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6화 6일 뒤
몸을 통한 대화는 언제나 성공적이다.
바디랭귀지가 왜 있을까.
세계, 문화,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거.
“끄으으읍.”
“큽! 우린 싸우기 싫다고 했는데.”
바닥에 엎어져 있는 칼, 창, 법사 파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싸우기는, 대화한 거지.”
“이번에 망할 세상에도 망조가 들었군. 호전적인 세상만큼 빠르게 망하는 곳도 없지.”
눈깔에 힘을 준 창잡이가 입가를 비튼다.
이 녀석, 생긴 거랑 다르게 뒤끝이 기네.
악담이나 퍼붓고 말이야.
하기야 말로는 무엇을 못 할까.
내가 봐도 우리 세계가 멀쩡해 보이지는 않고.
하지만.
-빠악!
“우리 세계 욕은 우리만 할 수 있다!”
“맞다! 그렇다!”
“악! 아악! 미친놈들아!”
냉큼 녀석을 걷어차자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마그마 요정도 놈을 밟아 댔다.
이래서 사람은 적을 만들면 안 된다.
결국 이렇게 돌아오는 것이거늘.
저항할 의지도 잃은 녀석이 바닥을 굴러다니기를 한참.
“후우. 이제 좀 낫네.”
“얘네한테는 어떻게 당했냐? 보니까 기습이어도 할 만하겠던데.”
몇 대 쥐어박아 본 결과, 놈들은 강하기는 했다.
저기, 창잡이가 소환한 골렘만 해도 막강한 방호력을 자랑했고, 마법사의 서포트와 강력한 화력은 힐러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골렘 사이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
전방을 휘저으며 시선을 분산시키는 칼잡이.
확실히 까다롭기는 했지만.
‘마그마 요정이면 골렘을 붙잡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용암 분출로 골렘부터 고정했으면 금방 처리했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그마 요정도 다수의 인원을 상대하는 데 익숙하니까.
“얘들한테 속아서 치명상을 입었거든.”
“속아?”
“스마일캡 이름 팔고 다니던데?”
움찔.
마그마 요정의 말에 다들 눈길을 돌린다.
등반가 같아 보이니 일단 꼬드기고 본 모양.
그러다가 진흙 안에 숨어 있던 칼잡이가 제대로 등을 찔렀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지배자 이름을 이용해서 함정을 팠냐.
마그마 요정도 스마일캡이 뭔가 배려를 해 준 모양이구나 하고 따라간 모양.
운이 나빴다.
다만.
“우린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어.”
“무, 물론. 스마일캡의 친우일 줄은 몰랐지만, 알아본 후에는 쫓지 않았다고!”
-빠악.
칼잡이의 뒤통수를 때렸다.
“쫓고 나발이고 알아봤으면 치료를 했어야지.”
짜식이 헛소리하고 있어.
그건 그렇지만 놈들이 한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스마일캡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말해 봐.”
일단 이것 먼저.
습격은 의도된 것이었다.
그것도 스마일캡에 의해 NPC들에게 전달된 것.
등반가를 적대시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몇몇 검증된 이들을 제외하면 공격하라 했다. 이곳도 버티지 못하는 이들은 98층에 오를 수 없다고.”
대충 어떤 말인지 알겠다.
동의는 못 하겠지만.
실력이 떨어지면 죽는 게 맞다.
운이 나빠도 죽기 마련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위험해지니 이곳에서도 못 버티면 98층은 당연히 못 버티겠지.
그런데.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그걸 왜 인위적으로 만들어.”
탑에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가, 생각이 비틀려 있다.
혹시 놈이 왜 그러는 건지 아는 거냐며 마그마 요정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으음. 좀 괴팍한 면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나름 이유가 있을지도?”
마그마 요정도 잘은 모르는 모양.
아무튼.
나를 비롯해 멤버들, 몇몇 사람들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커뮤니티로 97층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이미 당할 사람들은 당했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스마일캡, 이 녀석이랑도 한번 만나 보긴 해야겠다.
“97층도 클리어해야지.”
결국에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왕 올라갈 것, 쉽게 갈 수 있으면 좋은 게 아니겠는가.
지배자인 녀석을 만나면 뭐든 되겠지.
놈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고.
