성(SSS) Lv.10+]
알싸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난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믿는다.
이 버섯,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입맛을 다시며 엘리니의 손부터 닦아 줬다.
피부로 독이 스며들 수도 있으니까.
“아무거나 막 만지면 안 된다. 방금 준 건 일반인은 먹으면 죽는 버섯이고. 애매하면 나한테 먹여 봐.”
“아저씨는 골고루 먹네요?”
“배탈이 잘 안 나서.”
이것도 적어 놔야겠다.
먹어도 되는 건지 의심이 되면 튼튼한 헌터한테 먹여 보자.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어차피 게이트가 펑펑 터지고 침식이 시작되면 환경이 바뀐다.
식생도 바뀌니 그동안 본 적 없는 것들도 나올 거고 빠르게 확인하려면 이 방법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이야.”
“네! 갔다 올게요!”
이미 해가 지는 타이밍.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엘리니가 장작을 주우러 움직였다.
근처에 물가가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특이 사항이 있으면 말해 줄 거다.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할 건 해야 했다.
그게 장기적으로 더 좋다. 결국에는 홀로 살 줄 알아야 하니까.
옆에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많은 것을 겪고 배우는 게 나았다.
지금도 덕춘이가 몰래 뒤따라가고 있고.
-스으으으.
나 또한 토대를 닦고 간이 텐트를 쳤다.
비가 올 거 같지 않으니 배수로는 필요 없을 거 같고.
적당히 땅을 고르고 모포를 바닥에 깔아 냉기가 올라오는 걸 막았다.
스킬을 사용하면 훨씬 편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제 불을 붙이고 방수포를 두르는 건 엘리니가 할 거다.
“이틀 정도 남았군.”
적당한 곳에 앉아 일정을 계산해 봤다.
우리는 도시로 향하고 있다.
탈모맨이 있는 곳이자 우리가 떠나온 마을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내가 엘리니를 등에 업고 달리면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굳이 합류에 신경을 쏟을 필요가 없다.’
저번 소동으로 밝혀진 사실 하나.
98층 또한 클리어 방법이 바뀌었다.
변수는 말할 것도 없이 여러 명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겠지.
97층의 에렘바트가 스마일캡이 겪었던 것과 다르게 움직인 것처럼.
현재 의견은 둘로 나뉜 상태다.
‘후보자와 헤어진 이들 중 누구한테 갈지 고민하고 있거나.’
후보자 전원과 헤어진 후에 나타나거나.
첫 번째면 혼돈의 파편이 나타나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기에 후보자와 헤어진 이들은 빠르게 다른 이들과 합류했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가설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혼돈의 파편이라는 게 그리 인내심이 강하지 않다.
100층까지 올랐던 놈들이라 그런지 움직이는 데 거침이 없거든.
스마일캡도 녀석이 나타날 때는 바로 나타났다고 했고.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가능성인데.
“이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군.”
만약 이게 맞다면 한 명씩 후보자와 헤어져야 한다.
차라리 이쪽이면 안전하다.
헤어지고 합류하길 반복하면 결국에는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혼돈의 파편이 나타날 테니까.
다만.
[마지막잎새]: 갑자기 산사태 나서 헤어졌어요. 가까운 사람이랑 합류할게요!
그날을 기점으로 후보자와 헤어지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상황을 봤을 때.
‘98층은 후보자와 헤어지는 것을 강요하고 있어.’
어차피 그런 거라면 결국에는 모두 헤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거면 됐다.
“좀 늦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엘리니가 돌아오지 않는다.
주변에 몬스터라도 있나?
그런 거였다면 덕춘이 선에서 정리했을 텐데.
“깊숙이 간 건가. 오면 한마디 해야겠군.”
아무리 주워 올 장작이 없다 하더라도 필요 이상 멀리 가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경고를 해 놔야 이후에도 문제가 없을 터.
어떻게 말할까 멘트를 고민하는 타이밍.
-꺄아아아악!
10대 특유의 높은 비명이 울렸다.
반응은 빨랐다.
소리가 나는 즉시 그곳으로 몸을 날렸으니까.
진짜 몬스터인가?
차라리 그 편이 낫다.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접근했다면 훨씬 까다로워지니까.
-사아아아.
오감에 집중했다.
