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07화 (707/740)

707화 전원 대피

에렘바트가 몰고 오는 안개.

그 속을 돌아다니는 괴상한 몬스터와 거인들은 강했다.

물론 지금은 없지만.

“다 때려 부수니 좋네.”

근방에 있는 마을이란 마을은 죄다 부쉈다.

그때마다 에렘바트의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리는 건 덤.

그곳에 있던 몬스터들 또한 전멸했으니 꽤 괜찮은 성과가 아닐까.

어차피 놔두면 섬으로 기어들어 올 놈들인데.

인근에 있는 것들은 정리됐으니 슬슬 빠져나갈 시간이다.

무작정 들어갔다가 고립될 위협도 있거니와.

‘여기는 오래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있거든.’

안개에 담긴 유독가스와 환각이 정심을 좀먹는다.

중앙섬에 안개가 몰려들면서 복통을 호소하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 또한 늘어났다.

“조금이라도 상태 안 좋은 거 같으면 말하고.”

“아직까지는 살 만해.”

“햇빛 보고 싶다앙.”

안개 속에 들어온 우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수시로 컨디션과 상태를 체크해야 하는 법.

다들 정신력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조금씩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일단 냥펀과 핥짝이는 괜찮은 거 같다.

“나도 스트레스받는 거 빼고는 괜찮아.”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나아질 거야. 하하!”

“너 때문이잖아!”

탈모맨이야 평소랑 똑같고.

마그마 요정도 울컥하기는 했지만 어디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다.

초코쪼코도 말수가 좀 줄기는 했지만 우울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다른 쪽에 있는 동료들이 걱정되는 걸 거다.

‘루키 그룹 사람들 쪽에도 피해가 있었으니까.’

김조균은 탑 밖으로 퇴출당했으며 화무선도 이번에 큰 부상을 입었다.

스마일캡은 노블 나이트랑 움직이는 중.

97층부터 함께한 박재경도 한 번 죽었다.

조만간 97층으로 다시 올라온다는 모양이던데.

버프가 담긴 전투 식량을 대량 만들어서 올 계획이라고 한다.

상대하는 적이 강해진 만큼 버프를 받을 수 있으면 받는 게 좋으니까.

“우리 쪽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저쪽이 문젠데.”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이 합류하며 이곳에 있던 놈들은 얼추 마무리했다.

에렘바트가 공개적으로 분개했으니 성과는 말하지 않아도 될 거고.

문제는 스마일캡 쪽은 어떠냐인데.

이곳도 예상보다 많은 거인이 나타난 만큼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게다가.

[에렘바트의 분노에 바다가 일어섭니다.]

[범람이 가속됩니다.]

놈을 자극한 결과 범람이 빨라졌다.

달리 말하면 녀석이 끌고 오는 안개 또한 거세졌다는 이야기.

“일단은 복귀하자.”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때 본진으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중간에 욕심을 부려 안개 속 마을을 죄다 뭉개 버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화풀이에 가까운 일이었다.

현재 상태로는 우리의 정확한 위치도 불명확하거니와 다른 이들의 상황을 알 수 없다.

“목표는 달성했으니 빠져나가자고.”

“다른 쪽에 문제가 생겼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좋은 생각이야. 벗어나자.”

다른 의견은 없었다.

며칠 동안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던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도 휴식이 필요하다.

-스으으으.

놈의 범람을 밀어낸 결과, 안개가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

에렘바트의 영역 일부를 없앴다는 증거.

고로 안개가 옅은 곳으로 향하다 보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파아앙.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앞에 선 건 나와 덕춘이.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이곳에서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혼돈이 대상의 능력 일부를 무시합니다.]

완전히 놈의 영역이라면 영향력 차이로 제대로 된 능력을 쓸 수 없지만 지금은 괜찮다.

이미 이곳은 우리가 차지했으니.

“그에에.”

“오케이. 오른쪽으로 꺾자.”

덕춘이야 태생부터가 혼돈을 품은 영물이기에 놈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다.

내가 길을 잘못 들 때마다 적절히 서포트해 준다.

서서히 옅어지는 해무를 빠져나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우웅.

“후우. 이제 좀 살 거 같네.”

“공기가 다르다니까.”

확연히 차이 나는 공기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바다 특유의 짠 내와 비린내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생각보다 깊숙이 안 들어갔던 건가.”

초코쪼코의 말대로 빠져나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마따나 얕게 들어간 걸 수도 있지만.

“해무가 뒤로 밀려난 걸 수도 있겠어.”

실제로 우리 주변의 안개는 걷혔으니까.

지금도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다.

바닷물이 빠졌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그것까지 확인하려면 지금보다도 깊숙하게 들어가야 해서.

“으음. 잘 안 보이네.”

탈모맨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변을 살핀다.

