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화 에렘바트
푸화아아아.
안개가 빠르게 폭발적으로 증발하며 거인과 에렘바트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의 말이 맞았다.
에렘바트는 여성형 거인이 들고 있는 풍선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저걸 풍선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거대한 물 구슬?
작은 방울들로 이어진 선 끝에는 물이 가득 찬 구체가 있었다.
오염된 바다와 달리 깨끗한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지만.
아주 멀리서 봤다면 여자아이가 물풍선에 물고기를 넣고 산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에 낭자한 피와 무너진 건물.
뒤집힌 땅 사이로 썩은 물이 올라오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다들 벗어나!”
중요한 건 지원군도 없는 상태에서 싸우면 막대한 피해를 본다는 거다.
안개가 증발한 덕에 시야가 트였다.
내가 길을 안내하지 않더라도 빠져나가는 건 문제없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빠르게 탈출시키는 게 정답이다.
“너도 가!”
“형님은요? 갈 거면 같이……!”
“말 좀 들어, 말 좀!”
“아악!”
여전히 거인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김정현의 엉덩이를 걷어찬 다음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에렘바트는 아직 이곳에 관심이 없다.
그저 멤버들이 방어선을 만들며 진격할 때 부서진 마을을 보고 있었지.
안전한 퇴로를 위해 가시거리에 있는 것들은 모두 없앤 상태였다.
-구오오오오!
다시금 에렘바트가 몸을 비튼다.
탈모맨이 주먹으로 유령 마을의 시계탑을 부수고 있다.
저걸 말려야 하는 건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반발감이 생겼다.
부숴도 되지. 내가 그걸 왜 걱정해.
머리를 붙잡고 앞으로 나섰다.
저 녀석 근처에 있다 보면 자꾸 나와 상관없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놈의 능력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혼돈의 파편의 조건을 일부 달성했기 때문에 생긴 변화인가.’
적어도 파히루를 잡을 때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찝찝한 부분은 있었으나 곧 정신 차렸다.
지금은 놈에게 집중하자.
안개 속에 숨어 있던 녀석이 직접 나타난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놈은 유적까지 진입할 거다.
[어스 월(S) Lv.MAX]
[프로즌 브레이크(SS) Lv,6]
-쿠드드드득.
-꽈드드득.
먼저 벽부터 세웠다.
놈과 눈이 마주쳤을 때 느껴지던 기괴함.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크게 의미 있는 시도는 아니었다.
안개를 가르고 십여 마리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쿵!
완전히 무장을 한 채 돌격하는 괴물들.
놈들을 막기에는 벽이 한없이 얇았다.
하늘로 치솟는 흙과 얼음 조각을 부수면 거인들이 진격한다.
안개 속에 숨은 놈들의 시뻘건 안광 수백 개가 번뜩인다.
뒤에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그 순간에도 내 시선은 에렘바트와 여성형 거인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만 저놈은 아니다.
‘나도 일순간 놈의 능력에 빠져든다.’
정신 보호를 최대치까지 찍었음에도 그렇다.
망할 혼돈이 스킬 일부를 깎아 먹었기에 가능한 현상.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과한 능력을 보이는 놈이다.
-구오오오오.
구슬프게 운 녀석이 나를 응시한다.
호기심과 원망. 측은하게 보는 시선에 미간을 좁혔다.
내가 저런 눈길을 받아야 하나?
“그에에.”
덕춘이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낮게 울었다.
-구구궁.
놈이 움직였다.
정확히는 녀석이 담긴 물 구슬을 쥐고 있는 거인이 앞으로 나섰다.
더욱 선명해지는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유적 안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더불어 다른 거인들과 달리 세심하게 다듬어진 얼굴.
말도 안 되는 크기와 정체를 몰랐다면 진짜 거인으로 착각할 정도의 정교함이다.
귀 끝이 뾰족한 게 요정? 아니면 엘프 종족인가.
-스으으으.
이내 거인이 들고 있던 팔을 앞으로 내민다.
느긋하게 펼치는 손가락.
그것이 가리키는 곳은 섬의 중앙이었다.
그녀에게 화답하듯 안개 속 마을의 주민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까드득.
-키드드득.
인간의 형상을 한 것들이 달려올수록 모습이 변화한다.
옅어지는 안개에 따라 얼굴이 흘러내리고 팔과 다리가 늘어나거나 없어진다.
이내 온전히 육지로 나왔을 때는.
“키햐아아악!”
“카르르륵!”
여러 덩어리로 뭉쳐진 몬스터들이 주둥이와 다리를 내뻗으며 괴성을 질렀다.
거인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수십 미터로 쌓인 괴물들이 울부짖으며 흉악한 몸뚱어리를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쏟아진다.’
그래. 그 표현이 맞는 거 같다.
땅을 빼곡하게 채우는 괴물들의 행진은 그 자체로 압도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이제는 사라진 손을 벌리며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생존자들도 무기를 빼 들었다.
“저, 저게 뭐야!”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무리하지 마! 신호탄이 보였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방어에만 집중해!”
사람의 허물을 벗은 놈들은 포악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고자 함인가.
작은 동작 하나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옆에 있는 동족이 터지든 뭉개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등반가를 잡아먹고 그 안으로 파고들려는 몸짓뿐.
“이제 연기는 그만둔 거냐?”
본색을 드러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넌 저쪽에 가면 안 돼.”
내가 아니면 저 녀석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을 거다.
뭐가 됐든 놈을 상대해야 하는 건 나였고.
-콰아앙!
해야 할 게 명확한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처음은 정면.
다른 거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수한 객체라는 건 잘 알겠다.
나를 짓밟으려는 거인의 발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그대로 몸을 비틀며 그은 혼돈검.
