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봉인의 주체
썰매를 타며 자라난 산호초를 박살 내는 와중에 날아가는 탈모맨이 보였다.
나처럼 날아다니는 능력이 없으니 추락이라 보는 게 맞겠다만.
-쿠우우웅.
떨어진 자리로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역시 탈모맨, 지형 몬스터까지 같이 혼내 주고 있구나!”
“끼아아아?”
‘망구가 뭔 개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무시했다.
말 못 하는 애들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이제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뭐가 됐든 저쪽은 탈모맨한테 맡길 생각이다.
저런 거로 당할 리도 없거니와.
“저 끈질긴 놈 봐라.”
덕춘이한테 신나게 맞는 와중에도 크라켄이 나를 잡으러 오고 있다.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8개의 다리 중 절반은 기능을 잃었다.
덕춘이에게 터진 눈알도 마찬가지.
폭식으로 먹어 치운 부분은 회복이 더딘 모양.
그럼 그렇지. 누구 배 속에 들어간 건데.
‘피시맨은 거의 끝낸 거 같고.’
저쪽, 피 칠갑을 한 피시맨이 보인다.
탈모맨한테 두들겨 맞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걸 봐서는 조만간 끝날 거 같고.
해룡이 살짝 걸리지만.
‘충분히 가능해.’
절대적인 크기가 커서 그런 거다.
청색으로 빛나던 비늘이 색을 잃었다.
여기저기 깨져 하얀 금으로 도배되었으니.
서로 맡은 건 끝까지 간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핵심이 되는 부분을 찾아야 돼.”
지형형 몬스터는 보기 극히 어렵다.
그런 형태를 가진 객체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편이다.
그놈들에게 입은 피해가 커서 우선적으로 연구했으니까.
지형형이라고 무작정 주변을 집어삼키는 게 아니다.
시작점.
주변 환경을 바꾸기 시작한 핵심 지역이 있다.
그곳에 본체라 불릴 만한 것이 존재한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단순히 주변만 파괴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
놈의 핵심을 찾고 있다.
맨 처음 놈이 소환됐을 때를 생각해서 크라켄 근처에 있을까 했는데.
‘꼭꼭 숨었군.’
에이션트 몬스터 정도 되면 당당히 약점을 드러내도 되는 거 아닌가.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크라켄보다 이쪽을 먼저 신경 쓰는 이유?
“으으으. 음? 이야! 빵 냄새 죽이는데!”
저기, 탈모맨이 산호초가 내뿜는 가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지금이야 저 정도지만 심하게 중독되면 어떻게 될지.
“후우우.”
가늘게 숨을 내뱉으며 기감을 살폈다.
권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쓸 수 있는 감각은 모두 써야 한다.
다행히 난 그럴 능력과 상황이 된다.
놈은 에이션트. 혼돈을 품고 있는 놈이었으며.
-스스스스스.
“저기군.”
난 혼돈 수치가 상당히 높으니까.
같은 기운을 예민하게 캐치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데 유독 혼돈이 많이 모였다?
그럼 거기가 핵심인 거지.
-콰드드드득!
건물을 집어삼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산호초 더미.
그곳으로 뛰어들자 촉수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촉촉한 것이 독액 같은 게 흘러나오는 거 같다만.
“비켜!”
-콰자자작!
그딴 건 내게 소용없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번뜩이는 섬광.
찰나의 순간 5개의 빛줄기가 이어졌고.
-후두둑.
조각난 촉수가 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물을 틀어 놓은 호수처럼 사방으로 독을 뿜어내는 걸 무시하고 산호초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단단했지만 전력으로 내지른 주먹을 막기에는 역부족.
-쿠르르릉.
-콰아아아앙!
그대로 폭발을 일으켜 균열을 만들었으며.
[프로즌 브레이크(SS) Lv.5]
-콰장창!
안쪽으로 스며든 물기가 급속히 냉각. 폭발을 일으켜 완전히 구멍을 뚫어 버렸다.
그대로 앞으로 전진.
-콰드드드득!
나를 붙잡기 위해 산호초가 급격히 자라나며 내 몸을 붙잡는다.
초인이라 한들 몸통 전체가 휘감기면 힘을 제대로 낼 수 없는 법.
