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파란 머리
호수로 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를 가로막는 적도 없거니와 하늘을 통해 이동해 최단 경로로 이동했으니까.
마을도 들르지 않았다.
이곳은 마을이 있는 필드다.
그 말은 곧.
‘NPC든 중립 NPC든 깔려 있을 거라는 말이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97층이야 스마일캡이 지배자로 있던 만큼 NPC들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니까.
혼돈의 파편.
그 녀석이 이곳의 주인이다.
달리 말하면 이곳에 있는 이들 역시 우리를 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나.
[스마일캡]: 얘들이 우리를 잡으러 다니지는 않아. 일반적인 필드랑 비슷하다 보면 돼
[스마일캡]: 적어도 초반부는 그래.
이미 이곳을 겪은 스마일캡은 초반부만큼은 별다른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난 가능한 조심할 생각이다.
녀석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따지고 보면 97층도 내가 올라오고 나서 바뀐 게 많거든.”
여기라고 다를까?
글쎄. 뭔가 변화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초반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이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뭐,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98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사실 작전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할 만큼 간단한 거긴 했지만.
스마일캡은 98층의 지배자를 부르는 법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등장하는 조건을 알고 있다.
‘소녀를 찾으라니. 너무 애매하단 말이야.’
혼돈의 파편이 지키는 존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모종의 연관이 있는 존재가 있다고 했다.
정작 이름과 외형은 기억나지 않는다나.
시스템적인 개입이 있었던가, 혼돈의 파편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주어진 단서라고는 고작해야 여자아이라는 것과 대략 10살에서 15살 사이 정도로 보인다는 것 정도.
그 소녀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모종의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고, 그에 따라 혼돈의 파편이 등장한다는 거 같다는데.
‘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스마일캡 또한 이야기는 했지만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처음 올라갔을 때는 우연.
두 번째 올라갔을 때 또한 반쯤은 필연적으로 소녀를 마주쳤다고 했다.
그의 목적은 혼돈의 파편이었기에 소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번 모두 적당한 아이템과 식량 등을 쥐여 주고 돌려보냈다고 했던가.
그리고 얼마 후, 혼돈의 파편이 등장했다.
우연이라 볼 수도 있다.
다만 정황상.
‘녀석은 그 소녀가 버려지면 등장한다.’
기사도와 징벌의 뮬랑 카센.
그녀의 이름으로 봤을 때, 소녀를 버린 거 자체가 기사도에 어긋나기에 징벌하러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고.
나름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들도 가능성 있다고 동의했다.
주어진 정보가 많지 않기에 그나마 맞아 보이는 쪽으로 생각한 것.
합당한 방법이긴 하다만.
“뭔가 놓치고 있는 거 같단 말이야.”
미묘한 찝찝함.
소녀와 혼돈의 파편의 관계도 알 수 없다.
에렘바트와 제니일처럼 과거 인연이 있는 대상인가?
내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중립 NPC를 제외한다면 탑에는 아이가 극히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NPC가 되려면 등반해야 한다고.’
적어도 탑을 오른 이들이 NPC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린아이는 탑의 초대를 받지 않는다.
탑은 등반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에게만 초대를 보내니까.
어릴 때부터 강력한 힘을 쓰는 몇몇 종족은 예외긴 하다만.
‘스마일캡은 평범한 아이라고 했어.’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기사도?
그걸 왜 우리한테 따져.
우린 기사도 아닌데.
굳이 따지면 함께 올라온 노블 나이트가 기사랑 비슷하긴 하다.
대의명분도 있고 입고 있는 것도 갑옷인 경우가 많으니.
스마일캡은 어떤가?
“걔가 기사랑은 좀 안 맞지 않나?”
“그에에.”
맑은 호수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있던 덕춘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고딩.
내가 느낀 스마일캡의 느낌은 그거였다.
실제로는 탑에 오래 갇혀 있어서 고딩 나이는 아니겠다만.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이가 17살이었다고 들었다.
본인이 말한 건 아니다.
초코쪼코가 말해 준 거지.
어린 나이에 들어온 부작용인지, 사회성도 별로고 어린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한마디로 기사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NPC마다 다르긴 하다만 NPC 중에서도 악질인 녀석들이 널렸단 말이지.”
그동안 탑을 오르며 수많은 NPC를 마주쳤다.
