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3화 안개 속 주민
에렘바트는 봉인되어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유적의 효과로 봉인된 게 아니다.
권능을 사용해도 유적지에 무언가를 봉인하고 있다는 설명은 없었다.
그뿐일까.
“네가 한 일들 전부 놈을 자극하는 거였지, 직접적으로 봉인을 약화한 게 아니야.”
놈이 싫어하거나 반응을 보이는 것들을 사용했을 뿐이지.
스마일캡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녀석도 나름대로 추론한 결과가 그것일 테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말하는 것도 내가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 힘을 봉인하고 있을지도 몰라. 일종의 절전 모드인 거지.”
그러다가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활동하는 거다.
적어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가능성이 있군. 항상 이곳으로 향하길래 여기에 뭔가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어.”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유적지가 놈을 봉인하고 있는 거였다면 봉인을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미련이 남아 스마일캡이 들고 있는 목걸이를 살폈다.
여전히 특별한 건 없다.
제니일이라는 요정이 착용했다는 게 전부다.
오각형으로 생긴 게 특이하긴 하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는 거 같고.
작게 숨을 내뱉으며 주제를 돌렸다.
“범람은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되는 거지?”
이 부분에 집중해 보자.
만약 놈이 알아서 날뛰는 거라면 물러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중앙섬을 가라앉히고 유적지를 부수든 차지하든 할 테니까.
“며칠 전이었다면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처음에는 시간제한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물러서야 하는 구조로 생각했다는 거다.
일종의 타임 어택.
보통 일주일 정도면 끝이 난다고 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은 그 규칙이 깨졌다.
“이미 일반적인 기간은 지났어.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른다는 거지.”
잠시 생각에 빠진 스마일캡이 입을 열었다.
“범람이 끝날 때쯤 녀석의 힘이 약해졌어. 범람을 일으키는 데 사용하는 힘이 크다는 거지. 그걸 영원히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고.”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네.”
한마디로 범람이 끝나는 이유는 녀석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
가능성 있는 말이다.
혼돈의 파편이라고 무적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힘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프램버그에 있던 델버튼도 그러지 않았던가.
녀석이 사용하는 역병의 안개도 텀이 있었다.
그 능력의 정도와 범위에 따라 소모되는 힘도 클 터.
섬을 집어삼키는 범람은 말할 것도 없이 막대한 힘을 필요로 할 거다.
놈들이 사용하는 힘이야 말할 것도 없이 혼돈일 것이고.
“평소보다 놈이 강하게 나오는 건 힘을 많이 모았기 때문이겠지.”
“등반가가 많이 올라온 게 원인일 것이오. 한 떨기 꽃과 같이 주변을 향기롭게 만들면 좋을 것을, 혼돈은 악영향만 주변에 뿌리니. 통탄스러울 따름이오.”
화무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역시나 내가 원인이 맞는 거 같다.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일정 수준을 지나면 혼돈은 제멋대로 덩치를 불린다.
아마 주변에 퍼져 있는 혼돈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데.
에렘바트도 그런 식으로 힘을 모았다고 보면 될 거다.
현 상황을 봤을 때.
“이번에는 중앙섬을 차지할 때까지 힘이 빠지지 않을 거 같군.”
“맞아. 그럴 가능성이 커.”
놈이 힘이 빠져 물러날 일은 없다.
그러니 별수 있나.
“힘이 안 빠지면 빠지게 만들어 줘야지.”
그게 뭐든 칼 몇 번 찔리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니까.
놈을 잡는다.
기존 공략을 사용할 수 없다면 정공법으로 가는 수밖에.
“그게 가장 깔끔하지. 쓱싹! 원인 제거!”
“차라리 잘됐어요.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때 처리하는 게 나아요.”
“이거 약간 초 치는 거 같기는 한데, 우리 세계에도 저런 놈들 나타날 거잖아? 미리 겪어 보는 게 좋지.”
마그마 요정의 말도 맞다.
에렘바트와 같은 규격 외 괴물들을 상대해 본 경험은 반드시 도움이 될 테니까.
