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05화 (705/740)

705화 불의 거인?

중앙섬에 있던 유적.

그곳은 아틀란티스 출신의 영웅들을 기리는 장소였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에렘바트가 부리는 거인이 그 형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강하다.’

이제 막 한 미리 해치웠을 뿐이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파이어 밤도 버티고 팔 하나를 날리는 데 되갚기를 사용했다.

그나마 얇은 목은 검강과 영혼 찢기로 어떻게 잘라 내기는 했다만.

“한 마리 잡는 데 투자하는 비용이 너무 비싼데.”

이런 놈들이 몇 마리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3마리가 더 있다.

유적지에 영웅 조각상이 몇 개 있었더라.

‘못해도 열댓 개는 넘어갔단 말이지.’

신경 써서 보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스무 개에 가까웠다는 건 안다.

그것도 비교적 보존이 잘된 것들만 따졌을 때.

반파되거나 흔적만 남은 것까지 합치면 더 많겠지.

이것만 해도 곤란하건만.

“몸이 무거워.”

안개 속에 진입한 이후로 지금처럼 몸이 무거웠던 적이 없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팔다리를 움직이는데도 보이지 않는 뭔가가 저항하는 기분이다.

스마일캡이 경고하던 게 이거였나.

‘물 밖에 있는데도 물속에 있는 것 같다는 건 에렘바트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

그곳에 들어섰다면 지체하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까지 분명히 기억난다.

분명 멀지 않은 어딘가에 녀석이 있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부상자 둘에 상대할 괴물이 셋. 거기에 에렘바트.’

지원 올 사람들이 더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가 화무선이 쏘아 올린 신호탄을 본 것도 우연에 가까웠으니.

세계를 잠식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는 안개는 짙었고 그곳에 보이는 것과 듣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파앗.

판단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쓰러진 송곳 요정과 화무선을 챙겼다.

일단은 도주한다.

싸우려면 못 싸울 것도 없지만, 둘을 지키면서 전투를 벌이는 건 무리다.

“그에에.”

송곳 요정의 상태가 안 좋다.

특히 오른손이 심각하다.

거인의 손아귀에 잡혔을 때 뼈라도 으스러진 걸까.

기절했음에도 한 손으로 안자 나직한 신음을 내뱉는다.

늑골이 나간 거라면 장기가 찔리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끄으으으.”

“화무선, 정신이 들어?”

“이블아이, 와 주어 고맙소.”

“그런 건 됐어. 꽉 잡고 있어. 여기서 벗어날 테니까.”

끄덕.

화무선이 동의한다.

“바람이 길을 알려 줄 것이오.”

-후웅.

화무선이 부채를 휘두르자 한 줄기 바람이 쏘아져 나간다.

산들바람에 불과했지만 안개를 뚫고 우직하게 길을 나아간다.

휩싸인 안개에 방향 감각이 온전치 않았는데, 덕분에 살았다.

“지체하지 마시오. 그것이 곧 돌아올 거요.”

“그것? 에렘바트?”

“에렘바트라. 괴이함으로는 지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소.”

놈 말고 더 있다?

적어도 에이션트 몬스터는 아니다.

그놈들은 이미 다 잡았으니까.

설마 다른 혼돈의 파편이 있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쪽이 본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 에렘바트를 들고 다녔, 쿨럭!”

“말은 나중에 하자고,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까.”

“부탁하오.”

그것을 끝으로 화무선은 의식을 잃었다.

중앙섬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간다 한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가 있던 곳도 중앙섬 인근이었을뿐더러.

‘둘 말고도 당한 사람들이 있을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피해가 발생했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안개에 진입했던 이들.

그들도 무사히 탈출했다면 다행이지만 그건 너무 희망찬 이야기였다.

-구오오오오.

뱃고동 소리를 닮은 울음소리에 발길을 재촉했다.

에렘바트.

놈의 소리였으니까.

흘낏 뒤돌아본 안개 너머, 거대한 형상이 허공을 부유했고.

‘거인?’

그 아래, 한 팔을 들고 있는 거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길게 흩날리는 건 머리카락인가.

방금까지 싸웠던 거인보다 족히 머리 두 개는 크다.

저게 화무선이 말했던 거인일 거다.

그곳을 한번 노려보고 시선을 돌렸다.

-파하아아.

방향이 제대로였는지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사라진다.

가슴까지 젖은 옷이 무겁게 달라붙는다.

역시나 물속에 있던 건가.

쯧. 혀를 차고 다리에 힘을 줬다.

이내 안개도 서서히 걷혔으니.

-피유우우웅.

난 바로 신호탄 먼저 발사했다.

색깔은 붉은색.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어 후퇴한다는 표시.

내게 화답이라도 하는 걸까.

수평으로 이어진 안개 끝.

“…주황색.”

전멸을 알리는 신호탄의 연기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 * *

중앙섬.

방어선이 무색해진 지금 생존자들은 모두 한곳에 모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심각해.”

