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화 나타나지 않다
며칠 전, 노을이 지는 시기에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중간에 해가 가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늘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찰나의 순간이었으며 신경 쓰기에는 너무 은밀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징조였군.”
“그에에.”
상황이 바뀔 거라는 세상의 신호가 아니었을까.
비스듬하게 쥔 검 끝을 따라 흐르는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붉은 방울이 떨어졌으나 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사방이 붉은색이었고 몇 방울 더 떨어진다고 달라질 건 없었으니.
“당신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소? 어째서 이러는 것이오!”
“마을을 지켜 주신다지 않았습니까!”
어딘가가 잘렸으나 죽지는 않은 이들.
낯이 익다.
저기, 팔이 날아간 녀석은 재앙으로부터 구해 준 녀석이고 등이 크게 베인 이는 엘리니와 어반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던 여인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즐비하게 깔린 시체들.
그곳에는 그동안 마주쳤던 마을 사람들과 재앙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그뿐인가.
“크륵. 크르륵.”
땅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몬스터가 등장했다.
이전에도 있었으나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게이트가 열렸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멸망으로 질주하는 세계에 게이트가 열리는 건 흔한 일이니까.
어디 산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게이트가 생겼든,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는 어딘가에 생겼든,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좋다. 다 좋은데.
-푸욱.
-푹.
나를 향해 저주를 내뱉는 이들의 목숨을 끊어 주고 빙글 몸을 돌렸다.
-촤아아악!
등 뒤를 기습하려던 몬스터의 머리가 잘려 날아간다.
팽이처럼 돌며 진흙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망할 비가 내리고 있다.
양손 가득 물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비릿한 피 냄새와 가죽 냄새,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정체 모를 살 조각이 떨어진다.
갑옷조차 입지 않았다.
내게 덤빈 이들을 상대하는 데는 그 정도의 무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검조차 쓰지 않아도 됐다.
그저 위협용으로 들었을 뿐.
결과는 그러지 못했지만.
‘왜 이렇게 됐지?’
반파된 마을.
시체는 가득하고 사람들 태반이 죽었다.
닫힌 창문 틈. 나를 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가 보인다.
떨리는 눈꺼풀 안에 담긴 눈에는 물기가 가득하다.
골목과 수풀에 몸을 웅크린 채 숨죽이는 이들의 가느다란 호흡과 미약한 온기까지 느껴진다.
초인의 감각은 예민했고 그 말은 곧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작은 눈짓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확장되는 동공과 벌어지는 입.
불안한 듯 다잡은 손가락과 몸으로 쏠리는 피와 서늘해지는 귀까지.
내게 향한 감정은 두려움이었으며.
“그대는 그러면 아니 됐소.”
분노였고.
“저자도 죽여야 합니다! 이번 일을 만든 원흉 중 하나에요!”
복수심을 머금은 광기였다.
그래 광기.
“다들 미쳤군.”
고작해야 며칠.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
어쩌면 본색을 드러냈다고 봐도 된다.
그 형태가 어찌 됐든 묵혀 왔던 감정과 스트레스가 터진 결과니까.
그저 이전과는 달리 그걸 감출 생각이 없을 뿐.
망한 세상에서 인내와 배려, 예의의 가치는 떨어진다.
보다 야만적이고 거칠게 싸우는 것이 필연적이지.
빼앗기기 싫으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미덕이다.
이곳은 그런 개념이 빠르게 찾아왔을 뿐이다.
빌어먹을 혼돈 덕분에.
‘혼돈이 충만하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에렘바트가 말했을 때는 어떤 건지 몰랐는데.
녀석과 싸우고 올라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혼돈 수치가 늘었기 때문인가. 지금은 알 거 같다.
일반인에게 있어 혼돈은 충동을 부추기는 것과 같았으니.
“이렇게까지 했어야 됐나.”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일이 있던 건 아니다.
재앙에서 벗어난 이들은 복수를 했고.
머릿수부터 밀리니 때마침 등장한 몬스터들을 몰고 와 마을을 공격했을 뿐.
주변에 피해 끼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복수에 눈이 먼 놈들은 내 말을 무시했다.