거리가 얼만데 육안으로 확인하는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저기, 중앙부인가? 저쪽에는 뭔가 일이 터진 거 같기는 한데.”

“그게 보여?”

“야야. 뻥 치지 마. 네가 맹금류야, 뭐야.”

“시력 10.0의 탈모맨!”

혹시나 싶어서 나도 봐 봤지만 절대 안 보인다.

이 녀석 시력이 몇인 거야.

초인이 되면서 눈도 같이 좋아졌나?

나도 그렇기는 한데, 이 거리에서는 좀.

집중해서 보긴 했지만 섬 가장자리부터 올라오는 안개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다.

안개가 조금 커진 것도 같고.

“어?”

잘못 본 게 아니다.

자세한 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본진이 있는 방향 쪽 안개가 커졌다.

“다들 올라와!”

[어스 월(S) Lv.MAX]

-쿠구구구궁.

일행들이 있는 곳에 흙벽을 세웠다.

폭은 좁더라도 가능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으아악! 야! 깜빡이 좀 켜고 써!”

“오오오! 하늘로 간다!”

“이, 이거 안전한 거 맞징?”

가파르게 솟아오르는 벽에 저마다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충분히 시야 확보가 이루어진 지금.

우리는 탈모맨이 말하던 게 뭐였는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지금의 상황도.

“하나 더 생겼어.”

오늘 생겨난 해무는 두 개.

우리가 갔던 2시 방향과 스마일캡과 노블 나이트가 간 10시 방향.

거기에 더불어.

“6시 쪽이잖아?”

우리가 있던 곳과는 멀리 떨어진 6시 방향.

악의적인 의도가 느껴진다.

양쪽으로 나뉜 타격대가 합류하기 쉽지 않도록 멀리 떨어진 곳을 노린 걸 거다.

저게 발생한 시기도 그렇고.

“마을 부수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본데.”

“엄청 싫어하긴 하더라. 며칠 전에 이동하느라 직선으로 다 부수고 갔을 때도 그랬어.”

“으으으! 그때 진짜 무서웠어. 에렘바트가 막 소리 지르고 여자 거인도 날뛰고.”

우리랑 합류하기 전에도 전적이 있었는지,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이 이런저런 썰을 푼다.

덕분에 확실해진 것.

에렘바트는 안개 속 마을이 파괴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비교적 내게 호의적이었던 녀석이 반응한 것만 봐도 그렇지.

마그마 요정이 말한 여자 거인은.

“혹시 팔 들고 있는 거인 말하는 건가?”

“어, 맞아. 그런데 팔 들고 있는 거 아니야.”

“풍선? 그런 거 들고 있는 거야. 에렘바트는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살짝 눈을 찌푸렸다.

풍선에 들어가 있는 에렘바트?

매치가 안 된다.

그 거대한 녀석이 어떻게 그렇게 다녀.

나도 그 거인을 보기는 했다.

그 위쪽에서 돌아다니는 놈도 봤고.

그렇긴 하지만 그냥 원근법 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난 에렘바트를 직접 봤단 말이야.’

코앞에서 놈을 마주한 건 여기서 내가 유일하다.

스마일캡도 녀석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만큼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경우가 드문 녀석이었고.

‘진짜 말도 안 되게 컸는데.’

눈알 하나만으로도 정면을 모두 가릴 정도였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환각일 수 있다.

훨씬 크게 보이게 모습을 조절했다든가.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스마일캡 쪽은 여전히 싸우고 있고, 본진 쪽에서도 새로 나타난 해무로 병력을 보내고 있다는 것.’

중앙에 예비대를 놔둔 건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타격받았을 테니까.

찌리리 요정이 있지만 홀로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선택해야 한다.

어디를 지원할 것인지.

“본진 쪽을 돕자.”

핥짝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쪽은 어떻게든 될 거야. 반면 본진 쪽은 거인과 에렘바트와의 싸움 경험이 너무 적어.”

몇 차례 우리를 도와 싸우기는 했지만 전면전을 펼친 적은 한 손에 꼽는다.

절대적인 경험치가 다르다는 말이었고.

“에렘바트가 만든 변수야. 안에 어떤 괴물이 있을지 몰라.”

예상 밖의 상황인 만큼, 기존과는 다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스마일캡과 노블 나이트면 알아서 잘 버틸 거라는 믿음도 깔려 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의견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초코쪼코도 동의했으니 괜찮겠지.

쉬는 건 더 있다가 하는 게 좋을 거다.

결정이 끝났으니.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악!

움직일 차례다.

저 멀리, 무지개다리가 뻗어 나갔다.

* * *

탑에 오르고 힘이 생긴 후 희열을 느낄 때가 있었다.

몬스터를 쓸어버렸을 때.