스마일캡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렘바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놈의 안개는 몇 차례 더 찾아왔다.

고작해야 며칠 동안 당한 이들이 몇 명이던가.

97층으로 올라온 인원이 삼십여 명.

추가로 96층에서 올라온 이들까지 합치면 40명가량 되는 인원이 있었다.

범람이 일어나고 14일 차.

생존자는 21명이었다.

온갖 일이 있는 것치고 절반이면 괜찮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당장 스마일캡도 이곳에서 절반은 죽을 거라고 했었고.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죽어서 다시 올라온 사람이 9명.’

그들을 합친 숫자라는 거다.

즉, 이번 시련에서 근 3분의 2가 죽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위협은 여전히 건재하다.

“으으음.”

“좀 더 누워 있어. 어차피 때 되면 싸워야 하니까.”

몸을 일으키려는 화무선을 초코쪼코가 다시 눕힌다.

집중적인 치료 덕에 상처는 나았지만 완치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화무선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손가락 감각이 이상한데.”

“엘릭서를 썼으니 곧 돌아올 거야.”

찌리리 요정이 송곳 요정의 손을 감쌌다.

치명상을 입은 송곳 요정은 팔 한쪽이 너덜너덜해졌었다.

단순한 포션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부상.

엘릭서와 덕춘이 덕에 뼈마디는 다 나았다.

신경 손상은 아직이지만.

정밀한 기술을 쓰는 송곳 요정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거지 같은 건 이외에도 나쁜 소식이 많다는 거겠지만.

“지금까지도 복귀하지 못했다는 건 당했다고 봐야 돼.”

“좀 더 기다릴 수 있지 않나요.”

“아닝. 나도 안개 속에 있었잖앙.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너무 낮앙.”

찌리리 요정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핥짝이와 냥펀의 말이 맞다.

중앙섬에 물이 차오른 지 며칠이 지났다.

지금까지 자력으로 탈출하지 못했다면 당했다고 봐야 한다.

운 좋게 안개 속에서 도망치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쯤 물에 가라앉았을 거야.’

저곳에서는 물속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으니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다들 알고 있을 거다.

생존자는 이만큼이 전부인 것을.

“근육 요정, 마그마 요정…….”

“낙담하지 마시오. 비록 죽었을지언정 정녕 간 것은 아니니.”

“희생된 동료가 있는 건 다른 곳도 마찬가지야.”

요정 클럽의 근육 요정과 마그마 요정, 루키 그룹의 김조균.

나와도 인연이 있는 박재경과 수많은 연합 인원.

거기에.

“탈모맨 녀석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건데. 머리털은 없어도 방향감각은 있어야지.”

탈모맨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속이 뒤엉키는 건 나와 멤버들도 마찬가지라는 뜻.

혹시나 싶어 커뮤니티 창을 켜 두었지만 탈모맨의 채팅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신경 쓰인다.

‘탈모맨 코인이 남아 있던가?’

모르겠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코인 개수는 공유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거니와.

‘코인이 남지 않은 자에게 숭배자들이 접근하기도 하니까.’

간절한 사람일수록 꼬드기기 쉬운 법.

실제로 그런 사례가 발견되었고 연합에서도 코인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뭐, 나랑 멤버들은 평소 드립 치면서 노는 게 대부분이라 말할 기회가 없던 거지만.

“탈모맨 죽었을깡? 커뮤니티 중독자가 잠잠한뎅.”

“혹시 모르지. 그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살아 있을지.”

진짜로.

다른 건 몰라도 몸 튼튼하고 생존하는 능력은 탈모맨이 탑급이다.

경험치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다들 일어나세요. 또 옵니다.”

잠시간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오필리아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를 보호하듯 노블 나이트가 진형을 짠다.

다른 이들보다 앞장서는 모습이 제법 든든하다.

안개 속에서 비교적 피해가 적은 곳이 노블 나이트였으니까.

기본적으로 집단으로 움직인 덕분.

당한 이들 대부분은 개인 혹은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였다.

당장 회복 중인 화무선과 송곳 요정도 그 케이스고.

“이번에는 양쪽에서 오는군.”

스마일캡 역시 입가를 비틀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다.

2시와 10시 방향에서 해무가 몰려오고 있다.

10시 쪽에서 오는 안개가 훨씬 큰 것을 보니 저쪽에 힘이 쏠린 거 같은데.

“요정 클럽은 중앙에서 환자를 지켜 줘. 오필리아랑 내가 10시를 맡지.”

“초코쪼코는?”

“난 너희랑 갈게. 그쪽이 인원수가 맞을 거야.”

스마일캡이 오필리아와 함께 간다면 10시 쪽은 괜찮을 거다.

나와 핥짝이, 냥펀, 초코쪼코가 팀을 이룬다.

수가 적기는 하지만 작은 안개니 어떻게든 되겠지.

나머지 요정 클럽을 제외한 인원은.

“추가 발생하는 안개는 부탁할게.”

“물론이지요, 이블아이!”

“쁘띠!”

