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97화 (697/740)

697화 해무海霧

6일이라는 시간.

공교롭기도 하다.

우리가 올라왔던 시기와 엇비슷했으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고.

“맞아. 너희 올라온다는 걸 듣고 맞춘 거야.”

“좀 더 준비할 시간을 가졌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이건 순수한 의문이었다.

층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어떤 위협이 있는지.

이 층을 지배하는 규칙이나 세계관은 어떤 것인지.

무엇을 해야 클리어가 가능한지 등등을 알아 가는 시간.

물론 97층의 지배자는 스마일캡인 만큼 굳이 이런 정보를 따로 알아낼 필요는 없지만.

“소규모로는 합을 맞춘 적이 있지만 이 인원은 아니거든.”

놈이 97층에 올라온 이들 중 절반은 죽을 거라고 말한 시련이다.

그만큼 강력한 적이 나온다는 것.

거기다가 예상이 맞다면.

“플래티넘 등급 숭배자. 놈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단 3명만이 존재하는 플래티넘 등급의 숭배자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디까지나 짐작이기는 하다.

99층에는 숭배자의 왕이 존재하니 그보다는 아래에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97층, 아니면 98층.

일단은 왕이니 놈의 수족인 부하는 99층에 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힘들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난 오필리아가 준 기록 구슬을 봤다.

숭배자의 왕 옆에 버티고 있는다?

그거 쉽지 않다.

“흐으음. 이미 플래티넘 등급을 만났구나?”

“한 명 죽였지.”

다른 한 명은 나랑 동맹이고.

그러고 보니 96층에서 놈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게 깜빡했다.

갈매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주변에 같이 있는 사람이 많았어서.

여러모로 바쁘기도 했고.

“합당한 의문이지만 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윽.

초코쪼코에게 머리가 밀려 품에서 벗어난 녀석이 눈을 찡긋한다.

“그 녀석, 위에서 봤거든.”

“98층이군.”

그렇다면야 안심이다만.

“아, 근데 여기서도 보긴 했어.”

“야.”

“아니, 진짜로. 가끔 있어, 위아래 왔다 갔다 하는 애.”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겪지 않았던가.

골드 등급 숭배자, 패트.

그 녀석도 층을 오가는 능력이 있었다.

플래티넘 등급 정도 되면 뭔가 괴상한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타입인걸? 재경이 형한테 들었을 때는 무식하게 들이미는 줄 알았는데.”

“맞앙. 잘 봤넹.”

“제법 쓸 만한 눈이잖아?”

“하하하! 공공아이가 좀 무식하지만 사람은 착해.”

내가 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는데 탈모맨이 저러고 있으니까 왠지 열받는다.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

마그마 요정,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않냐?

“합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기는 한데, 그렇게 크게 중요하진 않을 거야.”

그래. 이 부분도 중요하지.

“설명을 들으면 이해될 테니 잘 들어 보라고.”

스마일캡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유적지 한 공간.

발표를 위해 준비했는지 소파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다.

“콜라잖앙!”

“뭘 좀 아는 녀석이군.”

“냥펀, 그런 거 먹으면 키 안 자라. 뼈에 안 좋대.”

“닥쳐랏, 얍! 어차피 안 자란당!”

“우리 탈모, 앙증맞아서 귀여운 말을 하네.”

“아니! 악! 그건 네가 너무 큰 거고!”

괜히 한마디 했다가 냥펀에게는 복부를, 핥짝이한테는 정수리를 얻어맞은 탈모맨이 바들거렸다.

내 몫의 간식을 챙겨 조용히 앉았다.

괜히 끼었다가 나한테도 불똥이 튈 것 같아서.

무너진 기둥에 나무 판을 붙여 만든 칠판에는 97층 지도가 붙어 있다.

-짝짝.

스마일캡이 시선을 모은다.

“자 자, 준비는 얼추 된 것 같으니까, 이야기 시작할게.”

녀석의 말에 손을 들었다.

“박재경은 아직 안 왔는데?”

“형은 내가 미리 말해 둬서 괜찮아. 루키 그룹이랑 같이 움직일 거라 안전하고.”

자기 사람은 열심히 챙긴다.

생각해보면 헬다잉 키친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

그거면 됐다.

시작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여기는 꽤 커. 바다가 대부분이라 더 그렇지만.”

해양 필드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특수한 환경이나, 종족이 아니면 바다에서 싸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탑의 구성은 멸망한 세계의 편린을 보여 주는 만큼 진즉 포기해 버린 해양 지대는 잘 안 보인다.

“6일 뒤부터 범람이 일어날 거다. 안개가 끼는 게 시작이지.”

