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09화 (709/740)

709화 꿈에 그리던

구원.

그게 아니면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죽어 가는 와중, 생명을 살려 주었으니 은인이라 불리기 마땅했다.

그녀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거다.

특히나 그녀의 종족이 요정이라면 더더욱.

다른 몇 종족과 마찬가지로 요정족은 물에 빠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객체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날개가 젖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게 보통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녀는 호인이 맞았고.

‘좋은 사람이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에렘바트의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일까.

당시의 감정과 보여지는 세계는 너무나도 직관적이고 강렬했다.

나와 에렘바트의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였으나 자아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 정신 방벽이 워낙 튼튼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혼돈의 파편을 해치웠을 때 놈들의 과거를 보고는 했다.

일종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는데 놈의 기억을 보는 건 제법 특별한 일이었다.

“나 왔어. 으아아. 오전부터 일이 진짜 많았다?”

에렘바트를 살려 준 후, 그녀는 여러 차례 바다로 찾아왔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바다를 좋아하는 걸 수도 있고 일을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와서 하는 거라고는 푸념 어린 잡담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에렘바트 또한 얕은 바다까지 나와 그녀를 기다리길 반복했다.

위험한 일이었다.

영물은 어느 세계에서나 귀한 존재였고 탐내는 이들은 항상 있었으니.

충분한 힘을 가지기 전까지는 조심하는 게 맞았으며 아직은 강자라 불리기에는 연약했다.

그렇게 거리감 있지만 감정이 이어지는 나날이 몇 달이나 이어졌고 앞으로도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낙천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이제 곧 여기서 떠나야 돼. 나도 다음 주에는 뜰 거야.”

“구오오오.”

에렘바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슬픔. 배신감. 부정. 의문.

당시의 녀석은 어려서 알 수 없었겠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바다에서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큰불이 나기도 했다.

항구가 봉쇄되고 각자의 짐과 무기를 짊어진 이들이 떠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 세계 또한 멸망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리를 옮겨야 했다.

-철벅.

“야! 나오면 어떡해!”

이별이 확실시된 후 에렘바트가 한 선택은 간단했다.

충동적이지만 그만큼 직설적인 표현.

바다에서 뛰쳐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간혹 물에서 함께 헤엄칠 때는 눈높이가 맞았는데 땅에 올라서니 그녀가 훨씬 크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요정족 또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에렘바트 또한 작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두 주먹만 한 고래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랑 같이 갈래?”

날씨가 한창 더워지는 여름, 그녀가 함께 가자고 했다.

어디로 가자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았다.

덜 자라긴 했어도 영물은 영물.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었고, 멸망에 접어든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갈 수는 없으니까.”

-스아아아.

허공에서 생겨난 물이 에렘바트를 감싸고 두둥실 떠올랐다.

점차 높아지는 시야.

차갑지만 청량한 물속에 몸을 담근 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어때. 마음에 들어?”

“구오오오!”

가식이라고는 없는 에렘바트의 반응에 그녀 또한 싱긋 웃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오각형의 목걸이가 흔들렸다.

부드럽게 에렘바트가 들어간 물방울을 띄운 제니일이 풍선을 든 아이처럼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육지로 향하는 첫 여정이었다.

놀라웠다.

나야 늘 땅에 발붙이고 살았지만 에렘바트는 아니었으니까.

생소하면서도 신기한, 그런 경험이었다.

바다에 있었을 때보다 다채로운 색깔과 수많은 사람들.

삐죽 튀어나온 건물들과 노점상.

맛본 적 없는 다양한 음식은 자극적이었고 그만큼 뇌리에 남았다.

그랬었다.

“쉿. 조용히 있어야 돼.”

적어도 이 세상이 멸망으로 질주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평화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적이 너무 많았다.

요정 특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제니일이었으나 그녀 역시 탑을 오른 적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으니까.

등급이 높은 몬스터.

부랑자와 강도, 피난민들은 언제든 둘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었다.

그날 밤에도 그랬다.

어둠 속 야영을 하는 와중 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약탈자들이군.’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등불을 껐다?

지나가는 행인이었다면, 하룻밤 모닥불을 나누고 싶었던 거였다면 모습을 드러냈어야 한다.

모습을 숨기고 다가온다는 건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으며.

“이곳일 텐데.”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방심하지 말고 찾아.”

제니일은 미숙할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모닥불을 꺼트린 후 모습을 숨겼으니까.

그대로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았으련만.

“흡!”

수풀에 웅크리고 있던 그녀는 약탈자와 눈이 마주쳤고.

-푸욱.

첫 살인을 했다.

정신적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두 번째 살인을 이어 나가야 했다.

어깨에 칼을 맞아 엉엉 울었고 시체를 숨기기 위해 벌벌 떨면서 맨손으로 땅을 팠다.

그때의 충격과 분노가 여과 없이 전해졌으며.

-구오오오.

에렘바트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흐르고 수년이 지날 때까지.

초심자인 제니일이 노련함을 가지고, 미약했던 에렘바트가 영물로서의 힘을 부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탑의 초대는 받지 못했다.

인류의 영역은 좁아졌으며 몰려온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새우며 괴물들의 영역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나날이었다.

-빠바바바밤.

인류의 영역.

최전선을 가기 전에 들를 수 있는 마지막 도시.

그곳에 나팔이 울렸다.

영웅들의 귀환.

“여기 잘 보인다. 그치?”

안 그래도 많은 사람이 몰려든 광장.

인류의 수도로 향하는 대로가 활짝 열렸고, 햇빛을 받으며 일하던 이들은 모자를 벗으며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니일 또한 건물 옥상에 몰래 올라가 그들을 기다렸다.

몰래 훔친 빵을 조각내 에렘바트에게 물려 주는 그녀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밝았다.

