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93화 (693/740)

693화 97층

여러 이벤트와 사건이 터지며 들떠 있던 96층의 분위기도 한결 잔잔해졌다.

결국에는 안전지대의 용도는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게 숙소를 지정하는 것.

초코쪼코도 말하지 않았는가.

97층부터는 지옥이나 마찬가지라고.

96층에서 부활할 때 무법지대에 떨어지면 곤란하다.

여기 모인 등반가 모두 영주권을 받고 여관을 계약하든가 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관 자체가 모자란 게 말이 되냐.”

“아무래도 96층까지 올라오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테이준이 권총을 빙글 돌리며 투덜거린다.

피스 랜드는 등반가에게 우호적이다.

그렇기에 자진해서 영주권을 포기한 이들이 나왔다.

피스 랜드의 수장인 테키드 역시 마찬가지.

대표가 직접 모범을 보이니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안전지대 근처에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

문제는 정작 숙소로 쓸 만한 곳이 없다는 것.

“다른 NPC 집을 등록하면?”

전에 릴카의 작업실이나 별장을 숙소 대신 사용했었는데.

“여긴 좀 달라. 우리도 영주권이 있는 거지, 건물이나 그런 걸 소유한 게 아니야.”

일종의 영구 대여 느낌이라 보면 됐다.

NPC가 먼저 있던 게 아니라 건물이 먼저 있었고.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 직업과 건물을 고른 느낌.

즉, 정식으로 등록할 수 있는 건 여관뿐이었으며.

“그만 궁시렁거리고 움직이자고. 나도 귀찮아.”

“후우. 그래. 가자, 가.”

현재 위로 올라온 등반가 중 영주권을 얻지 못한 이들은 28명이었다.

여관이 워낙 작아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

이후에 추가로 들어올 사람들까지 생각하자면 더 많은 시설을 확보해야 한다.

5개의 안전지대 중 최소 4곳은 자리를 비워 놔야지.

나만 움직이는 건 아니고 멤버들이랑 다른 이들도 다른 안전지대로 흩어졌다.

NPC들도 같이 갔으니 어떻게 잘되지 않을까.

애들 떠드는 것만 봐도 그렇고.

[정수리 핥짝]: 야야. 이쪽은 끝

[냥냥펀치]: 오필리아도 협상 완료했댕

[니머리 탈모]: 나도 협상 잘할 수 있는데 왜 안 데려가냐고!

[정수리 핥짝]: 아냐 아냐. 넌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쓰읍! 앉아! 기다려! 손!

[니머리 탈모]: 손!

[정수리 핥짝]: 옳치 잘한다!

[쁘띠공듀]: 얘네 뭐 하는 거죵?

[냥냥펀치]: 탈모맨 내기 져서 일주일 동안 손! 하면 손 줘야 됨ㅋㅋㅋ

[쁘띠공듀]: 길들여진 탈모맨이라닛! 이건 귀하군여

알아서들 잘 논단 말이지.

2곳은 끝났으니 나만 잘하면 된다.

“야! 뭐 해. 빨리 와!”

“알았어. 간다.”

테이준 뒤에서 몰래 커뮤니티 하던 걸 종료하고 따라붙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제5 안전지대.

군대와 안전지대를 둘러싼 종속 마을로 이루어진 곳.

“빅 마운틴.”

대충 큰 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에 올 생각은 없었다.

테이준도 사실상 이곳은 군벌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기도 했고.

원래는 제1 안전지대로 가려 했으나.

“미친 무법자 놈들. 그 자식들만 아니면 편하게 가는 건데.”

후보지로 정해 두었던 안전지대가 무법자들에게 습격당했다.

결과적으로는 무법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여관이 무너질 줄은 몰랐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몇몇 시설이 파괴됐다.

고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는데, 시스템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 과정이 시간이 좀 걸린다는 모양.

약 한 달 정도면 다 될 거라고는 하는데.

‘한 달은 너무 길어.’

이준석도 말하지 않았던가.

바깥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등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모를까, 그냥 기다리는 데 한 달을 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오기는 했다만.

“이야. 분위기 살벌하네.”

“제1 안전지대 털리고 난 후라 더 그럴걸.”

“이거 말이나 제대로 섞을 수 있나 모르겠네.”

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테키드가 자신과 NPC들의 지지를 적은 성명서.

거기다 그의 아들이 테이준까지 데려왔다.

나름 준비한다고는 했는데 저쪽에서 받아들일까 모르겠네.

테이준 이 녀석도 일단은 무법자로 활동했어 가지고.

