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97층 클리어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사용해서 싸운다.
탑의 말단 부분, 최상위층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구간은 결코 만만치 않다.
힘을 아낀다는 선택지는 버렸다.
그렇게 행동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콰아아앙!
심지어 지금은 나 혼자 싸우고 있으니까.
[독자무강獨者武强(SSS) Lv.7]
[강철의 의지(SS) Lv.10+]
[강체强體(SS) Lv.10+]
나를 보조하는 수많은 스킬이 발동됐지만 쉽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혼돈의 파편.
그것도 영물에서 시작해 재앙이 되었고 끝내 탑의 100층까지 엿본 괴물이었다.
‘어쩐지 혼돈의 파편이라 쳐도 괴상한 능력을 많이 쓰더라니!’
연속으로 베어 낸 검.
그 검격에 거인의 팔이 조각났지만 다시 서로 엉겨 붙어 재생됐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기 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좋게 생각하자.
놈이 강하고 능력이 많은 건 맞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놈들도 비슷하다.
혼돈의 파편이 되더라도 고유 종족값에 따른 보정치는 존재했으니까.
에렘바트 역시 비슷한 케이스라고 보면 되지.
“후우.”
숨 쉬는 것도 잊고 공격을 이어 나가다가 훌쩍 위로 떠올랐다.
단순히 숨을 고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구오오오오!
거인만 상대해서는 답이 없다.
저 녀석도 같이 잡아야지.
따지고 보면 본체는 거인이 아니라 에렘바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나를 놈의 꿈속으로 다시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한번 보여 주기도 했거니와 내가 언제든 꿈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수오오오!
바다에서 태어난 영물 출신답게 자유자재로 부리는 물과.
시선을 마주하는 것과 동시에 발동되는 온갖 환영들.
깜빡.
나를 바라본 에렘바트가 눈을 감았다.
이미 여러 차례 당했던 그것.
거부할 수 없는 환상의 영역에 빠져들 뻔했지만.
[혼돈이 대상의 규칙을 거부합니다.]
[환상의 일부를 무너트립니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르르릉.
새롭게 생겨나던 안개 속 마을과 주민들이 힘을 잃고 무너진다.
쓰레기와 몬스터들.
환상과 현실에 끼어 뒤죽박죽 섞여 버린 모습은 괴상했고 그 덕에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거짓이라고.
에렘바트가 쌓아 온 소꿉놀이에 불과하다고.
-콰아아앙!
일부러 더 세게 건물의 형상을 한 산호초를 걷어찼다.
박살 나며 날아간 파편들이 다른 것들을 연쇄적으로 부순다.
마치 거대한 샷건을 쏜 것과도 같은 모습.
분노한 에렘바트가 비명을 질렀다.
-움찔.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혼돈의 존재감에 주먹에 힘을 줬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큰일 났다고 해야 하나.
‘혼돈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됐어.’
에렘바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혼돈이 늘어난다.
녀석도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올라오는 것으로 늘어난 혼돈에 기꺼워했고 평소보다 훨씬 강한 힘을 보였다.
망할 혼돈은 함께 있으면 더욱 커질 뿐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것만 해도 곤란하건만.
“너 때문이잖아!”
에렘바트의 경험과 기억을 엿보는 과정에서 혼돈을 다루는 능력이 크게 상승했다.
놈과 동기화된 상태에서 겪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나는.
[수면 전투 복기(S) Lv.MAX]
꿈속에서 했던 것들을 매우 잘 배운다.
알리오스의 기억을 바탕으로 검술을 습득했을 때도 그런 식으로 했었으니까.
앞으로 상대할 놈들을 생각하면 익혀 두면 좋긴 한데 괜히 울컥한다.
-파아앙!
날개를 펄럭이며 놈에게 쇄도했다.
놈을 감싸고 있던 물방울에서 물로 이루어진 촉수가 뻗어 나온다.
자유자재로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곡예 비행을 했다.
페이크를 날리며 고도를 낮추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날개를 접어 면적을 줄이기도 했다.
-촤아아아악!
그럼에도 모든 물줄기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엄청난 수압을 자랑하는 물대포.
맞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날려 버릴 위력이었고.
“퉤. 속이 다 울리네.”
그 압박감이 온몸을 울려 속이 뒤집혔다.
신경 쓰지 않고 일렉트릭 쇼크를 사용했다.
-파지지지지직!
물을 다룬다?
그럼 상성으로 대응해야지.
