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마주 보다
스마일캡은 범람이 6일 정도 지속된다고 했다.
때마다 주기가 다르고 기간도 달라지기는 하지만.
“틀렸어.”
길면 보름까지도 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달랐다.
끈질기고 지독하게 다가오는 안개와 서서히 차오르는 바다.
이건 하나의 굴레와 같아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지척까지 와 있다.
결코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도,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도 않을 거다.
왜냐.
[냥냥펀치]: 햇빛 못 본 지도 일주일째임
[정수리 핥짝]: 이거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지는데?
[니머리 탈모]: 군대 다시 온 거 같아. 하루 엄청 긴데 시간은 쭉쭉 흐르고
[쁘띠공듀]: 아앗… 아… 국가는 여전히 당신을 위한다구욧!
[니머리 탈모]: 아, 안 돼!
[정수리 핥짝]: 맞네? 탈모쉨 중간에 퇴출당했었잖아
[냥냥펀치]: 아하! 그럼 전역은 아니네? 탈모 탈영!
[정수리 핥짝]: 탈모영! 오늘부로 네놈 이름은 탈모영이다!
[니머리 탈모]: 아니… 아니! 퇴출도 전역은 전역이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 계획해 둔 시뮬레이션도 어그러졌다.
계산대로라면 지금쯤 중앙섬 인근에 있는 섬까지 침몰했어야 했으니.
스마일캡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고.
[스마일캡]: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져서 꼬인 거 같은데
[초코쪼코]: 누나가 꼼꼼히 확인하라고 했지?
[스마일캡]: 진짜로 나 혼자 있을 때는 안 그랬단 말이야
[화무선]: 허허. 세상의 이치를 어찌 인간의 눈으로 보리오
[초코쪼코]: 오? 저기 뭐 있다. 갔다 올게
[스마일캡]: 헛것 같으면 바로 나와!
[스마일캡]: 이번 범람 심상치 않으니까 최대한 경계해야 돼
[화무선]: 헌데 조균 공은 어째 말이 없소?
[스마일캡]: 막내! 정신 차려!
처음 겪는 상황인 만큼 스마일캡 또한 당황했다.
이야기로 듣길 스마일캡 혼자 있을 때도 범람은 일어났다고 한다.
다만 그에 따라 난이도가 조절됐는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이해 안 될 건 아니야.”
“그에에.”
탑은 상황에 따라 난이도가 바뀌고는 하니까.
특히나 지금은 더 그렇다.
[97층에 혼돈이 충만합니다.]
혼돈의 영향까지 가해져 더 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까지 온 이들은 등반가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곳과 달리 혼돈 수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
혼돈 수치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을 거다.
몇몇은 100점 정도는 그냥 넘길 거고.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거 설마 나 때문인가?’
거짓말 안 보태고 탑 안에서 나보다 혼돈 수치 높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스마일캡 또한 보통이 아니었으나 나보다는 적다고 느껴졌다.
파히루를 처치하고 큰 폭으로 혼돈이 올라간 것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길어지면 위험해.”
지난 일주일 동안 경험해 보고 내린 결론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스킬 레벨이 빠르게 올랐다.
등급이 올라간 만큼 레벨을 올리기 힘든데 이 정도로 올랐다?
‘상상 이상으로 독한 거야.’
심지어 등급을 초월시킨 나도 속이 안 좋을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단순히 독과 저주, 질병에 오염되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근육팡팡전사]: 공듀님! 공듀님이 보여요!
[일루젼]: 정신 차려 ㅁㅊ놈아!
[일루젼]: 지금 내 옆에 계시거든^^
└이 새끼부터 치료해야겠는데?
└중심부도 이러면 외부는 어떻게 버티냐 ㄹㅇ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이들도 다수 보였다.
놀라운 건 외곽을 지키고 있는 우리 말고 중앙에 모여 있는 이들도 그렇다는 것.
간접적인 영향만으로도 이 정도다?
‘스마일캡이 검증된 이들만 외곽으로 보낸 이유가 있었군.’
저항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행히 아직 멤버들은 멀쩡한 것 같다만.
냥펀이야 보호 수단이 많고 핥짝이나 탈모맨은 정신력이 뛰어나니까.