“그, 스마일캡이 지정한 인원을 만나면 데리고 오라고 했다.”
“지정 인원이 누군데.”
녀석이 부른 인원은 나를 포함한 멤버들, 요정 클럽의 찌리리 요정, 요리사이자 과거 인연이 있었던 박재경, 루키 그룹 전체.
의외로 오필리아와 빅스타는 부르지 않았다.
요정 클럽도 실질적으로 리더인 찌리리 요정만 불렀고.
“내가 왜 가야 하지?”
한번 튕겨 봤다.
“위로 올라가려면 만나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지금 거부해도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달라붙을 거다.”
파리 떼처럼 꼬일 거라는 뜻.
과연 그렇군.
“개인적인 조언이다만, 98층으로 향하려면 힘을 합치는 게 좋다.”
“힘을 합쳐? 뭐 하러. 스마일캡한테 포탈 열어 달라고 하면 되지.”
“97층의 지배자는 그가 맞지만 이곳의 모든 위험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은 최상위 층 중에서도 최상위 층이니까.”
97층쯤 되면 지배자도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모양.
98층으로 가는 포탈을 열려면 지배자인 본인도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녀석도 위로 올라가는 게 목표니까.’
98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이곳에 머무는 것뿐이다.
완벽한 지배력을 가질 필요도 없거니와.
‘어차피 위로 올라가려면 지배자 권한은 내려놓고 가야 해.’
아마 그사이에 이곳을 관리할 대리자를 놔두겠지.
이전에 초코쪼코를 통해 들었을 때 스마일캡은 이미 98층에 2번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앞장서.”
창잡이를 앞으로 밀었다.
여러 가능성을 살폈지만 역시 놈과 만나 보는 게 좋겠다.
멤버들도 불렀다고 하니 모이기도 편하고.
“그쪽은?”
“얘도 같이 갈 거야.”
초대를 받은 건 나.
마그마 요정은 초대 대상에 없었지만 데리고 갈 생각이다.
물론 녀석이 동의해야겠지만.
“나도 가지, 뭐.”
궁금하긴 한 모양.
어차피 마그마 요정도 다른 요정 클럽과 합류하고 싶을 터.
나쁘지 않은 동행이었다.
* * *
97층부터는 하나의 층만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다른 등반가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있다는 뜻이다.
무려 바다가 존재하는 필드니 말 다 했다.
대륙이라 생각했던 곳도 섬이었다.
“여긴 섬밖에 없군.”
정확히 말하면 대륙이라 불릴 만한 규모의 땅이 없다.
망망대해에 크고 작은 섬이 가득할 뿐.
섬마다 식생이 달라 보는 맛은 있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배를 타고 이동한 지 나흘 정도 되니 질리기 마련이었다.
“다 왔다, 저기니까.”
스마일캡의 입김이 닿은 걸까.
이동하면서 귀찮게 구는 이들은 없었다.
배도 나름 고급스러운 것들을 탔고.
기류가 심한 곳은 덩치 큰 배도 휘청거렸지만 좌초되지는 않았다.
가끔 해적들이 멀리서 우리를 구경했지만 깃발을 확인하고는 꽁무니를 뺐다.
“아틀란티스.”
그게 이곳, 메인 섬의 이름이다.
동시에 97층의 이름이기도 하고.
다른 곳과 달리 평평한 돌로 만든 도로가 깔렸고 가로수까지 있다.
야자수같이 생긴 것도 있고.
‘저건 산호초 아닌가?’
어째 바다에 있어야 할 것들이 섞여 있다.
밖으로 나와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도 같고.
금이 간 건물 사이로 이끼 대신 미역이 달린 건 좀 신기했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올라간 섬.
유적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따개비와 바싹 마른 불가사리가 붙어 있는 모습이 이국적이기는 하다.
“안내는 여기까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섬의 중앙부.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자 창잡이 파티가 멈춘다.
그의 말마따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그들을 막았다.
마그마 요정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어물쩍거렸지만.
“요정 클럽 인원이면 입장 가능합니다.”
짬이 있어 보이는 병사가 정리해 줬다.
그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유적지.
그곳에는 먼저 온 선객들이 있었다.
“왔냥?”
“휴양지 온 것 같아서 좋네.”
멤버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고.
“언니!”
“마그마 왔군요.”