하지만 괜찮다.
“망구야!”
“끼아아아악!”
몸으로 어떻게든 벌려 놓은 틈.
그 사이로 망구의 창이 뱀처럼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비상한 궤적을 그리며 찔러 온 창이 내 겨드랑이 틈을 지나갔고.
-콰직.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호초가 빛을 잃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것처럼 가루를 흩날리며 쪼그라드는 것들.
핵을 중심으로 회색빛 부스러기가 되는 광경은 꽤나 볼만했다.
“남은 건 셋.”
아니, 둘인가.
탈모맨이 날린 주먹이 피시맨의 머리를 터트렸다.
남은 건 해룡과 크라켄.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낸 탈모맨이 내 쪽으로 온다.
산호초의 가스가 사라져서 그런가, 표정이 밝다.
“어우. 좀 살 것 같네.”
“정신이 좀 드냐?”
“난 항상 제정신이지!”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효과가 남아 있는 거 같은데.
짜게 식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됐든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무너지기 직전 빌딩 같은 해룡에 다리랑 눈이 반쪽인 크라켄이라.
“빠르게 끝내자.”
“물론이지.”
캉! 캉!
탈모맨이 건틀릿을 부딪치며 의욕을 불태운다.
그에 맞춰 놈들이 울부짖었고.
-콰르르르르릉!
놈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도 연달아.
저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요정 클럽도 왔군.”
그쪽으로 떨어진 에이션트 몬스터를 해치운 모양이다.
지원군까지 오면 더 편하지.
-콰앙!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와 탈모맨이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 * *
에이션트 몬스터들을 불러오는 건 옳은 판단이었다.
놈들을 해치우는 것으로 몰려들던 몬스터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으니까.
범람하는 바다에 숨어 공격해 오는 놈들이 적어진 것만 해도 숨통이 트였다.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다시 올 거야.”
그게 스마일캡의 판단이었다.
누구보다 이곳에 오래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
“전에 화나서 특이 게이트 몇 개 부순 적 있거든.”
이미 해 본 거였냐.
새삼 이 녀석도 괴물 같은 놈이란 걸 느꼈다.
“놈들 없어도 에렘바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이쪽으로 몰려올 거야.”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다른 강력한 객체에게 밀려온 거다.
있던 곳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인위적인 위협을 가해 이동시킬 수 있다.
일종의 몰이사냥과 같은 방법.
에렘바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이미 상식선을 벗어난 상태야. 지금 준비할 수 있을 때 하자.”
“맞는 말이에요. 피해도 예상보다 크고요.”
“중앙에 있던 등반가도 8명이 당했어. 그중 7명이 탑 밖으로 나갔고.”
아직 중앙섬이 제대로 공격당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피해라.
뭐가 됐든 재정비가 필요하다.
처음부터 일주일가량 싸울 것을 상정하고 만든 계획이다.
이미 일주일이 지났다.
앞으로 며칠이나 범람이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스마일캡이 겪었던 시련은 잊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상황은 꼬였지만 중요한 것만 보면 간단하지 않아?”
다리를 꼰 채 에너지바를 먹던 핥짝이가 입을 열었다.
“에렘바트 그 녀석만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걔도 불러서 잡자.”
따지고 보면 시련의 메인은 에렘바트.
범람을 일으키는 것도, 몬스터들을 끌고 오는 것도 그 녀석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걔는 못 불러내. 내가 지배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빈집 털이 한 거거든.”
스마일캡이 고개를 젓는다.
97층의 지배자는 스마일캡이 맞지만 온전한 소유자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놈이 봉인되어 있는 동안 차지한 거니까.”
지배자 행세를 했어야 할 에렘바트는 평소 잠들어 있어 활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니 스마일캡도 98층에 도전했다가 다시 내려오고 그랬지.
“유적지를 지키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중앙섬에 위치한 유적지.
스마일캡의 본거지기도 한 그곳만 지키면 결국 에렘바트는 다시 잠든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어나겠지만.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스마일캡, 전에 시련을 인위적으로 일으켰다고 했지?”
“어. 그래야 위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한 거지?”
시련의 핵심은 결국 범람을 막는 거다.
그 방법은 여러 개고.