스킬이 아닌 타고난 정신력 자체가 강하다.
-구오오오오오.
안개 저 너머, 가라앉은 섬 어디선가에서 들리는 울림.
조금씩 영역을 내어주는 우리를 비웃는 듯하다.
점차 존재감을 불리는 무언가.
육지에 있음에도 물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공기가 습하다.
이미 진동하는 비린내에 코는 막혀 버린 지 오래.
-잘그락.
인기척이 들린다.
“어인이군.”
처음에는 잡다한 해양 몬스터와 시체들만 떠내려왔건만.
슬슬 심해에 있던 놈들까지 튀어나온다.
다른 곳에서는 퍼스트 몬스터도 등장했다는 것 같은데.
“불빛.”
눈을 가늘게 떴다.
안개 너머 흐릿한 풍경이 보인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터일진대 건물의 형상이 보인다.
불이 켜진 곳도 있었으며 검은 실루엣이 사람처럼 돌아다닌다.
그러다 사르륵.
물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번져 사라진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저 망할 안개가 생기면 으레 벌어지는 일이었다.
-푸슉.
옆으로 다가오는 어인의 흉부에 검을 박아 넣었다.
저항감 없이 심장이 뚫려 절명하는 놈.
쓰러져서도 눈알을 굴려 나를 바라본다.
비명 하나 없다.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아 검을 비틀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푹.
-쿠드득.
-서걱.
비척이며 다가오는 놈들을 쑤시고 베어 내길 반복했다.
마치 죽기 위해 오는 것 같다.
눈꺼풀도 없는 놈들의 시선만이 감돈다.
죽어서 생기조차 없건만 바닷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은 나를 주시했다.
“이동해야겠군.”
어느새 발목까지 물이 찼다.
도대체 언제?
격렬한 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통신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물 차오른다. 다음 지점으로 갈게.”
-여긴 아직이긴 한데, 같이 빠지지 뭐.
-진형 유지해야 하잖아. 나도 간다!
-으으으. 나도 갈랭. 방금 이상한 거 봄
이상한 거?
“뭘 본 거야? 냥펀.”
-사람 얼굴을 한 물고기가 나 보고 웃었엉. 잘린 머리인 줄 알았넹
인면어인가?
몬스터의 경우 자기주장 강한 외형을 지닌 놈들이 많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해양 몬스터잖아. 괴상한 놈들투성이야.”
사람, 심지어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다못해 뱀파이어도 이지를 잃은 객체는 몬스터로 분류한다.
정령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거니와 그게 아니더라도 유명한 객체가 몇 있다.
알려진 게 많이 없는 해양 몬스터라면 뭐가 있어도 있겠지.
-흠칫.
뜨끈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빠르게 뒤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없다.
아니.
“뭐야.”
보이는 건 있었다.
앞에서부터 보였던 환영이 아른거린다.
공터였을 곳이 마을로 변했다.
이걸 마을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흐릿한 형태는 인공적인 구조물이 분명했다.
심지어 분수대까지 있다.
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등 뒤로 손가락뼈 같은 날개를 편 아이 형상의 조각상은 분명히 보였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양식.
세밀한 조각 실력과는 별개로 악의가 가득 찬 형상이다.
자세히 살피기 위해 허리를 굽힌 순간.
키릭.
조각상이 눈알을 굴려 나를 바라봤다.
-후웅.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분수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타다닥.
작은 실루엣이 건물 사이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발을 박찼다.
어차피 이곳에 보이는 것은 환상.
저걸 쫓아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발을 박찼다.
따라가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충동일지도 몰랐고 잦은 환영에 익숙해져 경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저게 가짜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수욱.
골목을 따라갈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실감 나더라도 환영은 환영.
그대로 건물을 뚫으며 달려갔고 나와 부딪힌 건물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기세가 사뭇 굉장하여 폭발적인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밸브가 풀려 버린 증기 터빈처럼 쏟아지는 연기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나아갔다.
점차 흩어지는 연기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이건, 뭔.”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어둡고도 투명한 것이 나를 비춘다.
상반되는 표현이었으나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온갖 괴물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사람.
그건 틀림없이 나였으니까.
