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95화 (695/740)

695화 97층 공지

십자 형태로 시야와 숨구멍을 뚫어 둔 투구.

꽤나 단출하면서도 고전적인 모습이었지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마그마의 흔적과.

‘장식으로 붙어 있는 보석.’

붉게 타오르는 듯한 보석은 마그마 요정의 투구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잘못 본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저게 아니더라도 그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식어 굳은 용암이 보였으니까.

바닷가 근처 땅에 화산이라도 터지지 않았다면 있을 리 없는 흔적이다.

거기에.

‘자신들이 온 길에 남은 흔적을 지우지도 않았다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신들을 쫓아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암시하는 것 아닌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넌 누구지?”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창을 들고 비교적 말이 적었던 자.

창을 쓰는 놈치고 무장이 무거웠는데.

‘전방을 맡는 녀석이군.’

녀석의 허리춤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달려 있었다.

평범한 장식은 아니고.

[캡슐 아이언 골렘(SS)]

-골렘은 휴대성이 안 좋다고요?

-그렇다면 캡슐 골렘을 사용해 보세요!

-아이언 골렘을 캡슐화했습니다!

휴대용 골렘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파티치고는 3명밖에 없다 했더니만 탱커 역할도 같이 하고 있는 모양.

“다시 묻겠다. 그 투구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약간의 침묵.

그래.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거군.

그렇다면 말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수밖에.

켕기는 게 없다면 말을 했어야지.

“이 투구는 주운 거예요! 가져갈 만한 건 다 털렸는지, 이거밖에 없었다고요!”

돌진하려는 타이밍, 마법사 여인이 외쳤다.

“위치.”

“저기, 흔적 있잖아요. 이미 다 끝난 거라 흔적도 안 지운 거라고요.”

본인들은 그저 주운 것이라며 당사자랑은 관계가 없단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투구 주인의 시체는?”

“모르죠! 없었으니까.”

슬쩍 떠봤지만 잘 피해 간다.

등반가는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코인이 있다면 안전지대로, 없다면 밖으로 퇴출당한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등반가는 절대 장비를 흘리지 않아.’

96층까지 올라왔다면 더더욱.

기껏 최종 세팅을 맞췄는데 탑에 두고 왔다?

그만큼 억울한 일이 없으니까.

죽음이 확실시되면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면 넣었지, 이렇게 두지는 않는다.

장비를 떨궜다면 그만한 상황이 있다는 것.

기습당했거나 아니면 챙길 틈도 없이 전투 중 사망했다든가.

“앞장서라.”

“무례하군.”

“내 동료의 물건이야. 억울한 상황이라면 사죄하지. 보상도 하겠다.”

뭐라 말하려던 창잡이가 입을 다문다.

동료의 물건이라고 하는데 뭐라 할까.

놈들이 범인이 아니면 마땅한 보상을 할 생각도 있다.

휴식을 방해한 건 사실이니까.

물론 그러지 않을 것도 같지만.

놈들끼리 했던 대화가 있지 않은가.

“후우, 일이 꼬이려니까. 단, 그쪽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네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해해 주길 바라네.”

창잡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짐을 챙긴 이들이 일어선다.

전방에 창잡이. 중간에 나. 뒤에는 칼잡이가 마법사를 보호하듯 나를 감시한다.

좋게 말하면 감시.

나쁘게 말하면 나를 기습하기 좋은 포지션.

-쿠르릉.

어스 월을 해제했다.

길을 찾는 건 쉬웠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용암 덩어리가 줄지어 이어져 있었으니까.

1시간가량 움직였을까.

“이곳이에요.”

전투의 흔적이 남은 곳을 발견했다.

마그마 요정이 맞다.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었으니까.

땅이 갈라진 걸 보니 용암 분출도 쓴 것 같고.

현장이 워낙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어 흔적을 찾는 건 쉽지 않았지만.

‘이건 기습이야.’

대략적인 상황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마그마가 날뛴 흔적에 비해 적들의 흔적은 많지 않다.

특히나 이 부분.

‘공격한 대상은 최소 2명. 넓게 잡아 봤자 4명.’

사용된 무기가 다르다.