동시에 마력을 뿌리며 기감을 살폈다.
딱히 걸리는 부분은 없다.
기껏해야 작은 산짐승 정도뿐이었는데.
-타앗.
엘리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주변에서 모았을 나뭇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공격당한 흔적은 없었으나.
“이건 또 뭔.”
코끝에 스며드는 물비린내와 고약한 악취.
식수를 얻기 위함인가.
냇가를 찾아낸 엘리니가 본 것은 시체였다.
물길을 따라 떠내려온 수많은 시체.
가스가 올라와 팽창한 복부와 물에 불은 살과 근육.
그리 깊지 않은 냇가이기에 근처 땅에 반쯤 걸치거나 바위 사이에 끼어 있는 경우도 있다.
“장작은 됐다. 돌아가자.”
놀라지 않게 옆으로 다가가 엘리니를 잡아당겼다.
굳은 얼굴로 나를 따라 되돌아갔으나 충격을 받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등을 밀며 냇가를 바라봤다.
저 물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건.
‘도시.’
그곳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리고 도시에는.
‘탈모맨. 무슨 일이 있던 거냐.’
탈모맨이 자리 잡고 있다.
* * *
계획은 언제나 변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플랜 A, 플랜 B 이런 식으로 짜지.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도록 유동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목적지였던 도시가 며칠 만에 폐허가 된다는 가정은 없었다.
물길을 타고 떠내려온 시체들을 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건 알았다.
그럼에도 도시로 향한 것은 그곳에 있는 탈모맨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탈모맨은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반은 맞았다.
[니머리 탈모]: 와씨. 도시에 게이트 터지고 재앙 나타남
[정수리 핥짝]: 그게 동시에 나왔다고?
[니머리 탈모]: ㅇㅇ 등장하자마자 사람들 다 미쳐서 난리 났어
[냥냥펀치]: 운도 더럽게 없는 듯. 지금은 어디냥?
[니머리 탈모]: 몰라. 일단 대충 정리하고 애랑 같이 다른 곳으로 이동 중
도시에 재앙과 게이트가 동시에 나타났고 탈모맨이 그걸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탈모맨이 없었다면 도시 하나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게이트가 생기는 곳은 랜덤.
도시 어딘가에 생겨나도 문제는 없었다.
달 호수 마을 사건을 시작으로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중이기도 하고.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전에 있던 마을도 상황이 비슷했군.’
다만 그때는 내가 몬스터들이 들어오기 전에 재앙을 없애 버렸다.
개판이네.
“여기 있는 건 무리겠지?”
“좀 그렇죠?”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곳이 낫지, 여긴 아니다.
몬스터의 사체를 치우는 것도 문제거니와.
“크르르륵!”
-서걱.
여전히 남아 있는 놈들도 있다.
혹시나 멀쩡한 곳이 있을까 싶어서 내부도 살펴봤지만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무리해서라도 탈모맨과 합류해야 하나.
도시가 이 꼴이 된 이상 우리도 움직여야 할 텐데.
아니군.
“거기, 그냥 나오지?”
일단 저놈들 먼저 처리해야겠다.
이곳에 생존자는 없다.
대신.
“눈이 좋은 사람이군.”
“그쪽도 소식이 빠른 모양이오. 빨리 온 걸 보아하니.”
외부인들은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로 들어온 이들.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행색만 봐도 안다.
어디서든 야영할 수 있는 장비와 배낭.
낡고 더럽지만 튼튼해 보이는 방어구와 관리를 잘한 무기까지.
‘서른 명은 넘네.’
그 규모가 상당하다.
저 정도 인원이 함께 다니려면 식량이든 뭐든 충분해야 할 텐데.
거기다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노예인가.’
이곳에 노예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붙잡아다 부려 먹는 걸지도 모르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혈색이 나쁜 이들이 잡다한 짐을 짊어지고 있다.
무기도 없다. 방어구는 말할 것도 없고.
“떠돌이인 거 같소만. 어떻게 그 아이라도 건네주고 갈 거요?”
“괜히 투닥거리면 힘만 빠지니 그쯤으로 계산합시다.”
그냥 뭐라도 주워 먹을 게 없나 찾아온 게 아니다.
이 녀석들 전문적으로 털어먹는 놈들이다.