가히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이들도 있었으나 동네 양아치, 비겁한 놈.
기타 쓰레기 같은 행동을 하거나 남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는 고약한 이들도 즐비했다.
왜 그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가.
어째서 기사도에 위배되는 행동을 묵인할까.
‘등반가한테만 반응하나?’
어찌 됐든 이곳은 탑이니까 등반가에게 그에 걸맞은 시련을 줘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녀석이 생각하는 기사도와 우리가 아는 기사도가 다른가?
흥미로운 주제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질문이기도 했고.
“후우. 됐다.”
고민은 여기까지.
정보가 너무 없다.
지레짐작하기는 하는 거로는 결론이 안 나온다.
“마을에 들어가야겠군.”
결국 정보가 필요하다.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녀석들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니.
특히나 한 층의 지배자라면 더 그렇다.
이곳은 필드.
녀석과 연관된 세계일 게 분명했다.
이렇게 정교하고 분명한 세계관을 가진 필드는 지배자가 살아온 세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단서가 있을 게 분명했다.
“덕춘아, 슬슬 나와. 마을 들어가야 할 거 같아.”
“그에에.”
이미 다른 곳에 떨어진 이들은 소녀를 찾고 있을 거다.
이 넓은 공간,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흩어져 찾는 수밖에.
그리고.
‘스마일캡이 했던 것을 재연해야겠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야 있기는 하다만 아이를 방치하라는 뜻이었으니.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테니까.
혼돈의 파편은 강했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붙은 풀을 털어 냈다.
“호수에는 특별한 게 없군.”
눈에 띄는 지형이라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밤 동안 뒤져 봤지만 그냥 깨끗하고 물고기가 많은 호수였다.
이 정도면 적당히 걸러 내면 식수로도 쓸 수 있을 정도.
움직이기 전, 목이라도 축일 생각으로 물을 떠 마시려는데.
“음?”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재 시간은 이른 아침.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색에 가까울 정도로 색이 진한 푸른 머리.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은 소녀가 자기 몸뚱이만 한 양동이를 들고 뒤뚱이며 오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10살 좀 넘었을까.
중학생도 되지 않았을 거 같은 아이였다.
설마?
“앗.”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냥 어…….”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멈칫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동자.
수상하지 않음을 어필하려 했으나.
‘갑옷 벗고 있을걸.’
이걸 생각 못 했네.
아니, 언제 혼돈의 파편과 싸울지 모르는데 갑옷을 어떻게 벗고 있냐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별수 없다.
지금이라도 갑옷과 투구를 벗고 선량하며 순박한 나의 얼굴을 보여 주는 수밖에.
“그에에.”
“쉿. 덕춘이.”
자연스럽게 덕춘이의 입을 막고 투구를 벗으려는 때.
-초롱초롱!
아이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숨길 수 없는 호기심과 호의가 보였다.
“반짝반짝!”
잠시 덕춘이와 눈을 마주친 나는.
-파아아아앗!
각 속성을 자극해 갑옷을 반짝였다.
그뿐일까.
[치명적인 포즈(C) Lv.6]
[스킬 레벨 업!]
[치명적인 포즈(C) Lv.7]
가장 잘 나의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현란하게 빛나는 갑옷.
그에 맞춰 움직이는 몸짓.
“와아아아아!”
-짝짝짝!
양동이도 내팽개쳐 둔 채 아이가 손뼉을 쳤다.
찔끔.
눈물이 났다.
‘처음이다.’
치명적인 포즈를 보고 박수를 쳐 주는 사람은.
난 좀 더 열정적으로 빛을 뿜었고.
“게헤에.”
덕춘이는 눈 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이는 이름이 없었다.
고아 출신으로, 잡일을 하는 대가로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는다나.
호수도 물을 뜨기 위해 온 것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권능을 사용해 봤지만.
[엘리니]
-98층의 중립 NPC입니다.
-고아 출신!
권능으로도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굳이 고아 출신을 강조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하다만.
‘평소에도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뭐.’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엘리니라는 이름이 있는 걸 봐서는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일찍 돌아가셨나 보군.’
그럴 수 있다.
나도 주변에서 겪어 봤고.
대격변의 날.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고아들도 대거 발생했다.
나 또한 그 시기에 부모를 잃었다.
그나마 당시에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나보다도 어린 이들도 당연히 존재했다.