빅 마운틴이 군벌이 된 원인이 무법자들 때문이라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

그럼.

옷을 여미고 정문으로 향했다.

“누구인가.”

“피스 랜드의 사절단 신분으로 왔습니다. 이쪽은 테이준. 테키드 씨의 아들이죠.”

“피스 랜드?”

경비병이 의심쩍다는 눈으로 나와 테이준을 살핀다.

“이거면 신분이 증명될까?”

테이준이 반지 하나를 내민다.

테키드가 가지고 있던 반지 중 하나.

각 안전지대의 대표들은 저마다의 커넥션이 있다.

서로를 알아보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들어오시오.”

이내 확인을 마친 경비를 따라 종속 마을을 지나쳤다.

미적인 감각은 전혀 없지만 실용적인 건물들.

군대가 보호하기 때문인지 나름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거 같았다.

무법자들도 여긴 안 건드니까.

역시 평화를 위해서는 강한 힘이 필요한 법이었다.

“안은 크게 다를 게 없네.”

“이 정도면 요새거든?”

“성벽 증축한 것 같긴 하더라.”

안전지대도 피스 랜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성벽이 더 크고 높다는 것 정도?

발리스타 같은 무기도 보이기는 하는데, 저거야 뭐 몬스터 따위한테나 쓸 테니까.

진짜는 저것들이지.

“방호 시스템이라.”

자동 포탑을 비롯한 마법적인 방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군벌이라길래 무식하게 검과 방패나 들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여기 성주가 마법사야. 전투 마법사.”

살짝 흥미가 생기는 와중 테이준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그리고 성격이 더러워.”

“음?”

“인격 파탄자라고. 내가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는데.”

인성에 하자가 있는 테이준이 그리 말할 정도면 어지간하다는 말.

그런 사람이 성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예전에 물건 구하러 여기 온 적 있어. 뭐랬더라. 무법자 새끼가 어디서 얼쩡거리냐고 싸대기 날렸던 것 같은데.”

오우.

한 성깔 하네.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이 녀석도 성질이 더러워서 바로 총을 뽑았을 것 같은데.

“눈치는 더럽게 빨라 가지고 물건 훔친 건 기가 막히게 알더라고.”

“아하. 성주의 물건을 털었다? 마법사인 성주를?”

“좀 둔할 줄 알았지. 뚱보였다고!”

네가 잘못한 거잖아, 미친놈아.

“넌 좀 더 맞아도 될 것 같아.”

“아니, 그 아줌마가 날 때렸다니까?”

“그래요. 뚱보 아줌마한테 맞아서 억울했어요?”

흠칫.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테이준이 몸을 굳힌다.

나야 마력이 일렁이길래 대충 짐작하고 있긴 했다만.

‘이런 건 옆에서 봐야 꿀잼이거든.’

그래서 모른 척했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자연스레 존대를 쓰는 녀석.

슬쩍 한 발 멀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바라봤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여인.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저거 스태프 맞나?’

자기 몸만 한 스태프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끝부분이 돌출되어 있다.

저게 뭐가 스태프야. 메이스지.

드러난 소매로 굵직한 팔뚝이 존재감을 내뿜는다.

와. 핏줄 봐라.

나도 몸이 좋다 생각했지만 뼈대가 다르다.

팔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굵은 몸.

‘저건 살이 아니라 근육이잖아.’

테이준 이 녀석, 겁이 없는 건 알았지만 저런 사람을 건드렸어?

새삼 대단한 놈이다 싶긴 하다만 지금은 목적이 있다.

“반갑습니다.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저도 반가워요. 빅 마운틴을 관리하고 있는 포냐라고 합니다.”

“등반가 영주권 확보 및 여관 사용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쿡. 테이준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버지께서 보낸 편지예요.”

“요즘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스태프를 어깨에 기댄 채 편지를 살피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군요. 맞아요. 안전지대는 등반가들을 위한 것이니까.”

그렇다는 건?

“다만 우리가 이렇게 된 것 또한 등반가들의 영향이 없지는 않죠. 바로 위에 있는 인간이라든가.”

처음에는 파비오를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위라고 하면.

“스마일캡.”

“예. 그자가 한번 휘젓고 간 적이 있거든요. 그 사람은 NPC를 진짜 NPC로 보는 사람이라. 으음.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어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이 뭔가 사고를 친 모양이다.

이상하게 다른 안전지대에서도 등반가를 적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몇 있더라니.

“영주권을 일부를 내주는 건 어렵지 않죠. 물론 그 수만큼 사람들이 나가야 하니 밖에 있는 무법자들을 청소해야겠지만.”

