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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712화 (712/740)

712화 98층

97층 클리어 후, 모두가 휴식을 가졌다.

상처를 치유하고 그동안의 전투를 떠올리며 습득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더불어 혹여나 96층에 있던 이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의도도 있었으나.

“포탈이 막혔다는군.”

“아무래도 이제 막 시련이 끝나서 그런 거 같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90층대잖아. 이럴 수도 있지, 뭐.”

아쉽게도 97층으로 올라오는 포탈이 막혔다.

이상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다르다 뿐이지, 90층대는 다 이런 식으로 흘러갔으니까.

90층대에 체크 포인트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에렘바트가 잠들었으니 이후에 올라올 사람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좀 더 쉽게 올라오려나.

아니면 시스템이 다른 시련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번 일로 증명되었다.

지금 탑을 오르고 있는 이들은 강하다.

스마일캡도 인정했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잘해 주었다고.

그 바탕에는.

“아이고.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가뜩이나 변변찮은데 다리까지 절뚝이면 어떻게 해요?”

“예에. 관상을 보아하니 그쪽이 더 아프신 거 같은데, 괜찮으시죠?”

“하하! 이 자식이!”

“뭐!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등반가들의 사이가 가까워진 게 있었다.

좀 과하게 친해진 면이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러했다.

탑의 특성상 홀로 움직일 때도 많고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경우도 많다.

나와 쁘찡연합이 나서서 대형 길드와 약탈자, 숭배자들을 처리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집단으로 움직이는 일은 많지 않았을 거다.

누구든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환경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많아 봤자 네다섯 명 정도 뭉쳐서 다니는 게 고작이겠지.’

상위 헌터 중 그룹을 이루고 있는 이들만 봐도 그렇다.

루키 그룹, 요정 클럽.

지금은 쁘찡연합에 묶여 있지만 나와 멤버들도 4명이 모여서 시작했다.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야 처음부터 결사대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 예외 케이스고.

“친화력이 좋네, 다들.”

“쁘찡연합 사람들이 미쳐서 그래.”

“저 크레이지 가이 좀 누가 때려 줘.”

“네가 해라. 난 쟤랑 개싸움 하기 싫다.”

지금은 연합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상위 헌터들도 친해졌다.

다른 그룹 인원들과도 교류했으며.

“아재요, 갑옷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아직 26살이다.”

“…진짜 지랄 좀 마십쇼, 형님.”

“이이이익! 맞다고!”

비교적 진중하고 무거운 노블 나이트마저 물들었다.

섹시 가이 김정현.

저 또라이가 옆에 붙으면 경계가 쉽게 무너졌다.

연합 사람들 중에 미친, 아니 유쾌한 사람들이 많아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친해지면 좋지, 뭐.

“자 자, 화내지 말고 따라 해 봐요. 쁘띠. 사랑. 평화!”

-빠악!

“악! 형님! 아픕니다!”

“넌 좀 닥치고 있어.”

쓸데없는 소릴 하는 녀석의 정수리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손을 털었다.

머리가 왜 이렇게 단단해.

역시 꿀밤은 릴카가 제맛이다.

슬쩍. 냥펀을 바라봤다.

뒤통수 그립감이 가장 비슷한 게 냥펀이기는 한데.

“뭐냥? 왜 눈깔을 그렇게 뜨징?”

“아, 아냐.”

애써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죽으면 릴카도 한번 보든가 해야지.

97층을 클리어하면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되는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탑에서 만든 NPC들과의 인연이 끝날 거라는 생각에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렇다고 탑에 남을 생각은 없지만.

대부분의 인원들이 회복을 마친 상태.

박살 난 무구를 교체하거나 수리를 하는 등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그것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내일.

우리는 98층으로 향한다.

그 전에.

“이걸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한단 말이지.”

유적 구석.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은 채 인벤토리에 넣어 둔 물건을 꺼냈다.

시스템이 개입한 대가로 준 보상.

겉으로 보기에는 정육면체 큐브처럼 생겼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았으나.

[시스템 큐브]

-시스템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습니다.

