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어떻게 올라갔지?
에렘바트가 심해로 들어가기 전, 내게 준 선물.
그것은 시야였다.
녀석의 눈으로 바라봤던 과거의 기억이기도 했고.
‘이거 탑을 오를 때의 시선이야.’
난 그게 보통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빨리 감기를 하듯 흘러가는 시야.
초반부에 녀석이 괴로워하거나 저층을 오르는 등의 모습은 스킵되었다.
녀석이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치직. 치지지직.
눈에 뭐가 들어간 듯 시야가 흐려진다.
스파크 같기도 하면서 이물감이 느껴졌고 실제로도 그랬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방해.
‘시스템이 제약을 걸었군.’
주어서는 안 되는 정보를 직접 주거나 시스템의 의도를 벗어나다 못해 뭉개 버릴 때 생기는 현상.
녀석이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건 시스템 입장에서도 막고 싶은 거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NPC라면 그것만으로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만.
‘에렘바트는 아니지.’
녀석은 혼돈의 파편.
그것도 굉장히 강한 존재였으니까.
혼돈은 규칙을 거부하고 시스템은 규칙의 총체나 다름없다.
일부라면 몰라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다는 뜻.
‘90층대다.’
더러워진 렌즈처럼 시야가 탁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현재 시점은 90층대.
-스르르륵.
93층, 95층, 97층을 지나.
‘지금보다 높은 곳!’
아직 올라가 본 적 없는 영역의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파지지지직!
시스템의 개입이 심해진다.
작정하고 방해하는지, 눈을 뜨는 게 괴로울 정도로 잡다한 뭔가가 앞을 가린다.
에렘바트의 시야 자체를 막을 수 없으니 시스템이 가진 정보들을 무작위로 띄워 눈을 어지럽히는 것.
그 과정 또한 시스템의 범주를 벗어난 것인지 각종 데이터가 일그러지고 깨진다.
‘버그까지 발생시킨다라.’
어지간히 보여 주기 싫다 기어겠지.
가 보지 않은 영역을 미리 아는 건 일종의 치트키나 다를 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은 했었는데.
‘상관없지 않나?’
탑은 이번에 처음 생긴 게 아니다.
당연히 멸망할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구조가 바뀐다.
당장 우리도 서버가 통합되기 전까지는 각 나라마다 등장하는 몬스터와 클리어 조건이 달랐다.
에렘바트가 97층 너머에서 만난 지배자들이 지금도 똑같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
보여 줘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시스템은 왜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가.
-스스스스.
98층.
그곳을 지나 99층이 보인다.
이제 와서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는 거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에렘바트의 시선에 더해 나의 권능까지 사용했다.
그저 실루엣에 불과했지만 이전, 오필리아가 준 기록 아티팩트로 봤던 것이 보였다.
모든 숭배자의 왕.
베드록 바알루제.
‘저놈은 계속해서 99층에 있었나 보군.’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탑에 군림한 걸까.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하다.’
그저 바라봤을 뿐이건만 놈의 강대함을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압도적인 무언가.
존재 자체가 다른 느낌이다.
당시 99층을 오르던 에렘바트 또한 두려움을 느꼈으니 말할 것도 없겠지.
놈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
비록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권능이 발현될 거다.
지금 난 녀석의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놈에 대한 정보를 읽어 내면……!
-파지지지지직!
-츠즈즈즈즛!
그때.
다시금 시야가 바뀌었다.
온갖 깨진 데이터와 버그성 메시지.
시스템의 경고와 스파크로 도저히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100층이다.’
에렘바트는 혼돈의 파편.
그 말은 곧 100층에 올랐다는 뜻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고 싶은 거냐.
놈이 보여 주고 싶었던 건 99층에 있던 그 괴물이 아니었다.
탑의 꼭대기.
내가 반드시 가야 할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어떠한 공간인지는 알 수 없다.
아주 환한 것도 같으면서도 동시에 어두웠으니.
시스템의 방해가 아니었더라도 내부를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다.
탑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는 느낌이었으니.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몬스터가 있거나 하지는 않아.’
애초에 100층 정도 되면 일반적인 몬스터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급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으니까.
다른 재앙이나 혼돈의 파편이라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고.
어쩌면 그냥 빈 공간일 수도 있었다.