이준석이 짠 시뮬레이션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바깥 세상에 혼돈의 파편이 등장하는 시기는 결코 멀지 않다.
“먼저 방어선을 변경하는 게 좋겠어. 탐색과 감지, 연락에 집중하는 걸로.”
“환경은 놈이 유리해. 바다로 빠져나가면 쫓을 수단이 마땅치 않거든.”
“우리가 유리한 곳으로 유도해야 해요. 섬과 섬을 이어 버리죠?”
“바다 자체를 얼려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육지로 올라오면 더 좋고.”
저마다 놈을 잡을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목표가 정해진 만큼 의욕적인 건 좋았다만.
‘여전히 의문이란 말이지.’
왜 놈은 중앙섬으로 오는 걸까.
대체 무엇…….
-쿠르르르릉.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땅이 흔들렸다.
지진?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세를 낮춘 이들이 주변을 살핀다.
“뭐, 뭐야?”
“저기! 신호탄이다!”
외침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방어선으로 나갔을 사람들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보였다.
주황색.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방어선이 뚫렸다.
달리 말하면.
‘해당 지역을 맡은 이들이 전멸했다.’
-피유우우우웅.
-스아아아.
그곳뿐만이 아니다.
다른 방향에서 붉은 신호탄이 올라왔다.
방어선 유지가 불가능해 후퇴한다는 신호.
이거.
“놈도 성격 급하네, 벌써 찾아오는 거 보니까.”
“우리야 좋지, 안 찾아다녀도 되고.”
아무래도 에렘바트도 얌전한 성격은 아닌 거 같다.
한동안 잠잠했던 바다가 출렁인다.
흐릿한 빛이라도 볼 수 있던 하늘이 다시 검게 변하고.
-후우우웅.
묵직하게 가라앉은 안개가 파도를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 * *
습하고 더운 공간, 잘박한 물이 가득한 공간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짧게나마 평온했던 게 거짓이라도 되는지 놈은 더 악독하게 나왔다.
물 밑으로 파고든 인어에게 물어뜯긴 이들의 흔적이 사방에 남았다.
시체는 없었다.
등반가는 시체를 남길 수 없으니까.
그저 그들이 입었을 부서진 장비와 흥건한 피.
바닷물이 계속해서 들어오는데도 붉게 물든 길거리가 음산하게 빛났다.
안개 속 마을.
난 이미 저 풍경을 본 적 있다.
에렘바트가 머문 곳에는 심해의 주민들이 살아가니까.
저게 헛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을 쩍 벌리며 웃는 실루엣.
놈의 목소리가 방향을 무시하고 들려왔다.
아주 가깝기도 하고 너무나 멀게도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하나 분명한 게 있다면.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건가.”
그동안 보여 줬던 것들은 그저 맛보기였다는 듯 강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은 이후 한동안은 여유가 있었는데.
놈은 그 시간 동안 힘을 모으고 있던 걸까.
-카드득.
혼돈검을 비틀었다.
사람 대신 건물 안을 차지한 괴물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유리창 너머 흉측한 얼굴을 들이민 채 뜨거운 숨을 내뱉는다.
덩치에도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놈들.
찢어지고 피로 물든 외투를 걸치고 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넘긴 채 날 훔쳐보고 있다.
마치 정체불명의 괴물을 지켜보듯 호기심과 경계심을 담아서.
“너희가 그러면 안 되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라처럼 마르고 단단한 피부.
살점이 끼어 있는 송곳니.
물기 있는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인다.
-콰아아아앙!
놈들을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유리창이 터지고 기둥이 무너진다.
“키에에에엑!”
“끼익!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망가는 녀석들.
내려앉은 지붕에 깔린 놈이 바둥거린다.
당연하게도 놈을 돕는 괴물은 없었다.
우스꽝스럽게 기다란 팔을 휘적이며 내게서 멀어질 뿐.
사람을 흉내 내고 옷가지를 둘러도 놈들은 괴물이다.