-구오오오오오.
그런 나를 반기는 걸까.
거대한 울림이 전신을 세차게 때렸다.
웅덩이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파장을 이루듯 넓고 깊이 퍼져 나가는 울림.
-드득. 드드드드득!
굵고도 울렁이는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모든 잡음이 집어삼켜진다.
거인이 내 양어깨를 잡고 흔들며 악을 쓰는 거 같다.
물먹은 듯 귀가 먹먹함에도 파동은 심장을 뚫고 안으로 들어온다.
속이 뒤집히고 머리로 피가 쏠린다.
온몸을 진동시키는 울음에도 정작 주변 무엇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건 세상인가, 아니면 내 정신인가.
[정신 보호(SSS) Lv.MAX]
까드득.
이를 갈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외부의 침입에 흔들릴 만큼 나는 나약하지 않다.
두 다리에 힘을 줬다.
나를 바라보는 것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떨림이 잦아들며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너구나?”
난 나를 비추던 어둠이 놈의 눈동자임을 깨달았다.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
안개처럼 허연 흰자위가 하늘에 닿을 듯하다.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건만 놈이 기꺼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가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깜빡.
녀석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파아앗.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환영이 사라진다.
마치 세상을 가리던 커튼이 치워진 것 같다.
더 이상 건물의 실루엣도, 괴상한 조각이 붙은 분수대도 없다.
황폐한 공터에는 안개조차 남지 않았다.
얼씨구.
고개를 들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까지 보인다.
여전히 물기를 머금어 무거운 구름들이 잔뜩 깔려 있었지만 하늘은 하늘이었다.
그저 이곳에 남은 거라고는 염분기 가득한 바닷물뿐.
차갑게 달라붙는 물길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 새끼. 진짜.”
발목까지 찼던 물이 어느새 가슴까지 차올랐다.
-공블아이 어디야?
-포인트 도착했냥?
-자리 잡고 있는 거 아닐까. 여기 엄폐물이 적잖아.
귓가로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멤버들은 이미 다음 포인트에 도달했다.
못해도 몇 시간은 지났다는 뜻.
“예의범절도 바른 녀석 같으니. 인사를 뭐같이 하네.”
-구오오오오오.
내게 화답하는 걸까.
바다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울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놈의 존재에 내 정신이 멀쩡하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 커다란 눈동자에 검을 쑤실 수도 있겠지.
지금은 합류가 먼저다.
마련해 두었던 육로는 사용 불가.
헤엄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해수면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곧 턱까지 닿는다.
“아직 가는 중. 금방 도착할 거야.”
걱정하고 있을 멤버들에게 연락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하면 바닷물에 뛰어들기 싫었는데.
여전히 오염 물질이 가득한 바다.
그 안에서 눈을 뜬 난 작게 감탄했다.
예의 바른 녀석이 선물까지 보내 놨다.
표면 위를 덮은 기름기 때문인지 어두침침한 바닷속.
-구르르르르.
수백 쌍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오방위로 이루어진 디펜스 라인.
이블아이와 멤버들, 노블 나이트와 빅스타, 루키 그룹, 요정 클럽이 만든 방어진에 의해 중앙섬은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었다.
적어도 범람 4일 차까지는 그러했다.
“어인이다! 어인!”
“망할! 가오리 자식아!”
아무리 섬을 기준으로 적을 막더라도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는 법.
그 틈을 파고드는 몬스터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해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녀석들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아직 섬을 뒤덮을 만큼 해수면이 높아지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꾸준하게 물이 차오르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피해는 있을지언정 무난하게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해일이다!”
“어디? 요정 클럽 쪽 아니야? 저번에도 그랬잖아!”
“해양 지진 그거? 그런 것치고는 진동이 없었는데.”
8일 차로 넘어가는 현재.
균형이 깨졌다.
“남서쪽이 아니야! 북동쪽이다!”
“북동쪽? 거기면.”
저 멀리 수십 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며 전진하는 파도가 보였다.
“빅스타 쪽 아닌가?”
높이 치솟은 파도.
그 위로 시커먼 점이 빼곡하게 박혀 있다.
물 밖으로 나온 흉측한 얼굴의 몬스터들이 절망을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