“토벌하고 오라는 거군요.”

“그렇기는 한데. 이번에는 필요 없어요.”

포냐가 싱긋 웃더니 날 바라본다.

“릴카의 친구한테까지 계산적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입을 벌렸다.

“마침 저기 오네요.”

“이야아아아압!”

그녀의 말마따나 저 멀리, 건물에서 누가 뛰어내리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쫑긋 솟은 귀와 풍성한 꼬리.

“나쁜 노망!”

“크학!”

그대로 내게 드롭킥을 날리는 녀석.

옆구리 나가는 줄 알았네.

“안전, 지대에! 와 놓고! 그냥! 가?!”

“악! 왜 때리는데!”

“계승자라는 놈이 그렇게 쌩하고 가냐공!”

아무래도 95층에서 파히루를 잡을 때 대화도 안 섞고 위로 올라가서 삐진 모양.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계속 죽으면서 놈을 압박해야 했어서.

주먹이 조그만해서 그런가. 힘이 한곳에 몰리는 느낌.

일단은 좀 맞았다.

릴카 입장에서는 서운할 만한 일이니까.

내려치는 주먹에 힘이 빠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미안, 미안. 그때는 어쩔 수 없었거든.”

“으으음. 하나뿐인 계승자가 이 모양이라니잉. 에이잉.”

못마땅하다는 듯 바닥을 차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만져서 그런가. 그립감이 좋네.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포냐.

“여관 수용 인원이 12명이 한계라 영주권은 12개만 비워 둘게요.”

“배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내일 바로 등록하면 될 거예요. 두 분은 좋은 시간 보내시고.”

-꾸우욱.

“으아악! 왜! 난 왜!”

“테이준은 잠깐 저와 대화 좀 나누죠. 테키드 씨 근황도 궁금하고요.”

“사, 살려 줘! 이블아이!”

포냐가 테이준의 귀를 잡아끌며 멀어진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마에 힘줄이 선 게, 뒤끝이 좀 있는 성격인 모양.

자연스럽게 테이준을 무시했다.

“96층까지 올라와서 다행이양.”

“그럼 못 올라올까 봐?”

“후후. 누구 계승자인데 못 올라올깡.”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펴는 녀석.

왜 네가 자랑스러워하냐.

뭐, 본인이 좋다니 즐기게 두도록 하고.

“릴카, 궁금한 게 있는데.”

“몬뎅?”

나도 올라가기 전 준비를 좀 할까 한다.

“99층에 있는 녀석. 그 녀석 잡았었어?”

릴카를 비롯해 킬더레스, 알리오스 등등 99층까지 올랐던 이들이 있다.

특히나 릴카는 멸망에 가까워진 세계에서 혼돈의 파편을 잡고 돌아다녔을 정도로 많은 일을 겪었다.

비록 내게 쓰레기 같은 권능을 줬지만 여러 방면으로 내게 도움을 준 것 또한 사실.

궁금했다.

릴카뿐만 아니라 킬더레스, 펠라인도 99층에 올랐으니 숭배자의 왕을 만났을 거다.

이겼을까? 그 괴물을?

“궁금행?”

“못 말하는구나.”

내 말에 릴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말할 수 없는 정보라는 뜻이다.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지금은 안 돼. 그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도 있고 말이양.”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퀘스트 형식으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

-띠링.

[릴카의 부탁 (9)- 강제 퀘스트]

-릴카는 계승자를 믿습니다!

-위로 올라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죠.

-그런 당신을 위해 릴카가 좋은 물건을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그럼 재료를 구해 와야겠죠?

오.

나한테 뭔가 만들어 주려는 건가.

퀘스트 내용을 살피는 타이밍, 릴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일 바로 올라갈 거징?”

“그래야지. 바깥 상황이 안 좋거든.”

“우웅. 그랭.”

뭔가 시무룩한 표정.

피식 웃으며 녀석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악!”

“내일까지는 시간 좀 있으니까 같이 놀자고.”

“오오옹! 좋앙!”

지옥 같은 곳에 가기 전에 잠깐 여유 부리는 건 괜찮잖아?

그렇게 하루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다음 날.

[97층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웅.

나와 멤버들은 위로 올라갔다.

스마일캡이 있는 곳.

동시에.

‘탑의 최상단 층.’

-타앗.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내가 있는 곳은.

“이야. 분위기 살벌하네.”

섬이었다.

그것도 바다 대신 독극물인지 뭔지 모를 것 사이에 갇힌 섬.

시커멓게 죽은 모래사장.

그 위로 파도에 쓸려 내려온 시체와 장비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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