녀석의 설명에 옆에 있던 화무선이 부채질해 안개를 만든다.

발표 효과 담당인가.

편하게 앉아서 팝콘을 뜯었다.

“안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환각, 착시, 방향감각 상실 등등 디버프가 걸려.”

괜찮다.

그런 건 내게 통하지 않으니.

멤버들도 각종 저항 스킬을 가지고 있었고.

“섬 대부분이 잠길 거야. 외곽 부분은 반드시 가라앉고. 해양에 특이 게이트도 있어. 혼돈 좀 먹은 녀석들이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핥짝이가 봤다던 퍼스트 몬스터의 흔적이 그거였구만.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퍼스트 몬스터라.

끔찍하군.

탑 밖에서도 해양 게이트는 재앙이라 불린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객체가 많은 것도 있지만 불리한 환경이 문제다.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까.

“특이 게이트 위치는 알아?”

핥짝이의 질문에 녀석이 손가락을 튕긴다.

지도에 붉은 점 몇 개가 보인다.

‘…몇 개?’

무려 5개다.

드래곤 산맥 때도 고작해야 2개였는데.

“좀 많아. 클리어 시도도 좋기는 한데 고생깨나 할 거야. 어차피 시간 지나면 재생성되기도 하고.”

재생성된다라.

층의 초기화를 말하는 거다.

시련이 끝나고 위로 올라가면 층은 다음 도전자들을 위해 무대를 정비한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가다가 걸리적거리면 치우면 되니까. 진짜 문제는 이거지.”

화무선이 부채를 휘두르자 괴상하게 생긴 그림이 지도에 생겨난다.

저건 뭘까.

해괴하게 생긴 괴물이다.

“혼돈의 파편이다. 이 녀석을 처리해야 돼. 사실 바다에 독 뿌려 둔 것도 특이 게이트보다는 이 녀석 잠재우려고 하는 거야.”

바다에 독을 인위적으로 뿌린 느낌이긴 했는데 이 녀석이 범인이었나.

그보다 잠재운다는 건.

‘이 녀석도 잡기 껄끄러운 놈이라는 거군.’

바다라는 특성이 더해져서 그런 거기는 할 테지만 죽이기 어려운 놈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 녀석도 잡아 봤자 되살아나니 굳이 힘을 빼기 싫은 걸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파티별로 움직여. 혼자 돌아다니다가 죽기 딱 좋으니까, 뭐어.”

슥,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혼자 다닐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내가 단독 행동을 자주 하기는 하다.

아무래도 그 편이 편해서.

망구까지 소환하면 덕춘이랑 함께 3종 파티를 할 수도 있고.

가만히 팔짱을 꼈다.

‘파티 플레이를 권장한다라.’

탑에서는 비교적 드문 행위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겠지만.

“아차차!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네. 아까 안개 낀다 했지? 점점 물이 차오를 거야. 진짜 차오르는 걸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거든?”

환각을 말하는 건가.

“만약, 환각도 진짜 물도 아닌데 가라앉고 있으면 죽어라 도망쳐.”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말.

다만 스마일캡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건 놈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뜻이니까.”

놈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어렵지 않았다.

진흙과 문어, 해파리와 물소 등등 뭔지 모를 것들을 뒤섞은 듯 생긴 괴물.

그 위로 이름이 떠올랐으니까.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

제게 이 시련의 메인이었다.

* * *

스마일캡이 인원을 지정하여 불러 모은 이유가 있었다.

함께 움직이기 위한 것도 있긴 하지만.

[냥냥펀치]: 97층의 혼돈의 파편은 못생긴 문어임

[정수리 핥짝]: 탈모쉨과 동류라고 볼 수 있지

[니머리 탈모]: 나 잘생겼는데? 엄마가 그랬어

[냥냥펀치]: 냐… 냐아…

[정수리 핥짝]: 이런 비겁한 자식… 너그러운 안목을 지니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해라!

각 세력을 대표하기에 시련과 관련된 정보를 전파할 수 있다는 게 컸다.

연합 및 일반 상위 헌터는 우리가 정보를 뿌리고.

[찌리리 요정]: 작전을 잘 짜 봐야겠는데?

[송곳 요정]: 물속은 좀 그런데 언니랑 떨어져 있어야겠다ㅎㅎ

[근육 요정]: 짜릿한 자극도 좋겠지

[마그마 요정]: 바다… 싫어…

[송곳 요정]: 막내는 용암 터트릴 때 조심하구

[근육 요정]: 잘못 터트리면 중앙섬에 해일이 닥칠 수도 있다

각 연합은 알아서 정보를 교류했다.

노블 나이트와 빅스타랑은 이미 정보 교환을 끝냈다고.