그래서 베었다.
몬스터든 덤벼 오는 놈들이든.
문제는 그다음.
‘자신들을 부른 게 나라고 했었지.’
석상을 버리고 재앙에 빠진 이들을 구한 것도 나라고.
틀린 말은 아닌데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공격받았다.
정말이지.
“사람 말을 안 듣는단 말이야.”
아니라고 했는데도 믿지를 않았다.
결국에 마을 사람에게 나는 외부인이었으니.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이블아이…….”
외부인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레 마을에 있는 고아들에게도 번졌다.
나도 거기서 화가 난 거고.
건물과 건물 사이. 그 틈새에 숨어 있는 엘리니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았는지 뺨에 붉은색이 번져 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외부인 놈들이든 마을 놈들이든 제대로 선을 넘겼다.
그 결과가 이거고.
‘이 마을은 끝났군.’
마을을 복구하는 데만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원한을 가진 외부인들은 야인이 되어 마을을 노린다.
거기에 몬스터까지 있다?
상상력이 부족해도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쯧. 재앙은 재앙이네.”
호수 밑바닥에 처박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어정쩡하게 외부인을 도운 게 문제일까.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하는 짓을 못 본 척 넘어가야 했을까.
적어도 둘 중 한쪽의 편을 들어 줬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으나.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다가오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겠다!”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간단하게 생각할 거다.
문제가 생길 부분이 있다면 미리 차단한다.
나를 공격하러 오는 놈들?
당연히 죽인다.
나를 꼬드겨서 이용하려는 놈들?
이해관계가 맞으면 괜찮다.
그냥 날 휘두르려는 놈들은 처단해야 하고.
그 과정이 상당히 귀찮고 심력을 소모하니 시작조차 안 하겠다는 것뿐이다.
‘노리는 건 혼돈의 파편.’
녀석에게 집중할 생각이다.
정치 싸움이든 계략질이든 필요 없다.
이미 열쇠는 얻었으니까.
-저벅. 저벅.
나를 둘러싼 이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기를 치켜들기는 하지만 뒤로 물러난다.
이미 내 손에 죽은 이들이 여럿.
방금 내가 한 말을 지킬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건물로 향하니 엘리니가 살며시 기어 나온다.
“이블아이, 괜찮아요?”
“보다시피.”
검을 집어넣고 클린을 사용했다.
엘리니에게도 사용하니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살핀다.
주변을 살폈다.
분명 이 난리가 났을 때 엘리니를 비롯한 고아들은 사람들을 피해 달아났었다.
저번에 보았던 어반스와 다른 애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엘리니만 있다.
“다른 애들은?”
“저 사람들이랑 같이 간대요.”
엘리니가 가리킨 곳은 외부인들이었다.
어른들 사이로 어반스의 머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재앙에 대해 알고 있었지.
그걸 보고 외부인끼리는 뭉쳐야 한다고 했었고.
이번 난리로 외부인과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갈라섰다.
서로 한 짓이 있으니 회복되는 건 어렵겠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어차피 마을에 남아 있다면 고운 꼴은 보지 못했을 테니.
지금도 사람들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하다.
정말 이상하지.
왜 세상이 망하는 와중에도 서로 못 싸워서 안달인지.
‘우리라고 다를 건 없군.’
내가 겪은 세상도 그러했으니 어쩌면 이게 본모습일지 몰랐다.
어쩌겠나. 세상이 이 모양인 걸.
시대의 흐름은 계속해서 바뀌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벅찬데.
엘리니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네?”
“마을을 이렇게 만든 내가 할 소리는 아닌데 이곳에서는 더 못 살아.”
엄지로 마을 외곽을 가리켰다.
엘리니가 일하던 풍차가 박살 났다.
그 옆에 있는 외양간 또한 무너져 가축들이 도망친 지 오래.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던 사람도 내 손에 죽었다.
이곳에 남아 봤자 할 일도 없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질 뿐이다.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방법도 있어.”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다면 세력을 형성해 다른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복수를 마친 후 마을을 차지하든지.