놀랍지도 않게 검과 창, 땅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볼트.

때마침 내가 마주한 이들이 사용한 무기와 동일했고.

-잘박.

한쪽 구석에는 서서히 굳어 가는 진흙탕이 있다.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로 찔러 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깊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도 될 만큼.

칼잡이 녀석의 옷에 끼어 있는 것과 똑같은 색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스스스스.

손끝으로 용암이 분출하고 식으면서 만들어진 암석을 긁었다.

그곳에 선이 그어져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다.

누군가 돌이 식기 전에 그어서 만든 거지.

화살표.

그 옆, 흘겨 쓴 글자.

-A l'aide!

난 외국어를 잘 모른다.

저건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럼에도 통역 스킬로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와줘요!’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화살표가 있는 곳은 놈들이 있던 곳과 다른 방향이다.

커뮤니티를 켜 봤다.

여전히 마그마 요정이 올린 글은 보이지 않는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긍정적인 신호다.

‘아직 안 죽었어.’

죽어서 부활했다면 위협을 알렸을 거다.

97층으로 올라간 요정 클럽에도 언질이 있었을 거고.

이 녀석들이 범인인지 아닌지는.

‘마그마 요정한테 물어보면 되겠군.’

수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쪽. 저곳에도 흔적이 있는데 거기까지만 확인해 봅시다.”

“귀찮게, 진짜.”

“야 야, 일단 가만히 있어.”

칼잡이가 투덜거렸지만 마법사가 말린다.

흘낏 창잡이의 눈치를 보는 중.

녀석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차라리 나를 공격했다면 마음 편하게 썰어 버렸을 텐데.

“그러지.”

창잡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묘한 놈이다.

내 옷차림에 대해서도 뭐라 안 하고 말이지.

혹시나 싶어서 권능도 써 봤지만 숭배자도 아니다.

숲길을 걸어가며 넌지시 물었다.

“너, 나 알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래?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이레스카]

-97층의 NPC.

-모험가입니다.

-용병, 약탈, 임무 등등 돈 되는 일은 여럿 하죠!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꽤나 구린 일을 많이 했던 녀석치고는 나를 굉장히 어려워한다?

내 요구에도 순순히 응해 주고 말이야.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급하게 이동했는지 중간중간 불타 버린 나무가 보인다.

“다 왔군.”

흔적이 끊겼다.

부상당한 채로 흔적을 지운 모양.

습격한 이들이 추격해 올 수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상처가 컸을 테니 더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고.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나였다면 습격한 대상이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갔을 텐데.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다.

예상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우리도 어울릴 수 없다.”

흔적이 끊긴 것을 확인한 창잡이가 딱 잘라 선언했다.

어디까지나 현장을 같이 살펴 주는 것까지 하기로 했었으니까.

말마따나 내 요구를 더 들어줄 필요는 없지.

슬슬 발을 빼는 것이 마음이 급한 모양인데.

“보상은 받고 가야지? 밤중에 고생했는데.”

“괜찮다. 오해가 풀린 것으로 만족한다.”

괜찮기는.

픽 웃으며 녀석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놈이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크게 저항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만 생각해 봤는데 이놈들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 전에.

“마-그-마-요-정!”

쩌렁쩌렁 울리게 마그마 요정을 불렀다.

고함에 귀가 아픈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는 마법사와 칼잡이.

-파악.

그동안 잠자코 있던 창잡이가 팔을 쳐 내더니 동료들을 챙긴다.

“이만 가겠다. 이 이상 엮이고 싶지 않군.”

[어스 월(S) Lv.MAX]

-쿠르르릉.

벽을 세웠다.

물론 놈들의 실력이라면 저 정도 흙벽은 충분히 뚫을 거다.

다만.

“거기 넘어가지 마.”

경계선 역할 정도는 충분하다.

“스마일캡, 녀석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겠지?”

우뚝.

녀석이 멈춘다.

동시에 그의 동료들도 경악하는 표정으로 리더를 바라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이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일단 정황상 마그마 요정을 습격한 건 이 녀석들이 맞다.

부상도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는 마그마 요정을 죽일 능력도 있었다.

그럼에도 투구 하나 달랑 가져오는 것으로 끝냈다.

