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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716화 (716/740)

716화 열리다

찰칵.

빠르게 뻗은 검이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검집에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누군가 봤다면 뭔가 핏- 하고 뭔가 움직이는 정도로 보였을 거다.

결과는 좀 달랐지만.

-털썩.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긴 사내가 쓰러진다.

죽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

반사적으로 목을 잡기 위해 올린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디그(S) Lv.MAX]

녀석의 시체를 땅에 묻고 클린과 샤워로 피를 없앴다.

여전히 재앙의 영역에 있는 엘리니는 귀를 막고 있었고.

[잊혀지지 않는 창기사(SSS) Lv.10+]

“망구야.”

“끼아아아!”

조심스럽게 날아간 망구가 엘리니를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이 마땅찮은지 석상의 목이 돌아가며 망구를 노려봤으나.

“끼아아?”

망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죄의 석상이라고 했나?

죄를 지은 이들, 혹은 죄를 짓지 않더라도 평생 사죄만 하게 만드는 능력 같다만 망구는 기본적으로 망령.

사죄를 한다는 것은 망령인 스스로를 부정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영향을 안 받을 수밖에.

더불어 망구는 내가 소환한 만큼 혼돈이 섞여 있다.

당장 함께 혼돈의 파편이랑도 싸우는데 저 정도 재앙에는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

여유를 부리며 석상에 중지까지 날린다.

“아니, 저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게헤헤헤.”

덕춘이한테 배웠군.

참 좋은 거 가르친다.

물론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나도 중지를 세운 채 놈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석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죄의 석상이 당신의 죄를 고합니다.]

그와 함께 필름처럼 이어지는 기억들.

내 손에 죽은 이들과 뒤통수를 맞은 이들의 얼굴과 분노가 느껴진다.

몸이 꿰뚫리고 타오르며 느낀 고통과 두려움도.

그 감정은 폭력적이라 할 만큼 거셌으며 미묘하게 비틀린 기억이 짜깁기되어 세상에 둘도 없을 쓰레기가 된 거 같았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좀 쓰레기 같은 면모가 있지.”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어서.

내가 평소에도 쓰레기 같은 것도 아니고 나쁜 놈들한테만 그러는 건데.

일종의 다크 나이트 같은 게 아닐까.

속으로 흡족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석상의 힘이 강해졌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정신 방벽이 워낙 두껍기도 하거니와.

[혼돈이 재앙의 영향력을 무시합니다.]

이미 난 이 정도 수준의 재앙에 휘둘릴 레벨은 벗어난 지 오래다.

총량을 따지면 내가 가진 혼돈이 더 많겠지.

-끼기기긱.

-드드드득!

“키햐아아아악!”

그런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석상이 움직인다.

입을 쩍 벌리더니 괴성을 질렀고.

“죄를 지은 자에게 최후를.”

“스스로 짊어진 무게를 받아드려라.”

“저자를 죽여 죄를 덜어라!”

기도에 빠져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대부분 일반인.

힘 좀 쓰는 놈이라 해 봤자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

대충 먼지 털어 내듯 달라붙는 놈들을 밀어냈다.

그것만으로도 바닥을 구르는 이들이 태반.

“죄를 참회하지 못할까!”

등반가 출신으로 보이는 자가 돌멩이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크하아! 이런 돌대가리가!”

“초면에 말이 심하네.”

되레 손바닥이 터진 녀석이 손을 붙잡는다.

까앙.

적당히 정강이를 차 부러트리고 연못으로 들어갔다.

저 커다란 호수를 유지하고 있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확실히 물이 맑기는 하다.

정수기로 쓰면 딱 좋겠네.

적당히 조절이 필요하겠지만.

-텁.

석상을 붙잡았다.

녀석이 나를 물기 위해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들이민다.

물론 녀석의 이빨이 내 가죽을 뚫는 일은 없었다.

-빠득.

“키햐아아아아!”

버릇없는 녀석의 송곳니를 몇 개 뽑아 주니 좋아 죽는다.

앞니가 없으니 물지는 못할 거고.