“사랑!”

“평화!”

연합 사람들을 위시한 인원들이 담당할 거다.

일종의 예비대인 셈.

“아니, 암만 그래도 너무 인원이 적잖아요, 형님!”

“그러다 당하면 끝입니다.”

“앗. 형님! 아이 씨!”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달렸다.

걱정은 고맙지만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할 때.

-후우우웅.

통신 아티팩트를 귀에 꽂으며 안개 안으로 진입했다.

허허벌판일 곳에 생성된 건축물들.

그 안으로 돌아다니는 인간으로 둔갑한 괴물.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처리하고 싶었으나.

“얘네한테 신경 꺼!”

“비린내 시러엉!”

무시하고 지나쳤다.

마을에 사는 것처럼 활동하는 놈들이다.

일정 영역을 벗어나면 쫓아오지 않는다.

몇 번에 걸친 경험에서 알아낸 정보.

“곧 있으면 심층이야. 긴장해.”

“물론이지!”

초코쪼코가 전투 망치를 들어 올린다.

대형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거인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터.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안개 깊숙이, 에렘바트의 영역에 들어서자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체를 움직이는 이들.

그 아래 이어진 도로와 마을에는 안개의 주민들이 있었으니.

“어째 더 늘어난 거 같군.”

“중앙섬에 들어왔다 이거지. 완전 영웅 행세잖아.”

하나같이 무릎을 꿇은 채 거인을 숭배하고 있었다.

양팔을 벌린 채 절을 하는 꼴이라니.

에렘바트가 중앙섬으로 진입하고부터 벌어진 풍경이다.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는 모습이었지만 글쎄.

괴물들이 저러고 있으니 괴상할 뿐이다.

-척.

핥짝이가 수신호를 보낸다.

등장한 거인은 둘.

합만 맞춘다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

나와 초코쪼코가 왼쪽으로, 핥짝이와 냥펀이 오른쪽을 맡는다.

기다랗게 자란 수염을 단 노인 형상의 거인.

-콰아아앙!

놈에게 달려가 발목에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뒤이어 초코쪼코가 전투 망치를 휘둘렀고.

-쿠구구궁.

발목이 아작 난 녀석이 남은 발을 세게 밟으며 균형을 잡는다.

잠깐이다.

이런 식으로 놈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건.

건재한 양팔이 우리를 잡기 위해 다가왔으나 이미 예상한바.

“목뼈를 노려!”

“조금만 버티고 있어!”

달라붙기로 잽싸게 놈의 몸을 타오르며 점프했다.

목적지는 놈의 수염.

“위생적으로 살자, 자식아.”

[만근추환(S)]

-쿠구구구궁!

수염에 매달린 채 중량을 한껏 늘렸다.

급격히 늘어난 무게에 놈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놈이 엎어지지 않기 위해 양팔로 땅을 받치는 그 순간.

“흐아압!”

[대지 강타(SSS) Lv.8]

-콰드드드드득!

초코쪼코의 망치가 놈의 목뼈를 으스러트렸다.

목이 기형적으로 꺾이며 고꾸라지는 녀석.

“잘하는데.”

“내가 요정 클럽의 근딜이거든.”

깔끔한 합이었다.

전투를 거듭하며 거인을 상대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그때부터는 난장판이지만.

“저쪽도 끝났네.”

지원할 틈도 없이 핥짝이와 냥펀도 전투를 마쳤다.

여기저기 우그러진 거인의 몸에서는 검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 여기까지만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이 빠르게 다가왔다.

안개를 가르며 달려오는 그것.

“네 마리?”

“뭔데 네 마리나 나오냐고!”

전사의 모습을 한 거인 넷이 굉장한 기세를 내뿜는다.

안개 규모도 작았는데 어째서?

아니, 그보다 왜 뛰어오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전투 중이 아니라면 놈들이 뛰는 걸 본 적이 없다.

중앙섬이라서 변수가 생긴 걸까.

아니면 우리가 전투하는 것을 보고 어그로가 끌렸다든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대응은 빨랐다.

“정면에 있는 놈 먼저 잡는다!”

절대적인 머릿수부터 줄여야 한다.

앞으로 나섰다.

저 육중한 놈들을 저지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먼저 무지개다리로 몸통을 밀어 버리면…….

“우랴아아아!”

오감을 집중하며 스킬을 사용할 타이밍을 노리는 그 타이밍.

괴성과 같은 함성이 들렸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에 전투 중이란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렸고.

-콰아아아아앙!

한순간 안개가 붉어지더니 불타오르는 거인이 정면으로 달려오던 거인의 머리통을 갈겼다.

시뻘겋게 물든 암석과 혈류처럼 흘러내리는 마그마.

고온의 열기에 증기를 뿜어내는 거인의 형상, 그 위에는.

“으하하하! 맛이 어떠냐!”

“미친놈아! 미친놈아아!”

호탕하게 웃는 탈모맨과 녀석의 등을 마구 때리는 마그마 요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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