핥짝이가 말한 것처럼 원인 자체를 없앨 수도 있고, 지금껏 스마일캡이 했던 것처럼 범람이 끝날 때까지 중앙섬을 지킬 수도 있다.
인위적으로 에렘바트를 깨웠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봉인을 약화시켰다는 거다.
그렇다면 반대로 봉인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음. 그게 말이야. 직접 보면 되겠지.”
머리를 긁적인 스마일캡이 일어선다.
현재 전방위를 맡았던 인원들은 중앙섬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 한쪽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고.
스마일캡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적지를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건물 정도로만 보였지.
종교적인 특색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택이라 보기에는 휑하고.
뭔가를 기념하거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관 같은 용도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다.
“오. 뭔가 신전 느낌 난다.”
“신성력은 안 느껴지는데.”
“꽤나 정교한 석상이군요.”
유적지 내부.
평소 갈 일 없는 곳에는 무너진 기둥 사이, 우뚝 솟은 조각상이 있었다.
저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종족도 모습도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이쪽 세계의 영웅들이 아닐까요?”
“동감한다. 신을 표현했다기에는 너무 사실적이야. 미화도 없고.”
저마다의 무장을 한 모습이라는 것.
부서지거나 깨진 것들도 있었으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뿔이 돋은 투구를 쓴 전사나 정령으로 보이는 것을 부리는 요정.
그 밖에도 함성을 지르거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스마일캡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조각상을 세우지 않은 발판이 모인 곳.
새롭게 등장할 영웅들을 기다리며 다듬어진 공간이었다.
“이거야. 에렘바트의 봉인과 관련된 거.”
그가 발판 하나를 가리켰다.
평범하게 생긴 목걸이.
느껴지는 기운은 아예 없다.
혹시 몰라 권능을 사용해 살폈지만.
[제니일의 목걸이]
-아틀란티스 출신 요정, 제니일의 목걸이입니다.
-오각형 모양이 예쁩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등급도 없는 일반적인 목걸이.
“에렘바트를 자극하는 것이 몇 개 있어. 바다에 독 푸는 거랑 사람 피 뿌리는 거 등등.”
짤랑.
목걸이를 흔들었다.
“이것도 밖에 가지고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오면 반응이 오더라고.”
“놈과 관련된 물건인가 보군.”
“아마도 그렇겠지. 아, 그리고.”
스마일캡이 인벤토리에서 뭔가 꺼낸다.
검 같은 거의 파편으로 보이는데 평범한 건 아니었다.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것도 싫어하더라.”
“동류 아니던가? 희한한 놈이네.”
“이상할 건 없지. 등반가도 서로 사이 나쁠 수 있잖아.”
“아무튼 놈이 싫어하거나 반응하는 거 죄다 뿌리면 범람이 일어나.”
저마다 의견을 나눈다.
목걸이를 미끼로 끌고 오자는 사람도 있었고 싫어하는 것을 이용하자는 경우도 있고.
근본적으로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방어선을 재정립해야 한다 주장하기도 한다.
나 또한 가용할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혼돈의 파편을 싫어한다라.
당장 내가 쓰는 혼돈검도 델버튼의 부산물로 만든 물건이다.
‘설마 그래서 나한테 모습을 드러낸 건가?’
가진바 혼돈도 많으니 혼돈의 파편이랑 헷갈렸을 수도 있다.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놈이 나를 엿 먹이려 하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과정과 결과가 별로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한테 눈 한 번 깜빡이고 간 게 끝이다.
적어도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다.
왜지?
슬쩍 인벤토리를 열어 물건을 확인했다.
‘이걸 사용해 볼까.’
아직 내게는 카오스 박스가 있다.
그것도 2개나.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혼돈의 파편도 나온다고 했다.
그 정도로 난리를 치면 에렘바트도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쓰지 않더라도 이것 자체에 반응할지도 모르는 거고.
좋다.
다 좋은데.
“스마일캡.”
하나는 확인해야겠다.
스마일캡의 설명.
내가 마주친 에렘바트.
놈의 행동 양식과 반응들까지.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에렘바트, 봉인되어 있는 거 아니지?”
놈은 봉인되어 있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적지 때문에 봉인된 게 아니야.”
녀석 스스로 봉인되어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