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14화 (714/740)

714화 어떤 세계인가

엘리니를 만난 마을.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달 호수 마을이라 부른다던가.

보름달이 뜨는 날 호수로 달이 비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직관적인 이름이기는 하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곳.

난 깔끔하진 않아도 환기가 잘되는 여관을 잡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일하러 가나 보군.”

엘리니가 머무는 곳과 가장 가까운 여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단층인 마을에서 몇 안 되는 2층짜리 건물이기도 하고.

살짝 언덕진 곳에 위치해 멀리서 엘리니를 확인하는 데 편한 곳이었다.

그렇다 한들 일반인의 눈으로는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떨어져 있으니, 누군가 나를 본다면 창문을 열고 마을을 감상하는 것 정도로 보일 거다.

잠시 소가 먹을 여물을 들고 움직이는 엘리니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98층에 진입하고 4일 차.

위로 올라온 이들은 모두 스마일캡이 말한 소녀를 만났다.

진짜 그 소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만났다.

‘필연적으로 만나는 건가.’

시스템적으로 인연을 강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으니.

심지어 그렇게 마주친 이들 모두가 파란 머리를 하고 있다면 더 그렇다.

그 때문에 커뮤니티 내에도 한차례 혼란이 찾아왔다.

[섹시가이]: 그냥 여기 파란 머리가 많은 거 아닙니까?

[화무선]: 머리 색이 다채롭긴 하오

[니머리 탈모]: 역시 외국인이라 잘 아는구나?

[화무선]: 색목인이라 차별하는 것이오? 무뢰배가 따로 없구려!

[니머리 탈모]: 어… 무뢰배가 뭔…

[정수리 핥짝]: 짝퉁 선비야, 탈모한테 어려운 단어 쓰지 마라. 스트레스받으면 더 빠진다

[냥냥펀치]: 털갈이하는 것처럼 뭉텅뭉텅!

[섹시가이]: 형님… 가발이었어요? 화무선 진짜 너무하네!

[화무선]: 아니, 내 그런 사정이 있는지는 몰랐소. 미안하오

[니머리 탈모]: 뭘 사과해! 아니야!

화무선의 말마따나 이곳 사람들의 머리 색은 다양한 편이다.

우연히 비슷할 수도 있지.

빛의 방향에 따라 갈리는 건지 사진도 봐 보면 미묘하게 머리 색이 다른 것도 같고.

다만.

‘눈 색깔까지 같을 수가 있나?’

이것도 우연?

아니면 이쪽에서는 흔한 색인가.

생김새도 비슷한 느낌이라 더 그렇다.

달리 말하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는 말이기도 했다.

“생각할 건 없지.”

일단은 지켜본다.

이후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되니까.

변수가 생기면서 계획이 살짝 바뀌었다.

후보자가 예상 이상으로 많아졌다.

달리 말하면 혼돈의 파편이 어디서 등장할지 알 수 없다.

각자 행동하다가 등장하면 신호를 주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혼자서 얼마나 버티려나.”

스마일캡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남은 코인이 없을 거다.

이미 97층에서 죽었던 이들도 여럿 있으니까.

지원이 올 때까지 못 버티면 그대로 탑에서 퇴출당하는 거다.

등반가를 죽인 혼돈의 파편이 남아 있을지 사라질지도 의문이고.

그래서 새로운 계획을 짰으니.

[스마일캡]: 중앙으로 모이자. 그곳에서 하는 게 제일 나아

후보자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거다.

그럼 후보자 중 누가 진짜든 간에 그곳에 혼돈의 파편이 등장할 테니.

물론 반발은 있다.

[니머리 탈모]: 싫은데! 거기 진짜 등장하면 얘네는 어떻게 해?

[스마일캡]: 따로 불러내다가 등반가들이 개죽음당하는 건 괜찮고?

[초코쪼코]: 혼돈의 파편 나오자마자 애들 빼돌리면 될 거 같은데. 스마일캡이 잡고 있음 되잖아

[냥냥펀치]: 거리도 먼뎅 그냥 몇 군데 나눠서 하징? 이동하기도 힘듦

[정수리 핥짝]: 냥펀 말대로 4, 5명 정도로 모으면 혼돈의 파편 나와도 애들 뺄 수 있어

[마그마 요정]: 어… 가능한 곳도 있긴 한데 그렇게 못 하는 곳도 있잖아?

[섹시가이]: 저는 가능해요, 누님!

지금도 실시간으로 어떻게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시작부터 일이 꼬였다고 해야 하나.

누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각각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저 시선의 차이일 뿐.

‘스마일캡처럼 한곳에 모으면 관리는 편해져. 등반가들이 당할 일도 적고.’

다만 그럼 후보자들이 휩쓸릴 가능성이 너무 크다.

누군가는 말한다.