끝까지 추격해서 죽이지 않았다는 거지.

거기에 나를 보자마자 협력적으로 나왔다?

내 이야기를 들은 거다.

알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겠지.

외향적인 특징만 말해 줘도 나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스마일캡 그 녀석이 미리 통보한 거야. 위로 올라오는 등반가들 어지간하면 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마그마 요정을 죽이지 않은 거겠지.”

정확히는 못 했다고 보는 게 맞다.

죽였다가는 스마일캡의 보복이 들어오니까.

아마 통보가 이루어진 건 얼마 되지 않았을 거다.

습격을 가하는 도중에 전파됐을 터.

죽일 수는 없는데 습격은 이미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그냥 알아서 죽길 기도하고 장비라도 챙겨 오는 거지, 뭐.’

97층의 지배자는 스마일캡.

루키 그룹의 수장인 동시에 요정 클럽과도 인연이 있는 녀석이다.

98층을 클리어하지 못해 이곳에 머무는 만큼 새롭게 올라오는 등반가들을 환영하고 있겠지.

당장 나도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후발대로 올라올 등반가들을 위한 안배를 해 두지 않았던가.

“궁금하네. 놈 성격상 올라오는 등반가들을 일일이 알려 줬을 리는 없고.”

상식적으로 그 녀석이 97층으로 올라오는 등반가의 신상 명세를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등반가들을 건들지 말라는 것 정도로 말했겠지.

추가적으로 몇몇 인물은 자세히 말했을 거고.

“몇몇 특히 건들지 말아야 할 인원들을 말해 줬을 텐데. 나는 뭐라고 했어?”

요정 클럽과 쁘찡연합의 인물들 몇 명은 따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발뺌하지 말고.”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부스럭거리는 수풀.

그곳에서 마그마 요정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블아이!”

“몸은 좀 괜찮냐?”

“걔네 위험한 놈들이야!”

“알아, 알아.”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던졌다.

상태를 보아하니 움직일 정도까지는 회복한 듯하니 좀 더 쉬면 낫겠지.

아무튼.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걸로 이들이 마그마 요정을 습격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어떻게 나오려나.

무력으로 나올까.

지배자의 권한이 큰 건 맞긴 하다만, 미친 척하고 반발할 수도 있는 거라.

마그마 요정을 습격한 만큼 보통 놈은 아니겠다만 나도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서.

창잡이가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한다.

“…오해가 있다.”

“어. 말해 봐.”

혼돈검을 뽑았다.

무기만큼 좋은 대화 수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경청할 준비 다 됐어.”

난 아주 훌륭한 청자였다.

* * *

97층, 유적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고대 건물을 개조해 만든 건물.

그곳에서는 식사가 한창이었다.

척박한 환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호화스러운 요리.

몬스터뿐만 아니라 가축을 잡아 얻은 재료도 사용되었다.

탑 안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을 홀짝이는 인물 옆에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공지는 모두 전달되었습니다, 스마일캡 님.”

“그래.”

97층의 지배자.

헬다잉 키친의 VIP이기도 한 그가 과일 조각을 씹었다.

탑에 오랫동안 머무른 부작용인가.

미식을 탐미하게 됐다.

거지 같은 곳에서 쓰레기 같은 음식만 주워 먹었던 때의 보상 심리일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느낌.

저렴하지만 언제고 생각나는 라면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시야를 멀리 던졌다.

신규 등반가들이 있을 때는 종종 구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다.

탑은 더 이상 신규 인원을 초대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걸로 충분하십니까?”

“어떤 게 말이지?”

“몇몇 인원을 제외하면 공격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스마일캡이 97층에 공지한 것은 간단했다.

자신이 속해 있는 루키 그룹.

인연이 있는 요정 클럽.

나름 교류하고 있는 노블 나이트와 빅스타 길드.

그 외에, 실력을 의심할 필요 없는 쁘찡연합의 일원 일부와 상위 헌터들을 제외하면 모두 공격하라 했다.

그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쭉정이는 쳐내야 해. 여기서도 못 버티면 위에서는 반드시 죽어.”

정말로.

98층에서 죽는 것보다는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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