이게 내 장점이다.
다양한 속성의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것.
적어도 스킬의 종류에 있어서는 최상위권이라고 자부한다.
보유하고 있는 스킬만 50여 가지가 넘으니까.
-구오오오오!
에렘바트가 몸을 들썩인다.
고통스러운 것도 있지만 불쾌한 기색이 강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겠지.
-후웅!
전격을 내뿜고 있는 찰나, 거인이 내게 주먹을 내질렀다.
깜짝 놀랄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빠가가각!
독자무강과 강철의 의지, 강체, 물리 공격 내성까지 사용해 막았다.
그럼에도 팔이 저릿하다.
이래서 피지컬 차이가 크면 힘들다니까.
날개를 움직이며 어떻게든 균형을 잡은 날 바라본 거인이 연속적으로 주먹을 날린다.
특별한 스킬을 쓰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걸 쓸 수 없었기에 익힌 기술들이지.
복싱과 비슷한 스타일의 펀치.
에렘바트를 지키듯 거대한 몸으로 녀석을 가리며 내게 전진 스텝을 밟는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여 나 또한 입꼬리를 올렸다.
“좋지.”
온몸에 마력이 들끓는다.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매우 정직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자 함정인가 싶어 멈칫한 거인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원했다.
[디그(S) Lv.MAX]
-쿠구구궁.
녀석이 디디고 있는 땅이 가라앉으며 자세가 기운다.
여러 차례 사용했지만 사용할 때마다 좋은 효과.
물론 이런 얕은수에 당할 만큼 어설프진 않았다.
-푸화아아악!
에렘바트의 의지에 따라 땅속에서 솟아오른 물줄기가 가라앉은 땅을 대신해 거인의 몸을 받쳤으니까.
오히려 그 반발력을 이용해 탄력적으로 쏘아져 오기까지.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트레이트.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직접 맞지도 않았는데 닥쳐 오는 풍압에 머리가 흔들려 코피가 쏟아졌다.
-후두두둑.
거인 또한 이런 움직임이 쉬운 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근본은 수많은 몬스터들을 뭉쳐 만든 괴물.
에렘바트의 능력으로 진짜 사람인 것처럼 시선을 바꾸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인은 멈추지 않았다.
에렘바트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 어울려 주마.
-슈우우욱!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는 물줄기와 정면을 가득 메우며 다가오는 주먹.
피하기 쉽지 않다.
어떻게 회피하더라도 점점 말려들게 뻔하고.
그래서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안개 질주(SSS) Lv.6]
안개가 되어 물줄기를 피하고 휘젓는 손가락 틈을 파고들어 놈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망자귀환亡者歸還(SSS) Lv.5]
망자에서 되돌아오는 찰나의 타이밍.
푸화아아악!
온몸에 마기를 내뿜었고.
[잊혀지지 않는 창기사(SSS) Lv.10+]
망구를 소환했다.
다만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스아아아아아!
망구는 근본적으로 망령.
지금의 나 또한 망자였으니.
-끼아아아아아!
마기를 매개체로 나와 망구가 뒤엉킨다.
스파크가 튀며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
화륵.
마기로 이루어진 불길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실체화했다.
악마와 같은 형상으로.
또 다른 존재와 합쳐진 부작용인가 정신이 멀게 느껴졌으나.
[정신 보호(SSS) Lv.MAX]
이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검강]
그동안 사용하던 것과 달리 시커멓게 물든 마기의 검이 뻗어 나왔다.
내 스킬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바탕으로 한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니까.
그나마 신성력은 러브 앤 피스로 대체할 수 있었다.
다만 마기는 그러지 못했고, 난 그것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
망령인 망구를 흡수하는 것으로 나란 존재의 성질 자체를 바꾸는 것.
스스로를 악마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구오오오!
내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걸까.
에렘바트가 고함을 지르며 파도를 일으켰다.
온갖 잡동사니와 죽은 몬스터의 사체를 끌고 떨어지는 파도는, 그 자체로 거대한 둔기나 다를 바 없었다.
정면에서는 거인이.
나머지 모든 각도에서는 해일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지는 한곳이었다.
펄럭.
날개를 움직였고.
회전했다.
-카가가가가각!
주먹을 내뻗은 거인의 팔에 검을 박아 넣은 채로 믹서기처럼 돌며 나아갔다.