-버그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사용 후 제거됩니다.

등급조차 없다.

그럼에도 그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적어도 탑 내부에는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 자체가 없으니까.

무려 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아이템이다.

번복시킨다는 건.

‘시스템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는 거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다.

예로 들어.

“코인을 모두 쓴 사람이 퇴출당할 때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지.”

강제로 퇴출당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물론 그런 곳에 쓸 생각은 없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위험부담이 크다.

코인을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만든다?

그럼 그 사람은 NPC처럼 되는 걸까?

아니면 인위적으로 코인을 하나 더 만들어서 남겨 두는 걸까.

알 수 없다.

시스템은 유연해서 버그가 발생해도 어떻게든 해답을 만들어 낸다.

그 방식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좀 더 생각해 봤지만 적어도 지금은 쓸 곳이 없다.

나중에 필요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되겠지.

“후우.”

기둥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맑은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지금 미리 많이 봐 둘 생각이다.

위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여유가 있을 때 즐겨 둬야 했다.

더불어 98층에 뭐가 있을지 예상도 좀 해 보고.

‘그러고 보니 스마일캡이 올라가기 전에 전체 회의를 한다고 했었지.’

명실상부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인물은 스마일캡이다.

98층까지 올라간 사람은 녀석이 유일했으니.

운이 좋다.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다.

개인적인 호기심도 든다.

‘그 녀석도 상당한 괴물인데 2번 실패했다고 했어.’

상상이 안 간다.

도대체 거기에 뭐가 있는 걸까.

다만, 하나는 예상할 수 있었다.

만약 그곳에도 혼돈의 파편이 있다면.

“미친 듯이 어렵겠군.”

97층에서 나의 영향으로 에렘바트가 평소 이상의 힘을 부린 것처럼.

98층에 혼돈의 파편이 존재한다면 놈 또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 씨. 잠깐만. 그럼 99층도 그렇다는 거 아닌가?”

이건 좀 그런데.

이런 웃기는 경우가 있나.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려면 혼돈이 많아야 하는데 혼돈이 많으면 혼돈의 파편이 강해진다.

어떻게 돼먹은 시스템인지 절로 욕이 나온다.

이래서 90층대 테마가 혼돈인가.

혼란하다, 혼란해.

“어디 짱박혀 있나 했더니만. 일어나! 회의 시작한대.”

“아, 알았어. 때리지 마.”

“누가 들으면 내가 막 때리는 줄 알겠다?”

힐끔, 핥짝이가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 녀석을 살폈다.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탈모맨이 보고 싶어졌다.

이럴 때 탱커가 있어야 하는 건데.

“회의를 좀 늦게 하는 거 같다만 이유가 있겠지.”

“따로 준비할 게 있다면 미리 했을 거야. 물건이나 장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봐.”

잡담을 나누며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97층의 생존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이었던 모양.

“좋아. 다 모인 거 같으니 시작할게.”

예의 칠판 앞에 선 스마일캡이 발표를 시작했다.

자신이 겪은 98층에 대한 것.

“예상했겠지만 위에는 혼돈의 파편이 있어. 알잖아? 90층대는 혼돈 구간인 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90층대 초중반이면 모를까, 후반부에는 혼돈의 파편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이 녀석이 굉장히 빡세. 다행이라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알고 있다는 거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

그것이 뭐냐에 따라 조금은 대비할 수 있으니까.

“위에 있는 녀석의 이름은 뮬랑 카센. 기사도와 징벌로 이루어진 괴물이지.”

그의 선언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나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혼돈의 파편을 이루는 개념은 능력일 수도 있고 경향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예로 들어.

‘델버튼은 질병과 도박.’

녀석은 도박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걸 능력으로 쓰지는 않는다.

역병의 안개. 그걸 메인으로 사용하지.

‘에렘바트는 침묵과 시선.’

안개 속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델버튼과 달리 두 개념 모두 능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재앙의 힘까지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강함의 척도도 아니었고.

91층에서 만난 변신과 게임의 키무아누 또한 두 개의 능력을 사용했지만 내게 졌다.