아마 운이 나쁘다면 몬스터에게 잡아먹히거나 다른 이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안정적이지는 못하겠지만.
게이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만큼 인류의 영역은 계속해서 줄어들 거다.
“아니면 나랑 갈 수도 있지.”
강요하지는 않는다.
결국에 나와 엘리니는 떨어져야 한다.
스마일캡이 말한 혼돈의 파편을 소환하는 방법이 그거니까.
언제가 됐든, 무슨 상황이 됐든 엘리니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헤어지기 꽤 적절한 타이밍이고.
뭐,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얘한테 나는 그저 살인마일 뿐이니까.’
마을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수십 명을 베어 넘긴.
어째서 아직도 이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였으면 진작에 도망쳤을 거다.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 봤을 뿐이다.
아이 특유의 정은 주었을지언정 나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있을 리가 없다.
엘리니에게도 커다란 분기점이 될 것이다.
마을에 복수하고 싶은 외부인 무리와 살인자 중에서 고르라니.
꽤나 고약한 선택지 아닌가.
피식.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개판이네.’
그런 내게 엘리니가 손가락을 뻗는다.
양 검지로 꾸욱. 내 입꼬리를 위로 올린 엘리니가 입을 열었다.
“웃을 거면 활짝 웃어야 돼요.”
왜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아저씨라고 해도 되나요?”
“…그래라.”
20살 가까이 차이 나면 아저씨 맞지.
“아저씨 따라갈래요.”
엘리니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 고민을 하긴 했을까.
그런 흔적도 보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크게 바꿀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었고.
“가자.”
난 그 끝을 같이 볼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엘리니는 중립 NPC였으며 이곳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멀어져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조금은 적당히.
거리낌 없이 거리를 좁혀 오는 아이와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요?”
“글쎄. 도시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반파된 마을을 뒤로한 채 거리를 나섰다.
뒤에서 엘리니의 이름을 부르는 어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도 느껴졌다.
나와 엘리니 모두 뒤를 바라보지 않았다.
선택이란 결국 다른 한쪽을 외면한다는 것과 같았으니.
습득력이 좋은 아이였다.
* * *
98층에 들어온 지 9일 차.
마을을 파괴하고 도시로 향한 지 하루 되는 날 난 깨달았다.
아니, 98층에 올라온 이들 모두가 알았다.
[스마일캡]: 나뿐만이 아니었군
[화무선]: 그대들도 전날 피를 보았단 말이오? 허어. 이 무슨
[섹시가이]: 형님들! 저 후보랑 떨어졌어요. 싸우는 틈에 엇갈린 거 같은데… 어디 갔지?
[팔라딘89]: 노블 나이트 또한 오해가 쌓여 공격당했다. 후보는 보호 중이다
내가 마을을 파괴한 그날.
마을과 외부인 사이에 쌓인 모든 것들이 터진 바로 그날.
‘다른 곳도 난리가 났어.’
형태와 방식. 이유는 모두 달랐지만 싸움이 벌어졌다.
나처럼 마을을 박살 낸 사람도 있고 도망친 자도 있다.
혹은 그들 모두를 제압하거나 통합한 자도 있다.
남들이 싸우든 말든 무시한 채 자신의 영역을 지킨 이도 있었고.
결과만 말하자면.
한날한시에 모두 사건 사고를 겪었으며.
‘그중에는 후보자와 헤어진 이도 있다.’
혼란 속에 후보를 잃은 이도 있었고 길이 엇갈린 자도 있다.
다른 이들과 합류하며 떠난 이는 물론이고 아이 스스로 떠난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섹시가이]: 진짜 사라졌어요;; 안 보인다니까요 형님들?
[초코쪼코]: 나도 주변 싹 다 뒤져 봤는데 없어. 어디로 간 거야?
어떤 식으로든 후보자와 헤어진 이들은 그들을 절대 찾을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스마일캡]: 혼돈의 파편은? 나타났나?
[초코쪼코]: 아직 잠잠해
[섹시가이]: 저도 뭐 없던데요?
후보자를 잃은 이들 중 누구에게도 혼돈의 파편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