“부술까 말까.”

이게 살짝 걸린단 말이지.

쓸모가 있는 건 확실한데 일반인에게는 위험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재앙치고는 약한 편이라 그런가.

녀석의 영향력은 기껏해야 전방 50m 정도밖에 안 된다.

비교적 안전한 녀석이니.

“네 이름은 앞으로 지하 암반수다.”

“키햑! 키햐아아아!”

녀석도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하다.

석상을 든 채 호수에 입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녀석이 놓인 곳 위로 배를 타고 지나가다 홀릴 수도 있으니.

[디그(S) Lv.MAX]

-쿠르르르릉.

아주 깊숙이 넣어 둬야지.

땅이 파이며 흙먼지가 올라왔지만 괜찮다.

오염된 바다에서 싸우는 것과 비교하면 이 정도면 깔끔하지.

다행히 고정형 재앙이라 빠져나오지는 못할 테니 앞으로는 정수기로서 살아갈 거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야 물이 잘 나오는 거 같지만 없어도 조금은 나오겠지, 뭐.

이걸로 재앙 하나는 가뒀고.

‘저건 뭐야.’

호수 깊숙한 곳, 유독 까맣게 물든 바위가 보였다.

바위가 맞나?

‘사람이 만든 거 같은데.’

자연적으로 생겼다기에는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아니. 누군가 만든 게 분명했다.

지름은 십여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원형의 돌판.

평평하게 깎인 바위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무엇을 위한 마법진인지는 모르겠다.

권능을 사용했지만.

[혼돈의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정보 일부가 오염됩니다.]

정보가 깨져서 나온다.

뭐라고 해야 하지.

불가사의를 권능으로 가지고 있는 가르티의 정보를 봤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일단 위치는 기억해 두고.

[쁘띠공듀]: 호수에서 이.런.걸 발견했어요☆ 몰까용?

사진까지 찍어서 멤버들에게 알렸다.

비슷한 걸 발견하거나 정체를 파악하면 알려 주겠지.

혼돈이 서려 있다고는 하지만 딱히 느껴지는 혼돈은 없다.

아직은 크게 문제가 될 거 같진 않다.

‘살짝 델버튼이 있던 알이랑 비슷한 것도 같고.’

혹시 몰라 두드려 봤지만 흠집도 안 난다.

살짝 찝찝하긴 하다만 주기적으로 살펴보는 정도면 될 거 같다.

할 일은 대충 끝냈으니 돌아갈 시간이다.

“푸우.”

물 밖으로 나가자 바닥에 엎어진 사람들이 보였다.

몸이 망가질 때까지 기도했었기 때문인지 체력이 한계에 달한 이들이다.

재앙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기절한 모양.

덕춘이가 한 번씩 핥았으니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릴 거다.

이미 죽은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요양만 잘하면 건강을 되찾을 거다.

영양실조에 걸린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따로 모아 뒀다.

더불어 어스 월로 컨테이너를 만들었으니 정신 차리면 알아서 하겠지.

“으으으. 머리야.”

“망할 석상이 사라졌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네.”

비교적 최근에 이곳으로 온 이들이 인사해 온다.

기억도 나름 온전해 보이니.

“고마울 것까지야. 너희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복수를 해야지.”

“우리를 죽이려 한 자들 아닌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역시나 복수인가.

하긴 나 같아도 날 죽이려 한 놈들은 곱게 안 놔두지.

뭐, 그건 알아서 하라 하고.

“하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안 가게 해.”

“명심하지.”

굳이 강조할 생각은 없었다.

하는 거 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가 나설 생각이니까.

그보다.

‘애들은 비교적 영향이 적다고는 했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군.’

망구가 데리고 온 엘리니의 상태가 안 좋다.

머리가 아픈지 나무를 붙잡고 구역질하고 있다.

“좀 괜찮냐?”

가볍게 등을 두드려 줬다.

아직 안대는 벗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굳이 다 보며 살 필요도 없지.

석상이 있던 곳은 빈말로도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

씻지도 않고 볼일도 그 자리에서 보고.