델버튼과 싸워도 질 거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놈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지금껏 살아왔던 스스로의 역사이자 정체성이라는 것.

그렇기에 그 개념은 전투에 맞춰진 경우도 별로 없고 상관관계도 불분명하다.

그 강한 에렘바트를 보라.

‘침묵이랑 시선이 싸우는 용도는 아니잖아?’

심지어 두 개념 사이에 연결점도 없다.

에렘바트라는 존재의 삶을 차지한 가장 큰 부분이었을 뿐.

그런데 녀석이 말한 녀석은 어떤가.

기사도와 징벌의 뮬랑 카센.

‘관계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도 강해. 그런데 유사한 성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게 전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거 같다?

“미리 말하는데, 난 그 녀석과 두 번 싸웠고 두 번 다 졌다.”

머리를 긁적인 녀석이 인벤토리에서 기록구를 꺼냈다.

아마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기록해 분석하기 위해 남겨 둔 걸 거다.

“말로 할 거 없이 봐 보자고. 그럼 알아서 생각하겠지.”

녀석이 스크린에 기록구를 출력한다.

스마일캡이 시선을 따라 놈의 모습이 보였다.

기록구는 총 두 개.

그것을 모두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 합쳐서 8시간.

길다면 긴 시간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장 에렘바트와 몇 주를 싸운 것을 떠올린다면 그렇지 않다.

심지어 첫 번째 영상은.

“첫 트라이가 30분 만에 끝났다라.”

고작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그만큼 놈은 강했다.

발키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검술 관련 권능이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알리오스도 보면 감탄할 거야.’

그만큼 파괴적이면서도 정돈된 검이었다.

특히나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 보이는 신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아무튼 98층의 주인은 저 녀석이야. 지금부터는 주의할 점을 알려 주지.”

이어, 그동안 죽으며 얻어 낸 귀한 정보들을 말해 줬다.

녀석을 자극하는 방법이라든가.

녀석이 지키고 있는 대상이라든가.

필드의 구성이나 그런 것들까지.

간략한 정보가 교환되고 이야기가 오간다.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베테랑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다.

금세 심도 있고 구체적인 계획들이 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마일캡이 입을 열었다.

“우선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다들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아마 98층의 지배자에 대해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내가 손을 들었다.

“말해 봐.”

“플래티넘 등급 숭배자. 녀석은 지금 98층에 있겠지?”

스마일캡이 말했었다.

놈은 층을 오갈 수 있고 97층에서도 마주한 적이 있다고.

이번 시련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맞네. 시발.”

98층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뜻이었다.

* * *

[98층에 진입합니다.]

계획한 대로 아침이 밝은 것과 동시에 포탈에 입장했다.

첫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황폐하지도 않고 원시림같이 나무가 빽빽하지도 않고.

날씨도 살짝 건조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맑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언덕.

그 아래, 풍차와 밀밭, 붉은 지붕을 한 단층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유럽 우표나 엽서에서 볼 만한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에에.”

“저기 가 보고 싶어?”

덕춘이가 반응을 보인 건 그보다 더 멀리.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들판을 지나 위치한 호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한 느낌을 준다.

한동안 오염된 바다에서 헤엄쳐서 그런가 저곳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쁘지 않다.

어차피 올라온 이상 움직여야 했으니까.

놀랍지도 않게 나와 함께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포탈을 넘는 순간 랜덤으로 전송되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었으니.

[니머리 탈모]: 아아. 통신 보안. D구역에 도착한 거 같다. 오버.

[냥냥펀치]: 여기는 냥펀. B구역 채굴장 도착이다, 오버.

[정수리 핥짝]: 난 A구역 10번 마을인 거 같은데? 확인 좀 해 보고.

우리는 이미 98층의 지형을 알고 있다.

합류하는 건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이곳의 지배자를 처리하는 것뿐.

그런 의미로 내 위치를 말했다.

[쁘띠공듀]: 공☆듀 C구역 호수 왔쪄염!

작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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