“입이 줄면 그쪽도 나쁠 건 없을 텐데.”
“요즘 사정이 안 좋은 거야 뻔히 알 거고. 혹시 딸인가?”
“선택은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린 평화롭게 끝내려고 했다?”
이것 참.
“세상 망하긴 했네.”
저런 놈들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계획 수정이다.
갈 만한 곳이 없다?
그럼 만들지 뭐. 아니면 있는 곳을 차지하든가.
“너희 뒤에는 누가 있지?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내가 봤을 때 저 녀석들에겐 일행이 더 있다.
아니면 본진이 따로 있든가.
들고 다니는 물자가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엘리니를 내놓으라고 했지.’
어딘가 팔아먹든 부려 먹든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놈들이라면 아이는 필요 없다.
체력도 부족하고 다 큰 성인보다 할 수 있는 게 적으니까.
그러니 놈들 뒤에는 더 커다란 세력이 있거나 거래를 튼 자가 있다.
“흐음. 머리도 좀 굴러가는 거 같은데 말귀는 못 알아먹는군.”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머리를 긁적인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쇼. 우리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등 뒤에 매고 있던 도끼를 쥐고 있던 녀석이 내게 쏘아진다.
열댓 명의 사람이 추가로 달라붙는다.
일반인도 아니다.
-촤아아아아악!
-쿠르르릉!
스킬을 사용하는 걸 보니 등반가 출신인 게 분명했다.
조합이 나쁘지 않다.
발을 묶고 약화시키는 디버프와 저주.
퇴로를 막으며 좁아지는 화망.
정면부에서 달려드는 이들까지.
사람 한 명 잡는 데 과할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한다.
뭐랄까.
“옛 생각 나네.”
대형 길드 놈들도 나 한 명 잡겠다고 저 난리를 피웠었는데.
물론. 그놈들은 모두 죽었다.
[파이어 밤(SSS) Lv.10+]
-콰아아아앙!
녀석들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터트린 폭발.
순간적으로 열기가 솟구치며 일대가 뜨거워진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환경이었으나.
-화륵.
“으, 으아아아!”
“불이다!”
“크흡! 숨 쉬지 마라!”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열기만으로 옷이 타 버린다.
눈과 호흡기관에 화상을 입는 건 물론이었고, 폭발의 여파로 균형을 잡지 못한 이들이 파편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앞으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길게 뻗은 검에 두세 명이 한 번에 잘렸다.
나쁘지 않은 실력인 건 맞다.
아마 탑 중반부까지는 오른 거 같으니.
지구였다면 A급 헌터는 됐겠지.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오지혁을 비롯해 상위 층까지 오른 이들이 대거 나가서.
그거야 나중에 탑에서 나가게 되면 알 일이고.
“이상하단 말이야.”
난 이 녀석들이 의문이었다.
-카아앙!
내 검을 맞고 크게 뒤로 물러선 놈이 몸을 굳힌다.
“이 정도 실력이면 국가 차원에서 써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상이 이 꼴인데 그 귀한 각성자들이 강도질이나 하고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만 어떤 식으로든 회유해서 몬스터와 재앙을 막아야 하지 않나.
“세상의 주인이 바뀐지도 모르다니, 어디 촌구석에서 왔나 보지?”
“아하. 반란이라도 했나 보네.”
어쩐지 막 나간다 했어.
궁금증은 풀렸으니 끝내자.
[검강]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이 커진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함에도 부족함이 없는 사이즈.
난 안으로 파고들었고.
“괴물, 이구나.”
3분도 걸리지 않아 놈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짐꾼으로 사용하던 이들은 도망친 지 오래.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용무가 있는 건 이쪽이었으니.
대장 격이었던 사내만 살아남았다.
길잡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해서.
“본진으로 가자.”
“후회하게 될 거다. 우리는 그분의 하수인에 불과하니. 동부의 패자를 마주하고 울지나 마라.”
“그래그래. 얼른 가자.”
빠드득. 이를 가는 녀석을 앞으로 밀었다.
이런저런 사건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지금.
‘나라도 어디 정착해 놔야지.’
현생에서도 못 구했던 내 집 마련을 할까 한다.
조금은 가볍게 생각을 하는 그때.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