눈앞에 먹이가 있으면 먹고 맞으면 도망치는 불쾌하고 끔찍한 족속들.
“그래. 이런 게 너희한테 어울리지.”
그저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괴물이다.
가지고 있는 지능마저도 뭔가를 잡아먹기 위해서 쓰는 놈들.
“키릭. 키릭.”
“키드득.”
담벼락과 건물 틈 사이로 들어간 놈들이 얼굴을 반만 내밀며 나를 훔쳐본다.
무언가를 보고 답습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 있는 놈들이 특이한 것일까.
“하.”
작게 코웃음 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놈들에게서 풍기는 비린내가 훅 들어온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비리고 지독한 냄새.
이것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중앙섬에 있던 이들 중에는 냄새 때문에 쇼크가 온 사람도 있다던가.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공간이다.
-끼드드득.
안개가 퍼진 마을이 비틀어진다.
빛의 굴절.
분명 내가 아는 곳일 텐데, 꺾이고 늘어난 형상들은 낯설게만 보인다.
노란빛을 띠는 등불이 집마다 켜진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마을 창문으로 보이는 무언가.
저것들은 환상일까, 아니면 내가 죽인 놈들과 같은 괴물일까.
꾸욱.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안개가 집어삼킨 공간, 창문 너머로 춤을 추는 이들이 보였고.
-고오오오오오.
울렁이고 음울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하늘을 부유하는 망할 고래가 보였다.
저게 뭔지 안다.
이미 만나 본 녀석이니까.
“에렘바트.”
깜찍한 인사를 받아 줄 생각은 없다.
놈이 히죽거리며 지나간 곳에는 참사가 벌어지니까.
전방을 맡았던 이들이 쓸려 나갔다.
아예 전멸해 버린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방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당한 곳까지.
죽거나 도망치거나.
놈은 선택을 강요했다.
나를 피해 달아났던 괴물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닥을 기며 다가오는 안개를 마주하며 신호탄을 쐈다.
-피유우우웅. 파앙!
초록색 신호탄이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후우우웅.
느긋하고도 부드럽게 안개가 나를 지나쳤다.
구름 속에 들어온 기분.
한가한 감상과 달리 긴장감은 놓지 않았다.
그동안은 안개를 피해 다녔다.
굳이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가 없었고 방어선을 유지하며 빠지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이런 곳이었군.”
에렘바트의 공세 속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
대다수가 불안을 호소했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으니.
-안개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나올 거예요, 나온다고!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모든 참상은 안개 속에서 일어났다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 곳에 직접 들어간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이들이 몇이나 되려나.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확인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방금까지 봤던 마을은 더 이상 없다.
더 높고 괴상하게 바뀐 건축물과 풍경.
있지도 않았던 마차가 보이고 썩어 문드러진 말이 바닥에 가득한 물이끼를 씹어 댄다.
간접적으로 봐 왔던 안개 속 주민들이 창문에 붙어 나를 바라보았으니.
들뜬 시선과 따개비로 가득한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이미 죽은 누군가의 망령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나온다.’
그들이 실존하고 실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수줍게 안에만 머무르던 이들이 움직였다.
-끼이이.
문이 열리며 걸어 나오는 녀석들.
형식을 갖춰 옷을 입은 이들이 중절모를 벗으며 고개를 숙인다.
신사답기도 하지.
“입에 물고 있는 것만 뱉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지금도 쉴 새 없이 우적거리는 그것.
누군가의 팔이었을 것에는 연합 사람을 의미하는 분홍 띠가 달려 있었다.
툭.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아니면 이제 인사치레는 충분히 했다 이건가.
물고 있던 것을 뱉은 녀석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고.
-푸콰하아아악!
놈의 몸에서 거대한 집게발이 뻗어 나왔다.
자동차 따위는 한 손에 잡을 만큼 커다란 집게.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녀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덕분에 고민이 줄었다.
이러나저러나 해야 할 건 똑같았다.
-콰지지지직!
몬스터를 죽이는 것.
푸른 검강을 담은 검이 놈의 집게발을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