영웅의 귀환.

탑을 오르고 괴물의 영역에 뛰어들어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출전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으나, 끝끝내 살아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영웅이었다.

“수도에 가면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는 성소가 있대.”

여전히 제니일은 탑의 부름을 받길 원한다.

“저기 봐. 털옷 입고 수염 난 아저씨가 폴 헴스트야. 도끼 진짜 크지? 저걸로 6성급 몬스터도 쓸어버릴걸?”

“구오오.”

자신도 할 수 있다며 허세를 부리는 에렘바트를 보며 깔깔거린 제니일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영웅들이 써 내려간 전설과 역사.

이름을 날린 이들의 무기와 성격, 스캔들에 가까운 소문들까지.

“내 고향에선 영웅들을 큰 사람이라고 불러. 대단한 사람들 보면 더 크게 느껴지는 거 알지?”

제니일의 중얼거림에 에렘바트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도 탑에 들어가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망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잖아.”

멸망의 과도기를 넘어 명백히 멸망에 가까워져 가는 세상에서는 생존마저도 자랑거리였다.

“탑은 100층까지 있대. 거기까지 오르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래. 아직 그런 사람은 없지만, 만약에.”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무언가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꼭대기까지 오른다면 그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 아닐까?”

뒷말은 더 없었다.

그럼에도 에렘바트는 그녀가 속으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탑을 오르지 못한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구차하고 비겁했으니.

웃음과 변명으로도 가릴 수 없는 깊은 구멍은 메꾸기 전까지는 외면해도 보이는 것이었다.

“구오오.”

“간지럽잖아! 야!”

에렘바트가 그녀의 품에 들어가 파닥거렸다.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제니일에게 말하고 싶었다.

언어를 구사할 만한 섬세한 근육과 혀가 없기에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작은 희망이자 가능성.

으레 희미한 빛이 금방 꺼지듯.

그런 일은 없었다.

-오오오오오!

재앙.

그것은 징조 없이 찾아왔으며 이겨 내기에는 너무나 기괴하고 강했다.

핏물로 잠긴 웅덩이에서 제니일의 목걸이를 입에 문 에렘바트는 울부짖었다.

울고 울어 물이 차오를 때까지.

새로운 재앙이 태어나 또 다른 재앙을 먹어 치울 때까지.

놀랍게도.

[축하합니다!]

[당신은 탑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탑은 그제야 부름을 줬다.

적선하듯 너무나 쉽게.

의도조차 불순하게.

자연 발생한 재앙을 탑에 묶어 두기 위해 탑은 에렘바트를 불렀다.

그렇게 탑을 오른 재앙은.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혼돈의 파편이 되어 눈앞에 서 있다.

놈의 기억이 만들어 낸 환상이 사라지며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마주 봤다.

얼핏 그때의 작은 형태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질적이게도 거대한 모습과 어릴 때의 모습이 동시에 보인다.

놈은 작은 입으로 조개껍데기와 쓰레기를 물어다 거리를 꾸미고 있었다.

조잡하게 만든 마을을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후우.”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빠르게 녀석이 겪은 모든 기억에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여전히 여운이 남아 있다.

역겨울 정도로 선명한 감정들이 뒤섞여 신물이 올라왔다.

혀에 힘을 줘 침을 삼켰다.

-저벅.

놈에게 다가갔다.

까맣고 투명한 동공이 나를 비춘다.

몽상경夢想鯨.

헛된 꿈을 꾸는 고래.

“에렘바트.”

-구오오오오.

낮게 우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눈에 힘을 주려 애쓰며 자세를 가다듬었고.

“정신 차려라.”

-빠아아악!

그대로 놈의 눈알을 걷어찼다.

-우오오오오!

듣던 중 가장 높은 음으로 울부짖는 녀석.

엄살 부리고 있어. 살살 쳤는데.

“꿈 깨!”

인벤토리에서 타락 천사의 검을 꺼내 휘둘렀다.

찌이이익!

경계가 찢어지며 놈의 심상 세계가 무너진다.

난 여기서 나간다.

그걸로 끝나느냐?

아니. 절대 안 그러지.

-쿠우우우웅!

-으아아아!

-죽여! 막아아아!

현실로 돌아가며 아득하게 들리는 비명과 고함이 선명해진다.

지독하게 비린 피 냄새와 비린내가 코를 꿰뚫고 전장의 열기에 피가 달아오른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들었다.

“덕춘아.”

“그에에.”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한차례 에렘바트를 노려보더니 빠져나간다.

그럼 덕춘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넌 나랑 대화 좀 하자.”

물론 몸의 대화다.

녀석이 말하지 못하는 건 덕분에 잘 알고 있으니까.

여성형 거인에게 남겼던 상처들은 이미 아물었다.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녀석.

그래. 못 나오겠지.

다른 거인들은 몰라도 저것만큼은 안개 밖으로 내보내기 싫을 테니까.

애써 만든 게 괴물 덩어리로 바뀌면 곤란하잖아?

그래서 친히 분해해 줄 생각이다.

“다 컸으니 충격요법 써도 되겠지, 뭐.”

저 덩치를 봐라.

어딜 봐도 새끼는 아니다.

다른 의미에서의 –새끼는 맞지만.

앞에 개가 붙을지 멍청한이 붙을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부르는 게 다를 거라.

자고로 펫의 주인이면 펫을 지켜야 하는 법.

그게 싫으면 펫이 주인을 지키든가.

못 해 봤던 거 해 봐라.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를 장착합니다!]

[마왕의 오른쪽 날개(SSS)를 장착합니다!]

[마그나로크의 왕관(SSS)을 장착합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에렘바트를 노려봅니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잠깐이지만 어울려 줄 테니.

당연하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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