97층의 면적이 넓은 만큼 각자 맡는 지역이 달랐다.

중앙섬을 기준으로 오각형을 그린다면.

중앙에는 쁘찡연합+상위 헌터가 자리한다.

위에서 오른쪽으로, 각 꼭짓점에는 노블 나이트, 빅스타, 루키 그룹, 요정 클럽, 나랑 멤버들이 위치.

5개의 세력이 중앙을 지키는 형식이다.

각 세력마다 하나의 특이 게이트를 담당하는 것.

굳이 합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

‘자기 그룹끼리 뭉쳐서 싸우는 거면 그럴 수 있지.’

이번 시련은 일종의 디팬스라 보면 쉽다.

온갖 디버프가 걸린 안개와 범람.

특이 게이트에서 올라오는 몬스터.

랜덤으로 들이닥치는 혼돈의 파편.

그 안에서 버티는 거다.

범람이 끝날 때까지.

“보통 일주일 정도라고 했지?”

“엉. 근데 그 못생긴 애 컨디션 좋으면 보름도 날뛴다던뎅?”

“애초에 놈들이 중앙섬으로 올라오는 이유가 유적 때문이라며.”

그렇다.

내가 디팬스라고 생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놈은 왜 범람을 일으켜 가며 이쪽으로 오는가.

간단했다. 놈을 봉인시킨 힘이 유적에 있으니까.

일정 주기로 힘이 약해지고 그때를 노려 유적을 노리는 것.

여기서 문제.

유적지가 파괴되면 어떻게 될까?

내 물음에 스마일캡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그런 적이 없으니까.

뭔가 재수 없었지만 맞는 말이라서 수긍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른 쪽은 신경 끄고 우리가 할 거에 집중하자.

넷이서 적들을 막는 만큼 대비를 잘해야 한다.

“말했다시피 모든 놈을 막을 필요는 없어. 넘길 놈 넘기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게 핵심이야.”

오각형의 꼭짓점을 맡은 다섯 세력.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각 무리마다 인원은 많지 않다.

처음부터 완전히 막을 생각은 없었다.

중앙에 가장 많은 사람을 배치한 이유기도 하고.

동시에 스마일캡이 절반은 죽을 거라 말했던 이유기도 했다.

“각 포인트 잘 기억해 두고. 물에 잠긴 섬은 버리고 다음 섬으로 가야 하니까.”

“퇴각로도 몇 개씩 잡아 뒀으니 편한 곳으로 가면 돼.”

핥짝이가 지도에 표시한 마크를 가리킨다.

특임대 출신인 탈모맨이 직접 돌아다니며 고른 장소다.

이동 경로, 방어에 용이한 지형 등등 여러 조건을 따졌으니 믿을 수 있다.

지형 탐사와 작전 회의, 잡다한 함정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것들 챙기구. 물에 빠지면 좀 쓸 만할 거얌.”

냥펀도 공수해 온 물건을 풀었다.

우리 모두 수중 호흡이나 수중 시야 같은 스킬은 가지고 있다.

그래도 완전히 물속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으니.

[젤리 팡팡 아쿠아 슈즈(AAA)]

-바다에서 놀 때는 아쿠아 슈즈가 필수죠!

-헤엄을 못 친다고요?

-걱정 마세요!

-강하게 박차면 해당 지점이 탄력 있는 젤처럼 변합니다!

-물속이든 위든 뛰어다녀 보세요!

대충 물속에서도 땅에 있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다.

오히려 좋지.

땅과 달리 몸을 뒤집든 날리든 땅을 박차듯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수중전 준비도 완료.

물론 가능한 수중전은 피할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을 뿐.

-쿠르르르릉.

먹구름이 몰려온다.

저 멀리 흔적만 보이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다들 통신 끊기지 말구. 조심행!”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튀어. 다 잡을 필요 없으니까.”

“물론이지! 덩치 큰 놈이랑 힘겨루기 하는 것도 좋거든!”

“너 이 짜식아, 내 말 안 듣고 있지? 어?”

“섬 많으니까 물 찬다 싶으면 다음 섬으로 이동하는 거 기억하고.”

파아악.

짧은 대화를 끝으로 각자 포인트 지점으로 이동했다.

섬이 넓은 만큼 한곳에 모여 있는 것보다는 흩어진 채 진형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귀에 꽂은 통신 아티팩트로 통신이 안정적인 것도 확인 완료.

“이야, 썰렁하기도 해라.”

기껏해야 수백 가구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도달했다.

인기척 하나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는 공간.

어두컴컴한 하늘을 가리며 짙은 해무가 해일처럼 덮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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