[영혼 찢기(SSS) Lv.7]
[절삭(SSS) Lv.5]
[도축(S) Lv.MAX]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며 손목에서 팔뚝, 이어 이두를 지나 어깨까지.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고.
-푸화아아아악!
거인의 팔이 갈라지고 해체되어 떨어졌다.
마기는 신성력과 정반대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생명체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법.
거인의 본체가 수많은 몬스터로 이루어진 이상 피할 방법은 없었다.
나 또한 바탕은 사람인지라 부작용이 없지는 않다.
십여 미터로 늘어난 검날을 거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구오오오오!
거대한 해일이 그대로 덮쳐 오며 나를 밀어낸다.
정교한 컨트롤로 거인은 휩쓸리지 않게 하면서 나만을 공격했다.
버티기는커녕 그대로 바다 저편으로 쓸려 버릴 상황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런 흐름과 법칙 따위.
[혼돈이 규칙을 거부합니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마기는 혼돈과 가장 비슷한 힘.
그 말은 곧, 마기로 뒤덮인 지금이라면 이전보다도 원활하게 혼돈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있는 영역만큼은 다른 누구의 규칙도 받지 않는다.
에렘바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파도는 그저 세찬 물 덩어리에 불과했으니.
-서걱!
높게 쳐 든 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아주 두꺼운 가죽과 물컹거리는 무언가를 베는 감촉.
물방울에서 벗어난 에렘바트가 몸으로 검을 받았다.
거인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더욱. 손에 힘을 줬다.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며 검강이 더욱 커진다.
-뿌득. 뿌드드득.
-콰아아아악!
이윽고 거인에게조차 거대한 검이 에렘바트를 뜯고 거인을 내리쳤다.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세로로 쪼개진 거인이 양옆으로 떨어지며 잘게 부서진다.
에렘바트가 타격을 입으며 주변을 감싸던 안개가 걷히고.
거인을 이루고 있던 몬스터들이 죽은 사체를 버려 둔 채 게걸음을 하며 흩어졌다.
“쿨럭!”
그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땅에 처박혔다.
입과 코에서 핏물이 쏟아진다.
공격을 받은 게 아니다.
[잊혀지지 않는 창기사(SSS) Lv.10+를 해제합니다.]
나 또한 근본은 생명체.
마기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상태로 혼돈까지 사용해 댔으니 부작용이 오는 건 당연.
내장부터 뼈, 신경까지 벌레에게 갉아 먹히는 기분이다.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었으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엎어진 에렘바트가 보였다.
녀석의 눈은 흩어진 거인에게 향해 있었다.
아니. 거인이 아니지.
죽어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진실이다.
안개가 걷힌 현실은 담담했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에렘바트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적의는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게 악의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지.’
하다못해 나를 자신의 꿈속으로 불러들였을 때도.
짓궂을지언정 내게 호감을 꾸준히 보내 왔다.
아마 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털썩.
녀석 앞에 주저앉았다.
억지를 부려 녀석 앞까지 오기는 했는데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
“좀 시원하냐.”
“구오오오오.”
처음으로, 녀석이 육성으로 울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을 때조차 지켜만 봐야 했던 녀석.
이번에는 그녀와 함께 싸우고 막바지에는 직접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
한번 엿봤기 때문인가. 지금 놈이 어떤 기분인지 대충이나마 알 거 같았다.
헛된 꿈.
부질없는 꿈을 꾸던 고래는 이루지 못한 것을 꿈에서라도 이루고자 했다.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후회를 곱씹으며 망상을 이어 나갔다.
이미 늦었지만, 모습은 다르지만 현실에서 그걸 해 봤으니 이만하면 만족했을 거다.
“그에에.”
“고맙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는 사이 덕춘이가 돌아왔다.
한 손에 쥐고 있는 건 오각형의 목걸이.
녀석이 중앙섬으로 오던 이유는 항상 같았다.
“가져가라.”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녀석의 입에 목걸이를 물려 줬다.
한참을 그 상태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마치 녹듯이 바다에 스며들며 모습을 감추는 녀석.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심해에 빠져듭니다.]
[에렘바트는 영원한 추억을 기릴 것입니다.]
녀석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현실을 받아들인 이들이 그러하듯 추억을 기념하며 간직할 뿐.
-스으으으으으.
며칠이고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가시며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쬐는 햇빛이 달콤했다.
[97층 클리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클리어 알람.
그런 내게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과거의 시선 중 하나를 친구에게 공유합니다.]
알림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97층보다 더 높은.
그곳에서의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