아사한 이들이 썩어 가는 광경을 봐서 뭐 하겠는가.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을 거다.

분변과 시체의 썩은 내는 감출 수 없었으며, 발에 밟히는 물컹한 살덩이의 감촉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테니.

엘리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블아이?”

“집에 가자.”

녀석이 내 손을 꼭 붙잡는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나 또한 침묵을 유지했으며.

-끄덕끄덕.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시선을 던졌으니까.

뭘 하든 관계없는 이들에게는 피해 주지 말라는 메시지.

멸망을 피해 이곳까지 피난 온 이들인 만큼 눈치는 있었다.

숲에서 벗어나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끼이이이.

타고 온 배에 올랐다.

올 때도 두 명.

갈 때도 두 명.

달라진 거라고는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 정도.

천천히 노를 젓자 배가 매끄럽게 나아간다.

바람도 선선하고 재앙의 영향도 없고.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엘리니의 안대를 풀었다.

빛이 밝은지 찌푸렸던 눈을 뜬 엘리니가 감탄한다.

“와!”

“경치 좋지?”

“엄청 좋아요! 배 타고 여기까지 나온 건 처음이에요. 뭔가 낯선데 예뻐요.”

평소에도 물을 길으러 호수에 오지만 이렇게 호수 중심에 선 건 처음.

“바라보는 위치만 바뀌어도 느낌이 달라지지.”

앞으로도 그럴 거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상황은 항상 바뀌고 그때마다 낯선 세상을 마주할 테니.

가능하다면 그 위치가 좋은 곳이길 바랄 뿐.

엘리니가 배에 바짝 붙으며 호수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감촉이 나쁘지 않은지 입꼬리가 올라간다.

물길을 따라 숲에서 만진 더러운 찌꺼기를 흘려보내며 마을로 향했다.

느릿하게.

몸에 밴 냄새까지 모두 지워질 때까지.

푸른 호수를 가로질렀다.

* * *

움찔.

어두운 공간, 한 인형이 눈을 떴다.

공기는 서늘하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부유하듯 떠올라 바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었으나 겁은 나지 않았다.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며 동시에 밖으로 나가기 전, 마음을 진정시키는 곳이었으니.

[기사도와 징벌의 뮬랑 카센이 대상을 살핍니다.]

-화르륵.

그녀의 주변에 떠오른 십여 개의 불덩이.

깊은 어둠에 빛을 내고 있었으나 이곳은 어둠의 영역이라는 듯 빛은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의 모습조차 담아 낼 수 없었다.

그저 흐릿한 실루엣이 언뜻 보일 뿐.

뮬랑 카센이 불길을 응시한다.

붉게 타오르는 불덩이 중 하나가 푸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다른 불꽃보다 강하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스륵.

조심스러운 손길로 푸른 불길을 어루만지자 그에 화답하듯 불이 옮겨 온다.

뜨겁지는 않았다.

그저 미약한 온기가 전해질 뿐.

한참을 불꽃을 더듬던 그녀가 손을 회수한다.

어두운 공간, 그녀의 눈빛이 번뜩인다.

“푸르다 못해 환하게 빛날 때까지.”

작게 읊조린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고.

그와 동시에 얌전히 허공을 흐르고 있던 혼돈이 폭발적으로 기세를 키웠다.

폭풍처럼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혼돈.

그저 혼돈에 휩쓸려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과 달리 완전히 혼돈을 제어한다.

이내 하나로 뭉쳐진 혼돈이 위로 치솟았으니.

-쩌적.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찰나의 순간 빛이 보이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깐.

그 틈으로 혼돈이 빠져나가며 다시 어둠만이 가득해진다.

그녀의 의지를 담은 채 혼돈이 98층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검은 연기와도 같은 기운이 뿌려지며 세상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이변이 일어나는 건 그 순간이었다.

[98층이 뮬랑 카센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잠들었던 감정과 괴물이 피어오릅니다.]

[세상이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구구구구구구.

98층 필드.

수많은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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