-지이이익.
피부를 긁고 간 검에는 핏방울조차 없었다.
일반적인 가죽을 베는 느낌이 아니다.
얇은 철판을 몇 겹으로 구겨 넣은 기분.
그래도 괜찮다.
“검이 안 들어가지는 않네.”
수차례 두드리다 보면 뚫린다는 뜻 아닌가.
콰아앙!
폭발을 일으켜 빠르게 거인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다.
다른 거인들과 달리 일순 평범해 보이는 복장.
전사보다는 여행가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만큼 방어력도 형편없었으면 좋겠는데.
-후우우우웅.
빠르게 나를 잡으러 들어오는 손을 밀쳐 내고 몸을 날렸다.
연속으로 터트린 파이어 밤에 가속도가 붙어 등 뒤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
사각지대로 들어온 만큼 나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건 불가능해야 했지만.
“그래.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상대하는 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역시나.
이쪽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내 쪽으로 머리카락이 뻗어 온다.
가닥가닥만 사람 몸통만 한 머리카락에 꿰뚫리면 온전치는 않으리라.
그래서 잡았다.
[달라붙기(S) Lv.MAX]
[천근추환(S)]
이전에 수염 달린 거인을 처리했을 때처럼 무게로 놈을 무릎 꿇리기 위해.
붙잡은 머리카락 너머, 조각난 날개의 흔적이 보였다.
거대한 몸이 휘청이며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건물들이 주저앉았다.
저걸 건물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개 속에서는 기이할지언정 멀쩡하게 서 있던 건물들은 죽은 산호초와 흙, 조개껍데기로 바뀌어 있다.
그동안 우리의 눈을 속인 거겠지.
안개는 녀석의 영역이었고 육지는 우리의 영역이니까.
-구오오오오오!
입을 열지도 않건만 에렘바트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뇌리로 때려 박는 듯한 음성.
동시에 파편적으로 들어오는 이미지.
어지러움이 느껴지며 손에 힘이 빠졌다.
그냥 떨어질 생각은 없다.
[일렉트릭 쇼크(SS) Lv.MAX]
-파지지지직!
거인이 쥐고 있는 물로 된 실.
그 위로 에렘바트가 담긴 거대한 물주머니.
동시에 감전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거인의 팔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크.
그대로 적중당하는 듯싶었으나.
-깜빡.
에렘바트의 눈이 감기고 다시 뜨였을 때 스파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뭔.
공격 무효화?
아니면 자신의 시야에 닿은 것을 없애기라도 하는 건가.
메커니즘은 모른다.
애초에 혼돈의 파편이란 것들은 죄다 그 모양이니까.
하지만.
“안 통하는 건 아니야.”
거인의 팔뚝을 타고 올라간 그슬린 자국은 여전하다.
저 능력도 무한정 쓰지는 못할 거고.
녀석이 안개를 거둔 것만 봐도 안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다.
안전하게 안개를 들이밀지 않고 전진하는 거지.
범람을 일으키는 것 역시 녀석에게는 부담일 테니까.
-쿠웅.
공격은 계속됐고 그때마다 거인과 내가 지나간 자리는 폐허만이 남았다.
본모습을 드러내 보잘것없어진 잡동사니가 흩어지고 깨지고 으스러진다.
-구오오오오오.
그때마다 에렘바트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으며.
파삭.
공들여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공원이 뒤집혔을 때, 다시금 에렘바트가 눈을 감았다.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굵은 눈물이 땅에 떨어지며 파문이 인다.
바닥에 차오르는 바닷물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건만.
-우웅.
물방울이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지며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는 낙하하는 눈물과 그것을 주시하는 눈뿐.
그것이 바닥에 닿는 순간.
-두근.
마치 심장을 울리듯 울렁이는 진동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몽상경夢想鯨의 회상원回想園에 진입합니다.]
공간이 무채색으로 바뀌는 것과 함께 몸과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
잠들기 직전, 심장이 내려앉으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
짧은 순간이지만 난 경악할 수 있었다.
몽상경의 회상원.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 녀석, 설마?’
몽상경이 에렘바트를 뜻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탑 안에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재앙 출신이었나!’
재앙. 그것뿐이었다.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
동시에 재앙, 몽상경.
그것을 끝으로 세상이 바뀌었다.
* * *
처음 느낀 것은 고통과 두려움.
차가우면서도 어두운 공간이었다.
물속.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 하염없이 가라앉고 있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으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난 에렘바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다.’
내가 봐 왔던 에렘바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다.
녀석의 기억에 깃들었기 때문일까.
지금 상태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껏해야 두 주먹을 나란히 붙인 크기.
그것만 보면 나름 귀엽게 볼 수 있었지만.
-부르르륵.
나를 중심으로 퍼지는 피를 보자니 그럴 수는 없었다.
꼬리조차 제대로 휘저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
지금의 나와 에렘바트를 생각한다면 견딜 만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렘바트는 작았고 약했으며 한없이 무력했으니까.
바다에서 살아갔으나 이제는 심해로 가라앉는 처지.
놀랍게도 에렘바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확한 이성과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기가 그가 특별한 존재임을 암시했으니.
‘영물이었던 건가.’
에렘바트가 사용한 능력.
그건 재앙의 힘이었고 재앙 중에는 영물 출신인 경우도 왕왕 있었다.
다만 지금은 기껏해야 새끼였고, 영물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명체에 불과했다.
영물이라 한들 모든 위협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빛마저 희미해져 보이지도 않고, 들리는 것 또한 없는 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사아아.
온기가 느껴졌다.
상처를 감싸는 빛무리.
덕분에 비친 존재의 얼굴은.
‘여성형 거인.’
에렘바트가 따르던 거인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