어차피 중립 NPC는 진짜 NPC가 아니라 탑이 만들어 낸 NPC 아니냐고.

어차피 층을 클리어하면 다시 태어날 그럴 존재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하지만.

“그런 중립 NPC도 기회를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저 탑에 기록된 무언가가 아니라 직접 생각하고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80층대 중립 NPC 샤일이 그러했다.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클리어했고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그들을 그냥 의지 없는 탑의 꼭두각시라고 봐도 되는가.

적어도 난 그럴 수 없다.

나뿐만이 아니다.

그 형태가 어떠하든 NPC와 깊은 인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수많은 NPC의 계승자가 된 오필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탈모맨 또한 킬더레스의 계승자다.

녀석이야 그냥 성격 자체가 남을 미끼로 쓰는 걸 안 좋아하는 거겠지만.

다 떠나서.

‘스마일캡도 마찬가지야.’

NPC보다는 등반가를 더 우선시할 뿐.

냉정한가?

글쎄.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세상은 난리일 테니 초조한 것도 이해한다.

그나마 절충안이 냥펀이 말한 건데.

“확실히 소규모로 팀을 만들어서 시도하면 부담이 줄어.”

“그에에.”

5명 정도로 짝을 지어 혼돈의 파편을 불러낼 경우 후보자들을 빼내기 쉽다.

한 명이 애들을 빼돌리는 사이 남은 4명이 혼돈의 파편을 잡아 두고.

이론상으로는 괜찮은데.

‘못 버티는 사람도 분명히 있어.’

90층대 후반부에 올라온 만큼 다들 실력에 자신이 있긴 하지만 편차가 존재한다.

그건 이미 97층에서 증명됐다.

에렘바트를 상대로 몇 명이 죽었던가.

단일 무력으로 보자면 98층의 지배자가 에렘바트보다 강하다.

고작 4명이 녀석을 막을 수 있는가?

‘나랑 멤버들이면 충분히 가능해.’

그건 자신 있다.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건 가능하겠지.

오필리아야 지금도 집단으로 움직이니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나머지는?

연합 사람들과 상위 헌터들은?

확답할 수는 없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98층은 넓었고 지원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며칠이 걸릴지도 몰랐으니.

스마일캡도 하루를 못 버티고 졌다.

고민이 깊어지는 타이밍.

[갓블레스]: 우선 상황을 좀 더 지켜보죠. 혼돈의 파편이 어딘가에 있다는 건 분명해요.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올 거예요

오필리아가 중재에 나섰다.

아직 시간은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혼돈의 파편이 있는 이상 무언가 혼란이 일어날 거다.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잠시 과열된 논쟁을 식히자는 의미다.

나 또한 커뮤니티를 껐다.

더 지켜봐 봤자 크게 달라질 거 같지는 않아서.

그런데.

“음?”

저 멀리 엘리니가 일하고 있을 곳을 본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안 보인다.

다른 곳으로 간 건가?

이미 며칠간 하루 일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 둔 상태.

말을 관리한 후에는 풍차에서 간 밀가루를 포대에 담는 걸 도울 텐데 어디로 간 걸까.

-타앗.

은신을 펼치며 엘리니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볍게 지붕을 박차며 이동했고.

‘동네 양아치?’

골목에서 엘리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의 주변에 있는 인원은 4명.

똑같이 10대였으나 키가 더 크다.

아마 나이도 몇 살은 더 많겠지.

그래 봤자 내 눈에는 좋게 봐야 중학생이라 별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사자는 다르다.

바로 끼어들까 하다가 때리는 거 같지는 않기에 조용히 지켜봤다.

“너도 같이하자니까? 너나 나나 고아잖아! 챙겨 줄 부모가 없으면 우리끼리 뭉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여기서 일하면 밥도 주고 하는데…….”

“돈은 받고? 저기 어른들 봐 봐. 동전 하나라도 안 받는 사람 있어?”

“우린 어른이 아니잖아.”

“크면 뭐가 달라지고?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주고 부려 먹는데 큰다고 돈을 줄 거 같아?”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린다.

싸우는 건 아니었군.

나이에 안 맞게 똘똘한 녀석이다.

대화가 흥미로워 가만히 담장 위에 앉아 구경했다.

“잘 들어. 우리뿐만이 아니야. 최근에 마을에 고아랑 거지들, 부랑자들이 더 들어왔어. 그렇지, 막슨?”

“어어. 이번 주만 6명이 들어왔지.”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야. 도망쳐 온 사람이 많다는 건 그 괴물들이 더 늘어났다는 뜻이고.”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도 몬스터는 존재했다.

있기만 할까. 날뛰고 있겠지.

탑에서 보여 주는 세상은 모두 멸망하고 있는 세계니까.