탑은 10층 단위로 안전지대가 발생하니 100층 또한 그런 곳일지 몰랐다.
어떻게든 내부를 살피려는 타이밍.
----!
형체 없는 압박감과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무언가가 에렘바트의 능력을 억누르고 있다.
마치 전기가 나가듯 시야가 사라졌으나,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기 직전.
-구오오오오오!
에렘바트의 분노와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때 자신이 느낀 감정과 혼란스러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리고 싶었던 거지.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눈을 감습니다.]
“허억! 헉!”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중앙섬에 있었고 옆에는 덕춘이도 있다.
녀석의 기억을 보며 숨을 참고 있었는지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등 뒤로 흐르던 식은땀이 전신을 적시고 있었다.
속이 뒤엉킨다고 해야 하나.
“우욱!”
진탕된 머리와 내장,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에 헛구역질했다.
바닥에 엎어지면서도 방금 느낀 것을 잡으려 애썼다.
-파즈즈즈즉!
지금도 시스템이 나를 억압하며 기억에 혼동을 주고 있다.
원래라면 알려 주지 않았을 수많은 정보와 탑에 대한 비밀.
이곳을 오른 이들의 경험과 멸망한, 멸망할 세계의 기록들까지.
가히 보물이라 부를 만한 정보였지만.
“크흡! 끄으읍!”
막대한 정보와 에너지는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렇게 머리에 때려 박은 정보들이 오염되어 있다.
전후 관계, 역사의 흐름,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이 제멋대로 뒤얽혔다.
시스템은 내게 신비로운 비밀을 알려 주려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본 것을 더럽혀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이지.
짜증 나게도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혼돈이 시스템의 개입을 일부 무시합니다.]
나 역시 혼돈이 많고 다룰 줄 알지만 완전한 혼돈의 파편은 아니다.
아니, 반쪽짜리도 되지 못한다.
시스템이 에렘바트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시스템의 개입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뒤엉킨 기억과 감정, 정보들에 파묻혀 에렘바트가 보여 준 것들이 빠르게 휘발한다.
자잘한 것은 버린다.
가장 핵심이 되는 것만 어떻게든 남기려 애썼다.
[시스템의 과도한 개입이 인정됩니다.]
[시스템 제약에 의한 페널티가 제거됩니다.]
[시스템 개입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내 나를 괴롭히던 시스템이 멈췄다.
거짓말처럼 개운해진 머리.
시스템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며 그 대상은 시스템 그 자체도 포함된다.
딱 이 정도까지가 개입 가능한 범위라는 거겠지.
보상까지 주고 좋네.
이건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기억이 거의 안 나는데.”
시스템이 내게 밀어 넣었던 정보와 에렘바트의 기억 모두 희미하다.
빠르게 망각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깊은 의식 어딘가에 묻힌 걸지도 몰랐다.
애써 떠올리려 해도 가닥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붙잡은 것이 있었으니.
녀석은 100층에 올라 선택지를 받았다.
그리고 어느 쪽을 골라도.
‘에렘바트는 혼돈의 파편이 됐다.’
적어도 그거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선택지라는 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른다.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다.
강제로 100층까지 가도록 만든 히든 퀘스트.
그곳에 있는 초월에 대한 조건이 있었다.
[???-히든 퀘스트]
-탑을 오르세요.
-【초월 조건】
-1) 100층 진입 (미완료)
-2) 혼돈 수치 1,000점 이상 (완료)
-3) 격의 상승 (완료)
-4) 두 개 이상의 개념 (1/2)
-5) 탑의 선택 (완료)
-6) 혼돈의 파편의 인정 (완료)
-7) 선택 (미완료)
초월의 마지막 조건.
선택.
아마 이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다.
“후우. 골치 아프군.”
마른세수를 했다.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으나 미리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어이! 괜찮아?”
“97층 클리어됐는데!”
“공블공블!”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굉장히 긴 시간이 흐른 거 같다만.
실제로는 그리 많은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다.
이제 막, 전선을 뺀 멤버들과 급하게 합류한 스마일캡과 노블 나이트가 오고 있었으니.
놈의 어릴 적 기억과 탑에서의 기억을 보느라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했다.
“해치운 건가?”