그건 어찌 보면 보복 심리이자 과거의 기억을 덮어씌우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탑의 부름을 받은 이들 모두 대격변을 온몸으로 겪었다.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상식을 벗어난 괴물들을 맞이해야 했던 이들.

문명을 벗어난 괴물들이 포식자와 피식자의 위치를 강제했으며 그 여파는 치욕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나와 남의 밑바닥까지 보며 살아남고 지성이 아닌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그 대상은 몬스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고작해야 1, 2성 등급 몬스터에 의해 학살이 벌어지는 것.

그때의 공포와 무력감을 지우고 싶었기에 더욱 몬스터를 잡아 죽인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피해!”

“으아아아악!”

-푸욱.

-촤아아아악!

그때의 광경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뒤로! 정면은 내가 막는다!”

“부상자는 뒤로 빠져!”

“아직 숨 붙어 있다!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이들 누구도 그때처럼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거인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가고 깨지면서도 어떻게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꾀한다.

각자의 힘을 믿고 부딪치는 이들.

“우오오오! 여긴 섹시한 내가 맡는다!”

[SS급 권능, 공평한 개싸움의 신이 발휘됩니다!]

[너도나도 무장해제(SSS) Lv.10]

[무능력자의 해피 존(SSS) Lv.10]

훌렁, 옷을 벗어 던진 김정현이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우우웅!

몸통 박치기와 함께 기울어지는 거인.

물리적으로 말도 안 되지만 김정현에게는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

“물렁살 녀석아! 넌 눈곱만큼도 멋지지 않구나!”

김정현과 거인의 스펙은 동일하니까.

거대한 손이 김정현을 내려쳤지만 녀석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엎어진 채 손바닥으로 등짝을 친 거나 마찬가지니까.

“오오오! 섹시가이!”

“미쳤다! 멋지다! 섹시하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가벼워진다.

물론 그것이 의도된 거라는 건 안다.

심각한 상황 속, 분위기까지 처지면 더 힘드니까.

그렇기에 더 악을 쓰고 과장하며 움직이는 거다.

그건 그거고.

“조커 카드가 여기 있었군.”

김정현의 능력이 여기서도 발휘될 줄은 몰랐다.

현재 예비대를 공격하고 있는 거인은 도합 10마리.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다.

당장 이곳까지 뚫고 오는 동안에 쓰러트린 놈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에렘바트가 작정하고 기습을 가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쪽으로 지원을 오길 잘했다.

이미 다른 일행들이 방어진을 구축하며 오고 있다.

나야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온 거고.

“조심해! 한 놈 더 붙었다!”

김정현이 개싸움을 벌이는 와중, 다른 거인이 주먹을 힘껏 내려쳤다.

이미 예비대는 타격을 받은 상황.

녀석을 도울 여유 따위는 없었으나.

-구구구구궁.

“어?”

“혀, 형님? 형니이이임!”

나는 아니다.

놈의 주먹을 흘려 내며 땅에 박아 버렸다.

그러고 만근추환.

무게를 더해 눌렀으니.

-드득. 드드드득.

놈은 주먹을 빼내지 못했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다.

주변에서 환호하고 있었으나 상황 자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가장 약한 전선을 강하게 찌르고 들어왔으니 피해가 적지 않다.

애초에 예비대라고 해 봤자 인원은 6명뿐.

전투 가능한 인원은 고작해야 3명이었고 2명은 치명상, 1명은 죽었다.

고작해야 이들이 안개에 들어가고 3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기는 나와 김정현이…….”

“에이, 형님. 김정현이라뇨, 정 없게. 편하게 섹시가이 동생이라 불러 주십쇼!”

“…나와 섹시가이가 버티고 있을 테니 나머지는 부상자 챙겨서 빠져! 뒤에 오는 인원과 합류해!”

이쪽으로 진입하기 직전, 스마일캡이 쏘아 올린 신호탄을 확인했다.

복귀한다는 신호.

아마 그쪽에 있던 놈들까지 이쪽으로 보내 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스마일캡과 노블 나이트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답.

여긴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사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인을 내려치고 있던 김정현과 부상자를 챙기고 있던 이들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한곳을 바라봤다.

-쿠웅. 쿵.

안개 너머에 있음에도 가릴 수 없는 거대한 몸.

그 위를 떠돌아다니는 고래의 형상.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에렘바트를 노려봅니다.]

순간적으로 하얘진 머리.

허공을 부유하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녀석의 시선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찰방.

녀석이 쏟아 낸 눈물이 쌓이고 쌓여 바닥을 적시고 있다는 걸.

놈의 외침에 따라 쓸려 나왔다 돌아가는 물길이 파도가 되어 덮쳐 왔다.

동시에 요동치는 불길함.

혼돈의 영향인가, 어째서인지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무엇 하나 뚜렷하지 않은 느낌에 불과했지만 행동은 빨랐다.

“전원 대피!”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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