그저 이곳까지 몬스터가 뻗어 오지 않았을 뿐이다.

“마을에 살지만 이곳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알잖아.”

“요,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졌는데. 어제는 칭찬도 받았구…….”

“그래야 군말 없이 일하니까!”

소리친 남자애가 웃통을 벗는다.

골격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마른 몸에는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상처들이 가득했다.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에일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봐 왔던 모습인 건가. 이상하게도 익숙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한마디 잘못하면 이렇게 되는 거 알잖아. 너도 당했으니까, 아니 네가 가장 먼저 당했지.”

“나 풍차에 일하러 가야 해. 갈게!”

“야!”

엘리니가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고 남자애가 그 팔을 잡는다.

헐렁한 소매가 올라가며 다친 팔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상적이지 않은 형태의 팔이었다.

마치 부러진 뼈가 잘못 붙은 것처럼 미묘하게 각도가 안 맞았다.

부목만 제대로 댔어도 저렇게는 안 된다.

‘지금보다도 어릴 때 부러진 거군.’

아주 약간의 의학 상식도 없을 때 다친 거다.

동시에 도울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면.

‘돕질 않았거나.’

차분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우리 같은 사람이 모이고 있어! 지금 뭉쳐야 돼! 우리도 사람이야!”

골목길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엘리니를 향해 남자애가 소리쳤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녀석을 다른 아이들이 붙잡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

아이들은 보지 못했으나, 작게 열린 창문 너머 한 여인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위치와 인상착의를 기억해 뒀다.

-툭툭.

“그에에.”

덕춘이를 토닥여 주니 폴짝 담 너머로 뛰어간다.

모두가 사라진 골목길.

은신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갑옷은 입지 않았으나 허리춤에 찬 검은 뚜렷했고.

“아이고. 최근에 오셨다는 자유 기사님이지요? 좋은 날씨입니다!”

“기사님은 확실히 다르시네요. 어디 잡졸들은 무례하기만 하고 마을에 들어오면 조용히 있지를 않는다니까요.”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헤헤.”

크지 않은 마을답게 내 소문을 들은 이들 몇몇이 아는 체를 했다.

본능적으로 내가 본인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 같다.

어쩌면 보호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틀 전,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를 잡았다.

고작해야 4성짜리 몬스터였지만 일반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괴물이니까.

그들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몇몇은 맛이 좋다며 과일을 건네기도 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같게 보이지 않았다.

대격변 시절, 내가 중학생일 때가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술집이 어디지?”

“예? 아. 요즘 날이 좀 덥지요? 저쪽, 포튜스네 술집이 맛이 좋습니다.”

“고맙군.”

그 말을 끝으로 술집으로 향했다.

한동안 엘리니를 감시하느라 숙소에 박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고 당연히 이곳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확인해 봐야겠다.

결국 이곳은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세계.

델버튼의 고향이었던 거인계처럼 연관된 뭔가가 있겠지.

98층의 목표가 녀석을 잡는 거라면.

‘난 그쪽에 집중한다.’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 아니라 방향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술집에서 여러 정보를 모으기 전,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무엇을 할지 멤버들에게는 말해 둘 생각.

[쁘띠공듀]: 저는요오… 우선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거예용!

[쁘띠공듀]: 혼돈의 파편이 살아온 곳이자나여!

오케이.

이거면 대충 알아듣겠지.

난 당당히 술집으로 향했다.

* * *

새벽.

고된 노동을 마치고 술꾼들도 잠에 빠져들 시간.

“또 네놈이냐! 어디서 마을 분위기를 흐리려고!”

“어리다고 봐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고! 누구 덕에 밥 먹고 산다 생각하는 거냐!”

“그, 그걸 어떻게?”

몽둥이를 쥔 남성 둘이 마을 외곽으로 찾아왔다.

도망치지 못하게 앞뒤로 포위한 이들 사이에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어반스.

엘리니와 함께 이곳으로 온 고아였다.

그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누가 말한 거지? 배신자가 있었나? 막슨? 폰? 외부인하고는 아직 안 만났는데.’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참에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놔야지.”

“말도 못 하게 만들어 주마.”

그들이 천천히 다가왔고.

-후웅!

가차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기껏해야 십대 중반에 성인 둘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촤악!

“저리 꺼져!”

“이 자식이!”

흙을 뿌리며 도망쳤다.

먹은 게 없기 때문인가.

몸이 가볍고 발이 빠르다고 자부하던 어반스였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빠악!

뒤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던진 몽둥이에 등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넌 진짜 뒈졌다.”

“놔! 놔, 새끼들아!”

붙잡힌 어반스가 발버둥 쳤지만 근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를 내려다본 이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망설임 없이 내리친 몽둥이가 소년의 어깨를 때리기 직전.

-텁.

“말로 하지?”

이블아이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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