“그건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 확실히 처리하는 게 좋아. 그래야 이후에 다시 올라와도 편하지.”
스마일캡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97층의 지배자인 만큼 에렘바트에게 이래저래 시달린 건 알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구오오오.
심해 어딘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릴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이 다시 범람을 일으킬 거 같지는 않다.
이미 가지고 싶은 건 챙겼고 내게 호의적이다.
무작정 다시 덤비지는 않을 거라는 뜻.
물론 시스템이 그 꼴을 지켜볼지는 모르겠다만.
“녀석이라면 잠잠할 거야.”
에렘바트도 보통이 아니니 시스템의 입맛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한동안은 안전하다는 말.
스마일캡도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일단 쉬어. 이번에 네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부상자들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이곳은 안전지대가 아니었고 치료를 위해서는 여러 조치가 필요했다.
98층을 오르기 전, 준비도 해야 했으며.
“재경이 형이 올라왔어야 했는데. 쯧.”
범람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아직 97층에 올라오지 않았다.
박재경도 마찬가지.
그들은 다시 97층의 시련을 겪어야 할 거다.
그 형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니 이준석도 아직 못 올라왔군.’
박재경도 옆에 있으니 어떻게 잘 올라오겠지.
영 아니다 싶으면 내가 내려가서 도와줘도 되고.
97층을 봐 보니 98층과 99층에 올라가서 몇 번은 죽지 않을까.
“야 야, 아까 그거 뭐였냐?”
“음?”
“에렘바트랑 싸울 때, 너 진짜 혼돈의 파편 같았어.”
“공블아이, 이제 사람이길 포기한 거얌? 안 되는뎅.”
쿡쿡. 내 옆구리를 찌른 핥짝이가 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냥펀 역시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함인지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렸고.
탈모맨은.
“그래도 좀 멋있지 않았, 악! 내 발!”
“넌 조용히 있어.”
평소와 같이 핥짝이한테 발등을 밟혔다.
아무래도 내가 악마화 한 걸 본 거 같다.
그냥 마기만 사용했으면 모를까, 이번에는 혼돈을 같이 사용했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사용할 테니 미리 말해 주는 편이 좋을 터.
간략하게 그때의 상황을 전달했고.
“그러다 혼돈의 파편처럼 안 되게 조심하라구!”
“이상 있으면 말해. 내가 대가리 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 줄 테니까.”
“오! 그럼 내가 뒤에서 붙잡고 있어야겠다, 못 피하게.”
녀석들 또한 어느 정도 납득한 거 같다.
그래도 걱정해 주니 좋네.
“아무튼 97층도 끝! 위로 올라가자고!”
탈모맨이 주먹을 내지른다.
그래. 결국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여기서 멈추지 않을 테니까.
나 역시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결국 100층에 들어서야 한다.
“나도 상자깡이나 하면서 쉬어야지.”
시스템이 개입에 대한 보상으로 준 아이템.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다.
입꼬리를 올리며 멤버들을 따라 걷는 찰나.
불쑥,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혼돈의 파편들은 어떻게 99층에 있던 놈을 뚫고 100층에 올라간 거지?’
간접적이지만 두 번이나 99층에 있는 녀석을 봤다.
에렘바트마저도 놈을 보며 두려워했다.
내가 싸운 혼돈의 파편 중에는 에렘바트나 델버튼과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약한 놈들도 있다.
과거의 내가 싸워서 이겼을 정도니 지금 싸운다면 확실히 이기겠지.
그런 놈들도 100층에 올랐다는 건데.
시스템이 보여 줬던 정보 중에서 뭔가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약한 놈인가.’
모르겠다.
다만, 그랬으면 좋겠다.
어차피 올라가면 알게 될 내용이니 구태여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 * *
99층.
모든 숭배자들의 왕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파괴되는 공간.
유형화될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 일렁거렸다.
그의 입가가 희미한 호선을 그린다.
눈에 흥미가 가득하다.
그것은 얼핏 호감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면에 가득한 연민과 광기만 아니었다면 투명한 눈이 아름답게 느껴질지 몰랐다.
“어서 왔으면 좋겠군.”
만약 필요하다면.
“그대에게는 무엇이 어울릴까.”
선물을 줄 생각이다.
받는 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쩌면.
조금은 욕심을 부려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