고작해야 유치원을 다닐 나이.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까지.
그중에는 너무 어려서. 혹은 충격에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후, 주민등록번호를 발급받을 때 스스로 이름을 만들었다.
뭐, 그렇다고 그냥 ‘너’, ‘야’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임시로 이름을 짓거나 별명을 사용했지만.
“너도 별명이나 그런 건 있을 거잖아.”
사람끼리 엮여 사는 데 없을 리가 있나.
나의 물음에 꼬마가 코를 찡그린다.
표정만 봐도 썩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닌 모양.
하기야 별명이라는 게 다 그렇지.
“파랑 머리. 아니면 빵빵이요.”
“빵빵이?”
어떻게 사람이 빵빵이…….
음.
슬쩍 부풀어 오른 볼이 보였다.
찔러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아 냈다.
아주 직관적인 별명이었다.
“그래, 빵빵아.”
“빵빵이라 하지 마요!”
“아니, 네가 빵빵이라며.”
-따악!
“악!”
엘리니가 냅다 내 정강이를 찼지만 발을 부여잡는 건 본인이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갑옷은 벗었지만 그렇다 한들 내 다리가 물렁할 리가 있나.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게 싫으면 엘리니라고 부를게.”
“엘리니?”
“내가 아는 아주 멋진 사람의 이름이야.”
엘리니. 엘리니.
그 발음을 중얼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었는지 눈이 반짝인다.
“엘리니 좋아요! 오늘부터 엘리니라 불러 주세요!”
만족한다니 다행이다.
그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이름이니까.
머리를 헝클이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마을에 들어왔다.
엄청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평범한 마을.
목적지는 분명하지 않다.
엘리니를 따라온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계획은 간단하다.
혼돈의 파편을 불러낼 아이 후보를 구한다.
누가 진짜 후보인지 모르는 만큼 각자 움직이는 것.
모든 준비가 끝나면.
‘모습을 감춘다.’
혹은 자신을 따라오는 대상을 두고 떠난다.
그 안에 진짜 후보가 있다면.
‘그곳에 혼돈의 파편이 나타나겠지.’
괜히 짜증이 나 머리를 긁었다.
일부러 친해질 생각은 없다.
쓸데없이 정을 줄 생각도 없고.
그게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면 더 그렇다.
물론 사적인 감정으로 98층에 오른 등반가 전원이 참여하는 작전을 망칠 수는 없다.
그저 너무 가까워지지 않게 조절할 뿐이다.
“이블아이는 어디로 가요? 떠돌이 기사면 역시 도시? 아니면 다른 영지로?”
“도시도 나쁘지는 않은데 한동안은 이곳에 있을 거야.”
내 말에 엘리니의 표정이 밝아진다.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럼 저는 더 늦으면 혼나서 가 볼게요!”
내 손에서 물이 담긴 양동이를 잡아챈 엘리니가 마을 안으로 향했다.
잠시 길을 따라 걷다가.
-파앗.
사람들이 없는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래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 편히 커뮤니티를 사용할 수 없다.
어찌 됐든 후보 한 명을 찾았다.
그 사실을 멤버들에게 알릴 생각.
98층 공략자 채팅방이 있긴 하지만 난 닉네임 문제로 멤버들과 사용하는 채팅방을 이용하고 있었다.
[쁘띠공듀]: 후보 찾았어요☆
[정수리 핥짝]: 나도 꼬마애 한 명 알게 됐어
[냥냥펀치]: 이 몸도! 얘 귀여움
[니머리 탈모]: 하하하! 난 좀 애가 크긴 한데, 이 정도까진 괜찮을 듯!
다른 녀석들도 찾은 모양.
후보야 있으면 좋지.
냥펀은 사진까지 찍어서 올렸다.
“귀엽긴 하네. 엘리니가 좀 더 귀엽긴 하다만.”
냥펀이 찾은 건 파란 머리를 단발까지 기른 아이.
대략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로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찾았으려나.
벽에 기댄 채 98층 공략방을 살폈다.
글을 쓰는 건 힘들지만 눈팅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
난 잠시간 스크롤을 내렸고.
“…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초코쪼코]: 후보 찾았다!
[찌리리 요정]: 저두요
[섹시가이]: 얘 같습니다, 형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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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층을 오른 이들이 찾은 후보들.
사진은 모두 달랐지만.
전원 같은 머리 색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