찌리리 요정 또한 도착해 있었다.
박재경은 아직인 듯했지만 올 사람은 거의 다 모였다고 보면 됐다.
저쪽, 루키 그룹도 마찬가지.
“스마일캡.”
“오랜만이네, 이블아이.”
시선이 간 곳은 저 녀석이었다.
그의 옆에는 심복으로 보이는 NPC도 있다.
특이한 광경이었다.
나 또한 NPC들과는 같이 어울리며 노는 편이긴 하다만.
‘저렇게 NPC 위에 선 녀석은 처음이야.’
NPC의 입장에서 등반가는 언제고 밖으로 떠날 존재다.
그렇기에 저런 식으로 따르거나 충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수많은 NPC의 지지를 받는 오필리아도 그랬다.
“거의 다 모인 것 같군.”
그가 시계를 확인한다.
한쪽에는 달력도 있었는데, 수많은 X 표시 옆에 빨간색으로 칠해 둔 날짜가 있다.
6일 뒤였는데.
“6일 뒤, 시련을 마치고 98층으로 향할 생각인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꽤나 직설적으로 나온다.
나도 용건부터 말하는 걸 좋아한다.
“이봐, 등반가들을 공격하라 시킨 이유가 뭐지?”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은 좀 신경 쓰여서.
“아, 이야기 들은 모양이네. 별거 없어. 약한 녀석은 지금 빠지는 게 좋거든.”
“그걸 왜 네가 정하지?”
“내가 이곳의 지배자니까.”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대답이다.
동시에 맞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만든 규칙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할까.
“보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네.”
“사람들이 어떻게 그만큼이나 96층에 올라왔을까?”
“대충 들었어. 이것저것 많이도 해 놨더라고. 그거 과보호야.”
놈과 달리 난 다른 후발대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안배를 마련해 두었다.
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위로 향하길 바란다.
대의적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오른 이들이 많아야 멸망에 맞설 수 있어.’
강한 이가 많아야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나갈 사람들은 나간다.
모든 등반가가 위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의도된 죽음이 아니라.
“이곳의 습격도 못 버틸 수준이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나 돕는 게 낫다고 생각 안 해?”
스마일캡이 내게 다가온다.
“너도 알잖아, 바깥 상황이 좋지 않은 건.”
“그 시련인지 뭔지 그걸 통해 나갔어도 큰 차이 없었을 거야.”
“불만이 많구나? 그런데 어쩔 거야?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서로를 노려보는 타이밍.
분위기가 한순가에 식는다.
“이 짜식, 내가 오해하게 말하지 말랬지?”
“아! 누나!”
초코쪼코가 나서 녀석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뭐랄까.
‘사춘기 걸린 고딩 느낌인데.’
실제로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거다.
초창기 헌터니까.
탑이 바깥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생각하면 이미 수십 년은 여기에 있었다는 뜻이다.
정작 정신연령은 그러지 못한 느낌이다만.
거친 탑의 생태계에 정신이 삐딱선을 탄 게 아닐까.
“98층에 못 올라가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것도 이해가 잘 안되는데.”
“거기서 죽으면 트라우마 생기거든. 얘도 처음 실패했을 때 질질 짜고 난리도 아니었어.”
“안 그랬거든?!”
“그래쪄요? 아구구. 그때만 해도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동생 다루듯 하자 스마일캡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저 새끼, 살짝 즐기는 거 같은데.
모르겠다. 알고는 있었지만 루키 그룹도 정상은 아니다.
“허허. 그리 노여워하지 마시오. 표현이 서투를 뿐 악의는 없었을 테니. 물론 과정이 과격하긴 했소만은. 97층의 시련도 자칫 잘못하면 심마에 빠지오.”
화무선 또한 부채를 부치며 허허거린다.
쉽게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97층부터는.
‘공략에 실패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대미지가 쌓인다는 거잖아.’
알고는 있었지만, 탑이란 곳은 정말 지랄맞은 곳이었다.
흥미가 식었다.
“이곳 시련이 뭐냐. 그 이야기나 하자.”
그 잘난 최상위 층에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볼 생각.
난 자리에 앉았고.
“6일 뒤, 바다에 잠들어 있는 괴물이 깨어날 거야.”
스마일캡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올라온 등반가 중 반은 죽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